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화산비사(4)
대체 무슨 용무일까?
그 권신이 늦은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 보자는 이야기를 남기다니. 굳이 왜 나를? 설마 검종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 것일까?
쉽게 생각해보면 결국 기술이 우선이냐, 아니면 내공이 우선이냐의 문제에 불과하다.
사부님은 항상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 길은 이치에 닿는 길이 아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검기가 아니고, 그것은 검강이 아니며, 그것은 이기어검이 아니다.
궁금했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일까? 어차피 같은 화산의 무공 아니던가.
사실 이상한 것은 사부님만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이준형을 상대로 내가 승리했을 때, 무언가 더 커다란 반응을 기대했었다. 녀석은 문파 전체의 기대를 받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항상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던 내가 승리를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느닷없는 서안행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와 사부님이 서안에서 해낸 일은 강호 전체를 진동시킬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섬서성 전체 정도는 진동시킬만한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문파원들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라도 대대적으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리 권신이 팔년 만에 본산을 방문하는 일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현재 화산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사부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검종이다.
내가 검종의 무공을 택해야 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이준형과 같이 타고난 녀석들과는 효율이 다르다. 그렇기에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백매각.
자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이신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몸에 힘을 풀어라.
그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억센 팔뚝이 나의 몸을 단단히 옭아맸다. 눈 깜빡할 사이 나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허공답보라고 했던가? 청무 태사조의 발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박찰 때마다 나를 짊어진 태사조님의 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쭉쭉 나아갔다.
“이 정도면 되겠군.”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곳, 태사조님이 나를 내려놓으셨다.
가까이서 보니 새삼 놀라웠다. 올해 여든이 넘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외모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 검종의 무공을 계승했다고?”
“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구나.”
“네?”
태사조님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다.
대체 무신이 나를 왜!! 대체 검종과 기종이 무엇이길래!! 하지만 그런 의문을 표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사조의 손이 움직였다.
자운장(紫雲掌)
그래, 그 형식은 분명 이준형이 얼마 전 비무에서 보여줬던 자운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힘의 단위가 달랐다.
불과 얼마 전. 서안부의 마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 의지와 움직임을 예측한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일격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것이 권신의 일격인가?
마인의 공격이 떠올랐다.
고작 세 번. 마인이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데는 그 세 번으로 족했다.
만약 그 순간 사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네 번째 공격이 들어왔더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나를 향해 날아오는 저 공격은 명백히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사부님이 보여줬던 그 일 검을. 명백한 의지로 세상을 할퀴었던 그 공격에 비하자면 마인의 그 압도적인 공격도, 그리고 권신의 저 일격도 그저 무식하게 집합된 힘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스르륵, 검이 뽑혀 나왔다.
사부의 일격을 떠올렸다.
따라 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공야찬만이 펼칠 수 있는 공야찬만의 납매검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펼쳐낼 수 있는 최선의 검을 펼쳐내는 것이었다.
사부와는 달랐다.
사부의 일검이 세상을 할퀴는 일검이었다면, 이것은 가벼운 봄바람만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내가 펼쳐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나의 납매검을 펼쳐냈다.
“역시, 내가 제대로 봤구나. 검종지보, 검종지보로구나.”
그리고 그 마지막 충돌의 순간, 태사조의 손바닥이 거짓말처럼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단순히 넘쳐나는 힘으로 가득한 일격이 아니었다.
태사조의 손에는 사부의 일 검이 보여줬던 것 같은 ‘이치’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권신의 오른손이 나의 검을 움켜쥐었다.
마치 강철 집게에 잡힌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어쩌면 그저 과장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거늘······. 미안하다.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던지라 재차 확인이 필요했다.”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청무 태사조가 놀란 어조로 되물었다.
“설마 눈치를 채고 있던 것이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듣고 자랐던 화산의 권신은 대영웅이었으니까요.”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애당초 권신 청무 진인이라면 화산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런 사람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고작 나 같은 아이를 직접 죽이기 위해서 직접 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진짜 생명이 위험한 것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그런 검을 보여줬다는 말이로구나.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일말의 의심이 있었으니 사력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잠깐의 침묵.
