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화산비사(3)
권신 청무 진인.
그는 천하제일인 백운 진인의 직계 제자이며, 최소한 섬서성 사람들 사이에서만큼은 단순한 천무십칠성의 일좌가 아닌 천하제일인이었다.
나는 섬서성에서 태어났다. 그런만큼 태어난 이후부터, 저잣거리를 떠돌던 시기까지 그분에 관한 일화는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다.
이야기 속에서 그는 10척, 아니 때론 12척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홀로 수백의 마인을 때려잡았고, 일면식도 없는 늙은 노파를 위하여 며칠 밤을 달렸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장문인 자리를 포기했다.
물론 저자의 소문들이 으레 그렇듯 과장이 잔뜩 붙은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최소한 내가 듣고 자란 그 이야기들 속에서 권신 청무진인은 이미 신화속에나 나올법한 영웅이였다.
그렇기에 기대가 됐다.
물론 나는 이미 화산의 전설적인 고수인 증무 진인께 사사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에게 있어서 화산하면 떠오르는 고수는 역시 권신 청무 진인이었으니까.
현재 화산에 남아있는 모든 인원이 대연무장으로 모였다.
그리하여 그 숫자가 물경 이백이십을 헤아림에도 불구하고 고요하다. 오래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음에도 잡담 하나 나오지 않았다.
굉허 사조님이 장문인 자리를 물려받고 벌써 팔 년. 청무 태사조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산을 내려오신 적이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권신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떨려왔다.
약간의 기다림.
대체 언제 오시는 것일까?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대연무장이 술렁였다.
‘뭐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나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새인가?
아니, 그럴 리가.
저 북쪽.
까마득한 곳에서 검은 점 하나가 그 크기를 키웠다. 아니, 사람의 몸으로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그 답이 존재했다. 허공답보(虛空踏步)니 능공허도(凌空虛道)니 육지비행(陸地飛行)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졌다.
-탁
대연무장 한켠에 미리 준비된 단상 위에 그가 내려앉았다.
검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호목. 한순간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크다’라는 감각을 느꼈다. 키는 8척 정도? 장광과 비슷한 키다. 물론 그것만 하더라도 거인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내가 ‘크다’라고 느낀 것은 단순히 키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가 그에게서 풍겨났다.
제왕의 기세? 아니, 아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산악, 혹은 항거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마주쳤을 때나 느낄 법한 감각이다. 저잣거리를 떠도는 말 중에 권신의 키가 10척이라느니 12척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이해가 됐다.
영원할 것 같은 정적의 시간.
착각일까? 아니, 아니다. 청무 태사조의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그것은 흡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다.”
그 뒤를 이어 장문인을 비롯하여 사조님들이 청무 태사조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백님, 대공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태사조님의 분위기에 눌려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하던 사실을 또 한 가지 깨달았다.
내공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반로환동을 한다고 했던가?
‘주름이 없어.’
사실 사조님들도 나이에 비하자면 매우 젊어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환갑을 넘기기도 힘들다. 헌데 사조님들 가운데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흰 머리를 찾기 힘든 분도 계셨다.
하지만 청무 태사조님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 내 옆에 계신 사부님과 비교해도 오히려 더 젊어 보일 지경이다.
“본 노조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선 것은 지난 몇 년간의 수련으로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꿀꺽.
사람들의 긴장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권신이다. 현 강호에서 가장 최강에 가까운 사람 중 하나. 그런 분이 팔 년간의 폐관에서 얻은 심득이다.
기연이다. 만약 강호에 풀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한바탕 피바람이 불만한 내용이겠지.
“묻겠다. 내공은 무엇이고 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것인가?”
시작은 화산의 제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질문이었다.
태사조의 시선이 닿은 삼대 제자 하나가 얼른 그 질문에 답했다. 장광이었다. 확실히 덩치가 커서 그런지 눈에도 잘 띈다.
“내공은 대우주의 기운을 소우주인 인간의 몸에 담음을 뜻합니다. 진기는 그러한 내공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가공되어 특정한 성질을 띄게 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대우주의 기운을 그대로 담아두지 않고 진기로 가공하는 것인가?”
장광 녀석의 말문이 막혔다.
태사조의 시선이 다른 제자에게 향했다.
“흙과 나무는 그대로 둔다면 그저 흙과 나무겠지만, 인간의 손을 탄다면 그릇도 되고, 종이도 되고, 때로는 저 커다란 건물이 되는 법입니다.”
“커다란 건물이 꼭 흙과 나무보다 좋은 것인가?”
“좋고 나쁨은 구분할 수 없지만, 필요와 불필요를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의 문답이 이어졌다.
