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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36화 (36/288)
  • 36화

    종남의 검(2)

    허름한 도복과 낡은 도관.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얼굴이 흙먼지로 꼬질꼬질했다.

    “종남의 벽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화산의 장로들을 향해 포권하는 그 모습은 실로 당당했다. 과연 종남의 검선이 눈여겨 볼만한 인재다.

    “화산파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나는 장문인을 맡은 굉허라고 하네.”

    “이렇게 환영해주셔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제자인 종화입니다. 종화야 인사 드리거라.”

    “종화입니다.”

    게다가 그 제자 역시 범상치 않다.

    굉허 만한 고수라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움직임, 눈가에 흐르는 정광, 기도, 호흡의 깊이, 사소한 움직임들. 무엇보다 몸 곳곳에 새겨진 작은 상처들과 약간의 변형이 찾아온 손바닥까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 무림을 떠도느라 고생이 많구나.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얼마 전 생일을 지나 이제 열다섯입니다.”

    “열다섯이라······.”

    굉허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다. 어차피 화산의 무공은 대기만성이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십 년 후라면······. 다시 한번 종화라는 아이에게 눈이 갔다. 정말 종남이 작정하고 키워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고생은 없었습니다. 사부님과 함께 무림을 떠도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운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화산에도 오를 수 있었고요.”

    “허허, 화산에 오른 것이 그리 좋더냐.”

    “네, 말로만 듣던 화산의 고수들을 직접 뵐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다만 아쉽게도 제 또래 중에서는 괜찮은 녀석이 안 보이긴 했지만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

    장문인이 크게 노하려는 찰나

    -짝!!

    벽운의 손등이 빠르게 종화의 얼굴을 두들겼다.

    주르륵 흐르는 붉은 코피.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들과 산에서 자라 예의가 아직 부족합니다. 제가 단단히 교육할 터이니 부디 화를 푸시지요. 어서 사과드려라.”

    사부의 말에 종화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배움이 부족하여 그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장문인으로써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노기를 터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린 나이에 치기를 보이는 것이 무슨 문제겠느냐. 여독이 쌓였을 테니, 그것을 좀 풀고 이야기는 저녁에 차차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

    “종화야.”

    “네, 사부님.”

    “이 사부가 알아서 다 해줄 테니 나서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느냐?”

    “기억납니다. 어디 그것만 기억나겠습니까? 사부가 잠깐만 기다리면 돌아오겠다고 하시고 사흘이나 걸리셨던 일이라든지, 알아서 조심히 처리하겠다고 하시고는 남의 집 담벼락 죄다 무너트렸던 일 같은 것도 하나도 안 까먹었습니다.”

    -끄응

    “거 참, 너는 쓸데없는 것들만 잔뜩 기억하는구나. 그보다 얼굴은 좀 괜찮으냐?”

    “네, 별로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피만 조금 났는데요 뭘.”

    “영악한 녀석 같으니. 하지만 화산의 성향을 생각할 때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비무를 피할 확률이 높은 것 잘 알고 있지?”

    “괜찮습니다. 부전승도 승리는 승리니까요. 일단 일승 하고 시작하는거면 사부님도 부담 없고 좋으시잖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무승부는 확보니까요.”

    “어허. 무승부라니. 이번 기회에 네 사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네 그 작은 머릿속에 존경심을 아주 단단히 심어줘야겠구나.”

    * * *

    “이, 이이 벽창호야!!”

    강아현이 빼액 소리를 지르고 사라졌다.

    어쩔 수 없었다. 종남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 가자는 녀석의 제안은 솔깃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번뜩이는 응용도 결국에는 탄탄한 기초에서 나오는 법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당연한 말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나의 몸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몸에 완벽하게 익은 검술도 조금씩 그 감각이 흐트러진다는 뜻이다.

    매일 아침, 자소공을 통하여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몸에 익은 검술의 초식들을 반복 수련하는 것으로 감각을 다듬는다. 그렇게 혹사한 몸을 포원공으로 달래고 몽원경에서 사조님과 실전과 같은 대련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런 빡빡한 일과에도 불구하고 몸의 감각은 여전히 조금 어색했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이 다람쥐 챗바퀴 돌아가는 것 같은 일과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네?”

    “아니다. 어서 검이나 들거라.”

    증무 태사조님은 여전히 내가 익힌 검술로 딱 나와 같은 수준의 내공만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태사조님을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태사조님은 검으로 내 몸을 찌를 때마다 꼭 한 마디씩을 남기셨다.

    “난잡하다.”

    “걷지도 못하는 것이 뛰려고 하기는.”

    “멍청하기는.”

    “둔하구나.”

    물론 그 대부분은 이러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가끔 칭찬 비슷한 말도 존재하긴 했다.

    “뭐, 그 나이대의 나랑 붙는다면 50초 정도는 버틸 만하겠구나.”

    “그래, 훌륭하게 기었구나. 그러면 이제 슬슬 걷기 위해 노력해봐라.”

    대체 어디가 칭찬인가 싶겠지만 태사조님을 벌써 일 년 반 가깝게 경험해본 바로는 이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칭찬이다.

    참고로 청무 태사조님을 처음 보고 하셨던 말은

    “멍청한 노력도 저 정도까지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이었다.

    -푸욱

    “청춘을 그렇게 버린 것 치고는 영 부실하구나.”

    오늘도 태사조님의 검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 * *

    공야찬의 시선이 백운호의 동작을 훑었다.

    ‘벌써?’

