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종남의 검(1)
아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었다.
화산에 삼대 제자들을 받던 그 날.
그곳에 모인 아이들은 모두 새로 지은 좋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고양된 아이들의 얼굴에는 성취감, 자부심,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강아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헌데, 그런 강아현의 눈에 특이한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다른 아이들이 집에서 챙겨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반하여, 그 아이는 평범한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그 아이가 들어온 것은 그 옷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평범한 무명옷이야말로 그 아이의 가장 괜찮은 부분이었다.
깡마른 몸. 작고 왜소한 체구. 시꺼멓게 타들어 간 피부. 그 아이가 바로 백운호였다.
그런 눈에 띄는 첫인상과 달리 백운호의 성적은 평범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체구, 심지어 여자애들 가운데서도 그리 큰 키가 아닌 강아현 자신보다도 손가락 두 마디는 작은 체구에 체질에 있어서도 하품이라 평가받는 그가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결국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감춰왔던 발톱을 드러냈다.
중상위권이라 평가받던 하재철을 꺾었고, 최상위권인 장굉을 꺾었으며 마지막에는 삼대 제자 가운데 최고라 평가받던 강아현 자신과 이준형마저 연달아 꺾어버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녀석이 자신을 꺾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할 때 삼대 제자 가운데 녀석을 알아본 것은 강아현 자신이 유일했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을 그저 이준형을 꺾기 위한 디딤돌 정도로 여겼다.
너무나도 분했다.
그날 이후, 오직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덕분에 제법 커다란 성취도 얻었다. 이단공에 머물러있던 옥녀심공을 삼단공까지 상승시킨 것이다. 현 홍매당의 당주인 그녀의 어머니도 열여덟은 돼서야 얻은 성취라고 했다.
뽐내고 싶은 생각에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서 자랑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마땅한 핑계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때마침 딱 좋은 이유가 생겨났다. 지체 없이 몸을 날려 공야찬의 모옥으로 향했다. 그 비리비리한 녀석에게 자신의 무공도 뽐내고 이제 네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준형이 아닌 나 강아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야찬의 모옥에 도착했을 때.
-후우
그곳에는 웃통을 벗고 무공을 단련 중인 사내가 있었다. 뭐, 사내가 웃통을 벗은 것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우선 길고 얇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소해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사내의 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 건가? 근육의 크기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명함이 다르다.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살이 조금 붙기는 했지만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백······운호? 너 정말 백운호야?”
그러니까 저게 정말 그 비리비리하던 백운호라고?
“강아현?”
맙소사.
대체 십 개월 동안 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오래간만에 보는 아현이는 많이 작아져 있었다.
본래 나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커서 올려봐야 했었는데, 이제는 정수리가 내 코 높이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그 때문일까? 이전에 녀석을 볼 때 느꼈던 ‘아름답다’라는 느낌보다는 ‘귀엽다’라는 느낌이 먼저 와닿았다.
“강아현?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 그게 그러니까.”
강아현의 시선이 슬쩍 내 몸으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웃통을 벗고 있었구나. 서둘러 옆에 걸어둔 옷을 몸에 걸쳤다.
최근 급하게 키가 자란 덕분에 옷이 조금 짧았다.
“혹시 사부님 뵈러 온 거야? 요즘 사부님은 이 시간에는 조양봉 쪽으로 가서 수련하셔서. 반 시진 정도 있어야 도착하실 텐데?”
“아, 그래?”
“그나저나 진짜 오래간만이다. 거의 일 년만인가? 예전에 홍매당에 갔을 때 듣기로는 폐관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이제 나왔나 보네.”
생각해보니 그날 밤 이후로 첫 만남이다. 사실 위석단을 받으려 옥녀봉에 갔을 때 혹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폐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어, 성취가 꽤 있었어. 근데 운호 너는 정말 몰라보게 변했네.”
“한참 클 때니까. 약도 좀 먹었고.”
“칠 척하고 오 촌 정도인가?”
강아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 어.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정확히는 칠 척 사 촌.”
“열 달 전에는 요만했던 것 같은데. 엄청 컸구나.”
“에이, 그렇게 작지는 않았지. 그나저나 진짜 무슨 일이야?”
“아, 사백님이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어서······. 근데 생각해보니 너도 좋아할 만한 소식이겠다.”
“소식? 무슨 소식?”
주변에 딱히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며칠 뒤에 종남에서 사람들이 방문한다더라.”
“종남에서 사람이? 그렇구나. 근데 그게 왜 사부님이랑 내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라는 거야?”
“방문하는 사람이 벽운 도사랑 그 제자래.”
벽운?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도호였다.
“아이참. 검선의 수제자잖아.”
“검선의 수제자?”
“그래, 물론 실제로 태을검선의 제자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종남에서 우리 화산파를 넘어서기 위해 이를 악물고 키워냈다고 하잖아.”
“아, 기억난다.”
“지난번에 사백님이랑 네가 서안에서 그 활약을 펼치고 얼마 안 돼서 강호행을 나왔었거든. 강호에 악명이 돌던 악당들을 처단했고, 최근에는 영하부에서 악명 높던 근갑대력귀(筋鉀大力鬼)까지 참했다고 하더라.”