질문들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누군가의 말문이 막히면 그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삼대제자를 거쳐 이대 제자로. 그리고 일대 제자들까지. 또한, 그 질답의 중간중간 몇몇 사람들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었다.
“가끔 검가에서는 검기에 필요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고는 한다. 아이야 잠시 검을 줘보겠느냐?”
장광이 서둘러 자신의 검을 끌러 청무 태사조에게 전했다.
“어디 보자.”
삽시간에 장광의 검에서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 검 주변, 무형의 일렁거림이 눈으로 보였다. 터무니없는 내공이다.
저거라면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사부가 보여줬던 그 일검과 청무 태사조가 보여주는 저것을 비교했다.
“그들은 검기라는 것이 이것과는 다르게 정기신을 일체화시켜 도달하는 하나의 경지라고 이야기한다.”
아니다.
저 검이 품고 있는 기운은 사부의 그 일검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부가 보여줬던 그 선명한 일검을 저 검이 막아내는 광경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 어떻게 보면 그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쭈뻣 솟구쳤다.
태사조가 손에 쥔 검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진기는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본래는 하늘을 날 수 없는 사람이 하늘을 날았던 것처럼, 본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는 기운이 현실에 그 형태를 드러냈다.
검강(劍罡)
그것은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합리의 극치였다.
“결국, 궁극에 다다른 무는 이런 것이다. 그 과정의 차이야 무에 상관이 있겠느냐.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이 궁극에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겠지. 술을 단련하는 것 역시 하나의 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해보거라. 우리 도가에서 양신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더냐. 인간의 육체는 결국, 늙고 쇠하기 마련이다. 사람의 삶은 너무나도 짧고 이치는 먼 곳에 있으니 술이란 그렇듯 덧없다.”
사부가 나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 움켜쥔 축축한 손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인간이, 아니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만들어낸 폭력의 극치를 목격했기 때문일까?
아닌 것 같았다. 직접 말로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사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저 말에 설득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와 맞잡은 손에 꾹 힘을 더했다.
“정진하거라.”
태사조님이 나를. 아니, 우리를 바라봤다.
“내가 너희들만 하던 시절에 백운 사조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10년, 20년, 30년. 그렇게 쌓아 올린 공은 결코 너희를 배신하지 않는다. 절대 지치지 말고 소의 걸음으로 만리를 걸어라. 때론 험한 길에 제자리를 걷는 것 같겠지만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산의 정상에 올라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을 끝낸 태사조님이 가볍게 검을 던졌다.
마치 허공에서 누군가 손으로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릿한 속도로 날아든 검이 장굉의 앞에 도착했다.
능공허도와 검강에 이은 이기어검(以氣馭劍).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옴 직한 수법의 연속이다.
태사조님이 몸을 돌려 자하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조님들 역시 그 뒤를 따라 자하각으로 들어가셨다.
“와, 방금 그거 봤어?”
“검강이라니······.”
“아니, 처음에 난 새가 날아오는 줄 알았잖아.”
사조님들이 사라진 직후.
삼대 제자 녀석들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 했던 무공의 경지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흥분이 안되는 것이 이상하다.
사실 그렇게 흥분한 것은 이대 제자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호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방금 저것은 말 그대로 천외천의 경지다. 대체 어디서 저런 것을 구경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부의 감상은 그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사부가 씹듯이 말했다.
“저건 검강도 이기어검도 아니다.”
“검강도 이기어검도 아니라고요?”
“검에 강기를 둘렀고, 검을 허공섭물로 움직였지. 물론 대단한 무공이다. 하지만 저런 것이 검강이며 이기어검이라니.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검강은······, 검강은 절대 저것과 같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에서 직접 ‘진짜 검강’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씀. 하지만 지금 내 귀에는 사부의 그런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왜?’
태사부가 몸을 돌리기 직전의 그 마지막 순간, 모두가 태사부가 보이는 이기어검의 수법에 감탄을 할 때.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나의 귓속을 파고든 목소리가 있었다
자정. 할 말이 있으니 백매각으로 나오거라.
그 주인공은 바로 직전까지 연단 위에서 무공을 보여주셨던 태사조님. 권신 청무진인이었다.
* * *
“아직도 성취가 없구나.”
“부끄럽습니다. 제자가 불민하여······.”
청무진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말아라. 나는 청허가 아니다. 그 헛똑똑이 녀석이야 자신의 실수에 짓눌릴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성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수련을 게을리했구나. 아니, 장문인으로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인가?”
“죄송합니다.”
“화산의 장문인이라면 더 노력해라. 나의 마지막 이야기는 다른 아이들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의 걸음으로 만 리를 걸어라. 비록 지금 험지에 빠져 제 자리를 걷는 것 같겠지만 언젠가 주위를 둘러보면 산 위에 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장문인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