    저토록 급격하게 몸을 키우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초식이 이어진다. 놀라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한 재능이다. 반면 공야찬 자신은 벌써 일 년 반에 가까운 시간을 연마했건만 여전히 매농검의 요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동작 자체는 이미 완벽하게 몸에 익었다. 초식의 전환 역시 자유롭다. 하지만 부족했다. 아마 이것도 백운호가 아니었다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목검을 들어라.”

    “네, 사부님.”

    내공을 제한하고 검을 섞는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와 백운호의 차이는 까마득하다. 본래라면 일방적인 지도가 됨이 옳았다.

    하지만 아니다.

    -부웅!!

    순간적으로 허리를 튕겨내 간신히 검을 피했다.

    도대체 어떻게!!

    분명 직전까지도 공야찬 자신이 유리한 국면이었는데 어느새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목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목검을 쳐내고 조금 전의 그것을 복기해봐야지. 앞선 격검들의 흐름 역시 기록해뒀으니 그것과 비교 대조해본다면 무언가 진전이 생기지 않을까?

    약간의 내공을 더했다.

    정확히 백운호가 버텨내기 힘든 수준의 힘이다.

    -딱!!

    그래, 분명 그랬어야 했다.

    운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검을 쥔 팔뚝의 전완근이 선명하게 부풀었다. 놓치지 않는다. 백운호는 바로 며칠 전보다 또 성장했다.

    녀석 손에 쥐어진 검의 파지법이 겸파에서 압파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남은 경력을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왼쪽으로 크게 한 걸음.

    검이 날아든다.

    속임수다. 진짜는 녀석의 오른발이다.

    피할까?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수 싸움에서 녀석은 유례를 찾기 힘든 천재다. 그리고 이미 흐름은 녀석에게 넘어갔다.

    남은 것은 반의반 호흡.

    정순한 진기가 기맥을 타고 돌았다.

    공야찬의 사부가 시작하여 그가 완성 시킨 납매검의 일 검이 깔끔하게 호를 그렸다. 그 궤도에 있는 것은 설사 강철이라도 베어내는 절대의 일격이다.

    그리하여 그 검격 앞에 백운호가 쥐고 있던 목검의 삼분지 일이 잘려 나갔다.

    -꿈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노렸던 곳은 검의 정중앙.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재능이다. 비록 만전의 상태에서 사용된 일격은 아니라지만, 이것조차 이만큼이나 피해낸다고? 이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재능, 그리고 그 재능에 걸맞은 성장 속도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드디어 그 재능에 어울리는 육체가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봐야할지도 몰랐다.

    백운호의 급성장은 단순히 부족했던 근력이 보충됐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길이가 달라졌다. 예전의 백운호라면 한 걸음 더 파고들어 와야 했던 공격이 이제는 그만큼 더 먼 곳에서 닿는다.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공야찬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부님 방금 그건? 검기의 기초적인 형태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예전에 준형이가 검기를 선보였다고 했을 때, 단순히 내력만 밀어 넣는 건 검기가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검기는 심기체의 합일이 이뤄져야지만 검기라고요. 그리고 방금 그건 예전에 사부님이 보여주셨던 검기와 비교하면 크게 부족했습니다만, 그 기본적인 원리가 동일하다고 느꼈습니다.”

    공야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지금 이걸 저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저도 이제 수련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의미인가요?”

    “수련?”

    “네, 이전에야 내공이나 몸이 크게 부족했으니 감히 시도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물론 사부님이 보여주셨던 그것에 비하자면 크게 부족하겠지만요.”

    공야찬이 잠시 생각했다.

    가능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그럴 리가.

    그가 무려 서른여덟 살에 이룩한 경지다. 아무리 이 녀석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해도 이게 가능할 리 만무하다.

    그래, 물론 조금 전의 위력.

    그러니까 검기라고 할만한 최소한의 위력이라면 자격 자체는 갖추기는 했다. 가진 모든 내력을 털어 넣는다면 조금 전 공야찬의 반의반 호흡 정도는 따라올 만하고, 최근 제법 힘이 붙은 육체도 그 정도는 버텨낼 만하다.

    하지만 백의 힘을 가진 사람이 삼십 정도를 정확히 내는 것과, 애초에 삼십 밖에 못 내는 사람이 삼십을 꺼내는 것은 그 난이도 자체가 다른 일이다.

    “물론 이대로 더 정진한다면 그리 먼일은 아니겠지. 나와는 입문 시기 자체가 다르니까. 하지만 아직이다.”

    “그렇군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는 백운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움직였다.

    귀여웠다. 어쩌면 사부도 나를 바라볼 때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걸까?

    ‘사부?’

    그 순간 공야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부라니.

    그럴 리가. 공야찬이 백운호를 제자로 맞이한 것은 그에게 자신의 의발을 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거래다.

    “어제 알려줬던 자운검의 초식을 펼쳐봐라.”

    * * *

    “호오, 그러니까 화산이 저런 녀석을 꽁꽁 감춰두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로군.”

    “감춰두기는 무슨. 자네도 청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않나.”

    “하긴, 오태산 혈사와 잔살비마의 그 일을 생각하면 청허가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걸 영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기는 하지.”

    “어쨌거나. 어떤가? 내 말이 맞지? 자네의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저 아이라면······.”

    종남의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 시대에 저런 녀석이 있었다면 어쩌면 천무십칠성이 아니라 천하제일인이 또 나왔을지도 모르겠는데?”

    “천하제일인은 모르겠고. 자네 별호에 붙은 검선은 저 아이가 가져갔을 확률이 높겠지.”

    “뭐,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참 안타깝구먼.”

    “안타깝다고? 뭐가?”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운호를 바라보며 종남의 검선이 선언했다.

    “저런 재능을 갖고도 천하제일이 아니라 이인자에 만족해야 할 테니 말이야.”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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