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서안행(6)
“잘했다. 용케도 버텨냈구나.”
“사부님······.”
공야찬이 마인의 몸을 관통한 자신의 검을 잡아당겼다.
검날이 내장을 헤집는다.
‘이건?’
공야찬이 마인의 살을 헤집는 검에서 기이한 흡력을 느꼈다.
이미 한 차례 경험해본 느낌이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네 녀석, 불사 계통의 마공을 익힌 놈이로구나.”
“저 녀석의 사부라고? 큭큭큭, 내가 오늘 참으로 운이 좋구나. 사제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니 말이다.”
마공 특유의 공포와 광기가 공야찬의 정신을 자극했다.
그 더러운 느낌에 공야찬이 웃었다.
“고작 이딴 거짓된 감정 따위!!”
진정한 절망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공야찬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절망들은 고작 이런 거짓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오히려 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저쪽이다.
공야찬의 시선이 백운호를 스쳤다.
저 녀석이야말로 오랜 절망 끝에 찾아낸 희망이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이런 하찮은 녀석에게 당할뻔했다.
이곳은 종남의 안방인 서안부이며, 그들은 대 화산의 문도다.
기껏해야 동네 흑도들에게 엄포나 놓으면 끝날 줄 알았던 임무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공야찬이 검을 들어 가볍게 털어냈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지방과 핏물이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공야찬이 차게 웃었다.
“제자야. 잘 봐둬라. 이게 진짜다.”
검기.
돼지 살찌우듯, 꾸역꾸역 내공의 크기만 키운 자들이 그저 밀려 나오는 내공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것은 결코 검기가 아니다.
완벽하게 정련된 정신.
극도로 단련된 기술.
그리고 그 위에 길을 따라 움직이는 내공이 더해졌다.
그것은 분명 백운호가 펼쳤던 납매검이었고, 몽원경에서 증무진인이 펼쳤던 납매검이었으며, 동시에 처음 화산파에 입문한 이들이 수도 없이 펼쳐내는 바로 그 납매검과도 같았다.
하지만 형과 식이 같았음에도 그 속에 담긴 의지가 달랐다.
그렇기에 그것은 백운호가 펼쳐내는 납매검과도 달랐고, 증무진인이 보여준 그것과도 달랐으며 화산파의 그 어떤 제자가 펼쳐내는 납매검과도 달랐다.
거칠고 급하지만 여리고 세심했다. 그리하여 그 검은 오롯하게 공야찬이됐다.
일 검이 마인의 몸을 갈랐다.
* * *
공야찬이라는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사부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검종에 보이는 그 기이한 열망과 집착. 그리고 내가 펼치는 매농검을 바라볼 때의 그 욕망에 가득찬 눈동자.
사부가 바라는 것은 나라는 제자가 아닌 나의 검술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 공야찬이라는 사람을 무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사부는 나보다 고수다.
하지만 오직 검술이라는 부분에 한정 지었을 때, 나는 나의 검술이 사부보다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모든 공격과 방어는 질문과 답변이었다. 몽원경 속 증무 태사조님과의 공방 역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압도적인 속도와 힘으로 내가 내밀 수 있는 대답을 극도로 제한한다 뿐이지 조금 전 마인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지금까지 모든 공방의 질답은 그저 얼마나 정교하고 어려운 문제인가, 혹은, 그 문제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최종적인 답을 끌어내는가의 범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부님이 보여준 저 일 검은 달랐다.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래, 그것은 본래 그곳에 있어야 하기에 있는 검이었다.
그리하여 사부님의 검이 세상을 할퀴었다.
마인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그토록 압도적인 기세를 뽐내던 녀석의 최후치고는 너무 싱겁다. 분명 증무 태사조님은 저 마인을 인급의 마인이라고 하셨다. 인급의 마인이라면 분명 절정급으로 대문파의 장로에 준한다. 하지만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검도일성이라고 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오직 검으로 충분하다.
사부님이 자신의 검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 분명 이 순간 사부의 검은 도(道)에 닿아 있었다.
* * *
“검기다.”
“네? 하지만 그건 다른 사숙님들이 보여주셨던 것과는 너무 다르던데요? 물론 검의 예기가 검신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미친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걸 같은 검기라고 하기에는······”
증무 태사조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배배 꼬인 녀석의 말이 옳다. 그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빠르구나.”
“아, 맞다. 아까 그건 대체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꿈이 아니라 현실에 그런 식으로 개입하실 수도 있던 겁니까?”
