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화산비사(1)
영목이 있는 왕순산은 서안부에서 화산까지 가는 길에서 슬쩍 벗어나 있다.
나의 최초 계획은 서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몰래 왕순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마인의 등장 덕분에 완벽하게 꼬여버렸다.
이제 잠시 볼 일이 있다는 말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잠깐 혼자 일을 하게 뒀더니 마인을 만났다며 이제는 숫제 뒷간까지 따라 올 기세였으니까.
도저히 혼자 몰래 다녀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다음을 기약해야 할까?
하지만 발상을 조금 바꿔보니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렸다.
“그러니까 정말 그곳에 영목이 있다고?”
“네.”
그래, 영목을 채취하는데 굳이 혼자 몰래 다녀올 필요는 없었다.
물론 사부가 영목에 욕심을 낼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긴 했다. 하지만 왕순산에 있는 영목은 낭강목(躴躿木)이라는 것으로 위석단(偉碩丹)이라는 특이한 영약의 주재료다. 사부가 욕심낼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금품에 욕심을 내는 성격이라면 욕심을 부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사부가 원하는 것은 오직 검술뿐이다. 그리고 사부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검술이 꾸준히 발전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사부는 믿을만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사부님. 그거야 밑져야 본전아니겠습니까. 뭐, 하루 정도 돌아가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저희 일정은 훨씬 길었으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혹시라도 함정이라면······. 애당초 마인이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한 일 아니더냐.”
“헌데 그 상황이 굳이 저에게 함정을 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미친 마인이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그 마인 수다도 심했고요.”
“하긴, 그 마인. 쓸데없는 잔소리가 많긴 했지.”
과감하게 마인의 핑계를 댔다. 애당초 서안부까지 마인이 침투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노린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마인이 인근에 영약이 있다는 정보를 알았고, 그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동안 서안에 숨어있다는 이야기는 제법 그럴싸했다.
물론 마인이 진짜 침투한 이유는 뭔가 다른 것이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미 죽어버린 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왕순산은 화산만큼 높고 험한 산은 아니었지만, 그 넓이가 제법 넓었다. 하지만 태사부님의 설명이 워낙 자세했기에 그 장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범위가 생각보다 너무 넓다는 점이었다. 증무 태사조님은 수백 그루의 나무 사이에 그 영목이 존재했다고 했다. 하지만 백칠십 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간극은 거대했다.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있던 그곳이 이제는 족히 수령이 몇백 년은 돼 보이는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한 거대한 숲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낭강목이라는 것이 이곳에 있다는 말이지? 낭강목이라······. 나도 제법 견문이 넓은 편인데 세상에 그런 나무가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보통 영약이라고 하면 내공에 관련된 것들만을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하긴······. 이런 약에 신경을 쓴 것도 그자가 익힌 것이 불사 계통의 마공이기 때문이었겠지. 그러면 일단 좀 찾아보자꾸나.”
수만 그루의 나무들로 울창한 숲.
오히려 사부와 함께 온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이거 최초 계획대로 몰래 왕순산을 찾아왔더라도 절대 시간 내로 영목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아니 사부와 함께 왔다고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체 이 넓은 곳을 언제 다 둘러본단 말인가.
“영목의 특징이 수령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부실한 키. 그리고 잎은 얇고 길며 황녹색을 띈다고 했지?”
“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톡톡톡
사부가 가볍게 옆에 선 나무를 밟아 높은 곳으로 몸을 띄웠다. 고작 세 걸음에 10장 높이의 나무 꼭대기를 밟고 그 위로 석 장쯤 몸을 띄우다니 실로 대단한 경공이었다. 마인을 처단할 때부터 느꼈지만 사부님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고수였다.
“저쪽이다.”
그렇게 몇 차례 허공에 몸을 띄워 주변을 살피던 사부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앙상했다.
태사조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이 나무는 170년 전 태사조님이 처음 발견했을 때도 수령이 족히 50년은 넘은 나무였다. 그렇다면 최소 220년은 된 나무라는 뜻인데 그 크기가 고작 내 머리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주변 나무들이 10장이 훌쩍 넘는 것을 고려하면 그 왜소함은 한층 도드라진다.
“기이하긴 하구나.”
흡사 병충해를 맞은 나무와도 같은 형상. 낭강목에서 약으로 사용되는 부분은 뿌리다. 사부와 내가 조심스럽게 나무를 파 내려갔다.
“응? 이건?”
재밌게도 낭강목의 앙상한 외형과 달리 뿌리는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그렇게 잘라낸 낭강목의 뿌리가 무언가를 감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석판?
사부가 뿌리 사이에서 작은 석판을 뽑아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자 석판에 붙어있던 흙먼지가 단번에 사라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한다. 뭐, 배는 조금 아프다만 영물이란 본래 다 하늘이 정해준 주인이 있는 법이니까. 이왕이면 화산의 제자라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도 이 뿌리를 들고 화산으로 찾아가라. 홍매당에 약을 제련하는 방법을 전수해두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무 뿌리를 씹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효과가 좋을 거다. 고금제일인 천중일검 목운평
“천중일검 목운평? 자 ,잠깐만. 맙소사!! 증무 태사조님!!”
사부가 그대로 석판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놀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태사조님 이런 게 있으면 있다고 미리 말씀을 좀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
화산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사부는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증무 태사조님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놀랍구나. 놀라워. 이건 하늘의 뜻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구나.”