영하부는 섬서와 감숙의 경계에 있는데 그곳에는 특별히 대문파라고 할만한 백도 문파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갑대력귀를 폄하할 수는 없었다. 강호에서 오랜 시간 이름을 날린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단하네. 그런데 그런 분이 대체 본파에는 왜?”
“명목상으로는 종남으로 귀환하는 길에 본문에 잠시 들렀다 가겠다는 건데······. 뭐 뻔하지.”
“뻔하다고? 뭐가?”
강아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눈이 참 크고 맑았다.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까만 눈동자와 그에 대비되는 하얀 흰자위다. 그리고 얼굴에는 분을 바른 건가? 뽀얀 피부에는 작은 구멍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입술은 또 어찌나 붉은지.
“바보야. 당연히 너, 그리고 사백님 때문이잖아.”
“응? 나랑 사부님? 아!!!”
“그래, 뻔하잖아. 너랑 사백님이 서안에서 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그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주려고 강호에 나왔는데, 사실 인급의 마두가 어디 흔하겠어? 영하부까지 돌아다니면서 협행을 했지만 아무래도 근갑대력귀 정도로는 무게감이 떨어지잖아.”
“그래서 직접 화산을 오른다?”
“명목이야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겠지만, 결국 비무를 신청하겠지.”
“대담하네. 감히 화산에서 화산의 문도와 싸우겠다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내가 좋아할 만한 소식은 아닐 것 같은데? 애당초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왜? 종남에서 애초에 무림행을 시작한 이유가 운호 너랑 사백님이 그 마두를 잡아낸 것 때문이잖아. 비무도 당연히 사백님과 너에게 신청하겠지. 벽운 도사님은 사백님에게. 그리고 그 제자라는 녀석은 너에게.”
글쎄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재밌기는 하겠지만, 과연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풀릴까?
화산의 수뇌부는 검종을 경계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검종의 고수가 탄생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탄생한 고수를 보고 다른 제자들이 검종의 무공에 섣부르게 도전하는 일을 경계하는 것이다.
헌데 화산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종남의 무인을 꺾는다? 화산의 수뇌부에서 그만큼 강렬한 장면을 과연 보여주려고 할까?
* * *
“사부님, 여기가 화산이로군요. -흐읍!! 확실히 종남산이랑은 느낌이 확 다른데요.”
짧은 더벅머리.
외양만 봐서는 이게 개방의 거지인지, 종남의 도사인지 헷갈리는 아이 하나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어허, 종화야. 종남의 제자라면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입성이 엉망인 것은 곁을 걷는 중년의 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단정하게 정돈했다고는 하지만 헤지고 낡은 옷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미 저희 옷부터가 바른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크흠, 그거야 수행을 나온 처지에 항상 새 옷을 사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누가 들으면 종남이 가난하여 충분히 경비를 주지 않은 줄 알겠습니다. 이게 다 사부님이 그 사람들에게 경비를 모두 나눠주신 것 때문 아닙니까.”
“어허, 그거야 그 사람들 사정이 워낙에 딱하지 않았더냐. 그 모든 것이 순양진인의 뜻이겠지.”
“글쎄요. 사부님이 조금만 조심하셨더라면 근갑대력귀인지 하는 그 녀석을 잡는 데 그렇게까지 힘을 쓰실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 사람들 집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크흠. 거 녀석 참. 그 이야기는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지. 그보다 이제 슬슬 화산의 산문이 보일 때가 됐는데······.”
“그러게요. 화산이라······. 정말 기대 되네요.”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사부와 모른 척 넘어가는 제자.
그리고 저 먼 곳에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던 늙은 도사가 입을 열었다.
“나이를 먹더니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진 것 아닌가?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마중 나오는 게 이리 늦어서야.”
“손님? 마중? 의도부터가 불순한 불청객이라면 당장에 쫓겨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그 말은 저기 서안에서 엉덩이 비비고 눌러앉아 있는 녀석들에게 들려주고 싶군.”
주름 가득한 얼굴. 나이를 먹어 쪼그라들기 시작한 신체. 하지만 그 번뜩이는 눈만큼은 젊은 시절에 못지않았다.
태을 검선 자명.
화산의 권신과 함께 섬서성을 대표하는 종남의 무인. 그는 천무십칠성의 일좌로 검에 관해서는 강호 최고를 다투는 남자였다.
“어째 얼굴은 더 좋아졌구만. 자하 기공. 참으로 대단한 무공이야. 나이를 먹으면 늙어야 하는 당연한 하늘의 이치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다니 말이야.”
“흥, 그러는 순양일기공은 뭐 어떻고. 겉은 쪼글쪼글 늙어가면서도 속은 아주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여전히 음양의 이치 따위는 개나 주겠다는 기세로군.”
검선과 권신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십 대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때로는 원수처럼 싸웠고, 때로는 주저 없이 등을 맞댔다. 그렇게 무려 육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 무려 육십 년이다.
두 사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술은 준비해뒀겠지?”
“안 그래도 그 늙은 나이에 강호를 떠돌며 고생한다는 소식 듣고 짠한 마음에 좋은 놈으로 준비해뒀지. 무려 30년이나 묵은 행화촌주일세.”
젊고 늙은 두 노인이 서로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