태사조가 물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어째서 묻지 않는 것이냐.”
“제가 궁금할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고자 이렇게 불러내신 것일 테니까요. 질문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음에도 늦지 않겠지요.”
“그래, 그렇겠구나. 그렇다면 대체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좋을까. 어떻게 보자면 너무나도 단순한 문제이거늘. 막상 말을 하려니 참으로 어렵구나.”
잠시 자리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던 태사조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너도 앉거라. 제법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다.”
“네.”
“너는 검종과 기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검술일성과 선심후수라. 검술로 도를 이루는 것과 마음을 닦고 수를 익혀 도를 이루는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사조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것이 그리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기종은 우도이며 검종은 좌도다.”
“네?”
“본래 화산파 공부의 요점은 한 가지다. 선심후수. 결국 공을 완성하면 술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중에 본문 무공 가운데 가장 위력이 높은 검술을 완성한다면 평범한 내공으로도 도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검종의 시초다.”
“하지만······, 본문의 증무 태사조님은 검술을 완성하여 등선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좌도 역시 도(道)다. 하지만 우도가 모두가 걸어갈 수 있는 큰길이라면, 그곳은 오직 천품을 타고난 이만이 통과할 수 있는 작은길이다. 천하에 증무 태사조님 같은 이가 대체 얼마나 있겠느냐. 증무 태사조님 이후 본문의 수많은 재능들이 그 길에 도전하였으나 그 가운데 경지를 밟은 이는 불과 한 줌이었고, 그나마 경지를 밟은 이들 모두가 쉰 살을 넘기지 못하고 퇴보하였다.”
확실히······, 사부는 같은 배분의 다른 제자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늙어 보인다. 심지어 지금 눈앞에 있는 태사조님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우리 사부보다 더 젊어 보였다.
“증무 태사조님이 등선하시고 40년. 화산파는 구파에서 축출이 논의될 만큼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아마 백운 사조님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됐을지도 모르지.”
“천하제일······.”
“아니, 그것은 단순히 백운 사조님의 무공이 천하제일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했던 것은 규율과 제도에 있다. 그분은 화산의 규율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으로 화산 자체를 다시 강하게 만드셨다. 개인의 재능이 아닌 문파 자체로써 천하에 우뚝 설 수 있게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현재의 화산이 이전에 비해 약해졌다고 이야기한다.”
태사조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에 불과하다. 백운 사조님의 화산파가 명성을 떨친것이 백운 사조님 개인의 명망이었다면, 지금의 화산은 다르다. 나는 백운 사조님에 미치지 못하고 우리의 실수 덕분에 굉자배에는 치명적인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그런데도 화산은 여전히 소림, 무당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툰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백운 사조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증거다.”
검종과 기종. 좌도와 우도.
그리고 오직 증무 태사조님만이 성공했던 길.
“하지만 화산에는 이미 실패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설사 그런 사람이 또 나온다고 해도 과거의 교훈을 보고 그때와는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청허와 굉허. 그 아이들은 소극침주(小隙沈舟)의 가르침을 따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아이들의 경험이 그러했고, 그 아이들의 위치가 그러하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에게 제2의 증무 태사조님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이 그 아이들의 업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소극침주.
작은 틈이 배를 침몰시킨다. 화산의 개파조사이신 관윤자님의 가르침이다.
“허나 너 개인으로만 보자면 해결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녀석들과 나의 업은 다르다. 백운 사조님 이후 나에게 물려진 업은 오직 한 가지. 화산 무공의 완성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너에게 한 가지를 권유하마.”
청무 태사조님이 선언하듯 말씀하셨다.
“검종이 아닌 기종의 가르침에 따라 무공을 익혀라. 좌도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방문(傍門)이 아닌 무문(無門)으로 도를 얻어라. 그리한다면 내가 직접 너에게 화산 기종의 정수를 물려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