뭐, 엄밀히 말하자면 그걸 묻어둔 본인에게 직접 정보를 들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쨋거나 내가 이렇게 꿈 속에서 증무 태사조님을 만나는 것도 어떻게 보자면 하늘의 뜻일 수도 있겠지.
“현재 화산에서 백운 태사조님의 이야기가 워낙 대단하게 전해지는 탓에 증무 태사조님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지만, 증무 태사조 님이야말로 화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라고 볼 수 있다.”
“수업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시 천하 십대 고수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고수셨다고요.”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다. 그분이 처음 황산의 마존을 참하고 천하 십대 고수로 꼽힌 것이 불과 마흔의 나이였다. 지금 이 사부보다 젊은 나이에 천하 십대 고수로 꼽히셨다는 뜻이다.”
이미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또 이렇게 사부의 예를 들어주니 느낌이 달랐다.
사십 대에 천하 십대 고수라.
당장 사부가 인급의 마인을 척살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나도는 상황이다. 헌데 사부보다 젊은 나이에 마존을 참했다고?
이 정도 되면 잘난 척이 잘난 척이 아니라 그냥 잘난 것이라고 봐야 하는 수준이다.
“물론 백운 태사조님도 대단한 분이시지. 수천 년 무림사 속에서 일체의 이견 없이 천하제일인으로 꼽힌 분이 몇이나 되겠느냐. 하지만 시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나는 증무 태사조님이야 말로 화산 역사상 가장 대단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부님이 말을 이어갔다.
“증무 태사조님 당시에는 천하의 그 어떤 검문도 화산이 제일임을 부정하지 못했다. 헌데 그런 화산의 지금 모습을 좀 보아라. 아마도 이건 증무 태사조님께서 미래를 예견하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구나. 하긴, 전해지는 말에 의하자면 증무 태사조님께서는 마교 교주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결국 깨달음을 얻어 등선하셨다고 하니, 그 전에 미리 천기를 읽고 미래를 내다보셨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겠구나.”
“하하, 그렇죠. 천기.”
“검종의 미래를 위하여 이런 안배를 해두시다니.”
사부님이 광목천으로 둘둘 말아둔 석판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았다. 어쩌면 사부는 영약인 낭강목의 뿌리보다 저 석판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통상적으로 이렇게 강호행 중에 얻은 영약은 사문에 보고하고 제출한 이후, 사문의 공과격을 따져 일정부분을 분배받게 된다. 물론 이것은 사문의 정보 같은 것 없이 순수하게 운으로 얻은 영약이니 전적으로 너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연단을 위해 필요한 부수 재료들과 연단사의 공로를 제한다면 온전히 너의 몫으로 떨어지겠지.”
“그렇습니까?”
일부 문파의 경우 제자들을 갈취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수준의 일이 빈번히 일어나지만,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 화산의 규칙은 매우 합리적이다.
“물론 본래라면 문파의 효율을 운운하며 위석단이 아닌 다른 영약으로 대체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석판을 생각하면 그런 일도 없겠구나.”
“태사조님이 직접 남기신 유훈이시니까요.”
“그래, 태사조님께서 직접 이렇게 직접 영물이란 하늘이 정해준 주인이 있다고 하셨으니 감히 그것을 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본래라면 제법 복잡하게 얽혔을 문제가 고작 작은 석판 하나에 너무 쉽게 해결됐다. 확실히 전통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에서 면에서 사람을 숨 막히게 했지만 이렇게 나의 편이 됐을 때는 너무나도 편했다.
화산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백오십 리.
그곳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허, 현종 그 아이가 결국······.”
“그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애당초 인급의 마인을 만났는데 실력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기는요.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겠죠.”
사제들의 이야기에 권신 청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깊은 아이다. 그렇게 경솔했을 리가.”
“사형, 그러기에 제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청우, 그건 어차피 내가 자하 신공 십단공을 완성하면 다 해결될 문제였다. 사제는 내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거야······. 시기의 문제 아닙니까. 벌써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청허자가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었다.
“사형들 지금 그런 것을 떠들어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제가 잠시 내려가면 어떻겠습니까?”
사제의 이야기에 청공과 청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아니, 뒷방에 물러났으면 아이들을 믿어야지. 내 안 그래도 네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는 것이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아이들 일에 끼어들겠다고? 돌아가신 사숙님도 네가 이런 걸 알았다면 당장에 회초리를 드셨을게다.”
청허자가 고개를 저었다.
“사문의 일에 상관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흔들리는 것은 경지에 다다른 고수가 어떤지를 자기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저희가 의심하지 않고 부단하게 수련할 수 있던 까닭이 뭐였습니까. 백운 사조님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 아닙니까. 실제로 백운 사조님께서도 장문인에서 물러나신 이후에도 문파의 살림이 아닌, 무공에 대한 강론이나 시연은 가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문파 살림을 맡을 때는 사부님들께서 아무런 상관을······”
“그야 우리 때는 청무 사형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굉자배 아이들은 아쉽게도 그런 부분에서 조금 부족하지 않습니까.”
청허의 이야기에 할 말을 잃은 청우가 청무 진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끄응······. 청무 사형. 거, 그렇게 듣고만 계시지 말고 뭐라고 한마디 좀 따끔하게 해주세요.”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청무가 입을 열었다.
“사제가 내려가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다.”
“크, 역시. 청무 사형이야. 사람이 논리가 있다니까.”
“그러니 그런 이유라면 내가 내려가야겠지.”
“네?”
화산파 최고 고수 권신 청무 진인.
그가 무려 팔 년 만에 운대봉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