“몽원경이 가진 본래의 공능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마인들을 만나면 제가 받았던 그 어마어마한 내공을 또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가능은 하겠지만, 효율이 너무 좋지 않다. 지금만 하더라도 공과격의 계산에 따르자면 훨씬 많은 것이 허락돼야 하거늘, 고작 그 정도의 내공에 이만한 제약이라니······”
“공과격이라면, 권선서의 그 공과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내공이 고작 그 정도라고요?”
증무 태사조가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아니, 그것도 양으로 치자면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줌? 명심해라.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닌 질이다. 물론 한계에 도달한 양은 결국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질적인 상승을 노리는 것이 더 유리하다.”
“질적 상승이라면?”
증무 태사조가 고개를 저었다.
“고작 여기까지로구나. 검을 들어라. 아쉽게도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 * *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인의 등장.
덕분에 사부님이 원했던 무력의 과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크게 달성됐다. 물론 원했던 방향과는 조금 달랐지만.
“서안에 나타난 대마두를 화산파의 도사님이 처단했다는구만.”
“종남파가 아니라?”
“에이, 종남이 같은 구파로 묶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화산보다는 급이 많이 떨어지지. 화산파라면 섬서, 아니 천하제일의 대문파 아닌가.”
똥개도 자기 집이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비록 화산의 성세가 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천하 최강을 다투는 문파임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섬서 사람들에게만큼은 화산은 천하제일의 대문파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화산의 도사가 마인을 처단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서안에 불사 계통의 마공을 익힌 인급 마인이 나타났었다고? 피해는? 종남에서 누가 나선 거지? 신광? 신무? 아예 형자배 고수가 나섰나?”
“그······,그게. 화산에서 처리했답니다.”
“화산? 화산이면 엉덩이 무거운 청자배 노괴들이 나섰을리는 만무하고 외당주 굉명? 아니면 설매각주 굉원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설마 현무? 물론 들리는 소문대로라면 실력 자체는 충분하긴 하다만, 화산의 특성을 생각할 때 그만한 고수를 벌써 외부의 위험에 드러낼 리는 만무할 텐데?”
“그게, 그러니까. 현자배는 현자배인데······. 현종자랍니다.”
“현종? 잠깐만, 현종이면 설마 그 굉무진인의 제자인 현종?”
강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자배에서 그만한 고수가 배출됐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한 신진 고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화산이다. 충분히 그런 고수가 갑작스럽게 등장할 수도 있다.
그들이 더 크게 놀란 부분은 그런 고수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화산이 젊은 고수를 그런 위험한 장소에 내보냈다는 부분이었다.
“근데 걔들 잔살비마 사건 이후로 이대 제자는 밖으로 쉽게 안 돌리잖아. 심지어 그때는 청자배가 은퇴 직전이라서 사실상 이대 제자라기보다는 일대 제자라고 봐야 하는 상황이었고. 지금 인자배는 이제 막 제자를 받기 시작하는 상황인데? 근데 인급 마인을 현자 배가 처리했다고?”
“그게, 이번에 태을문에서 주양문 밀어내고 다시 관중문이랑 서안을 양분하려고 했답니다. 종남도 은근히 그걸 원했고요. 화산에서는 그래도 문파 명문은 좀 이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이대 제자 하나랑 삼대 제자 하나를 파견했는데 그게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그냥 대충 얼굴 도장 찍으라고 내보낸 화산의 제자가 인급 마인을 잡았다고? 그것도 종남의 안방에서?”
“네.”
“재밌네.”
사내가 한번 피식 웃고는 그대로 자신의 책상을 내려쳤다.
“동생아, 동생아. 네 머리 위에 그건 장식이냐? 우리 제발 상식적으로 좀 생각이라는 걸 하자. 무려 종남파 안방까지 진출했던 인급의 마인 놈을 하필 화산 제자가, 응? 그것도 이대 제자가 우연히 잡았다고? 심지어 종남이 서안에서 화산을 밀어내려고 하는 지금 이 시기에?”
“하······, 하지만.”
“동생아.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미리 알고 묵혀뒀던 정보를 적절한 순간에 터트린 거지. 어? 종남이 슬슬 기 좀 펴볼까? 하는 순간에 화산의 이대 제자가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이다!!’ 하고 뻥!! 그리고 여기서 이미 이름이 알려진 현무자가 아닌 다른 제자니까 그 효과는 더 크겠고.”
“형님, 근데 그러려면 서안에 마인이 잠입했다는 사실을 화산이 미리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종남에서도 알지 못했던 그런 사실인데······. 게다가 인급의 마인이라면 절정의 고수라도 승리를 확신하기 힘든 괴물인데 현자 배의 고수라면 너무 위험한 도박 아닐까요?
“하아, 그야 청자 배의 노괴들이 개입했겠지. 그 괴물들이라면 인급 마인이고 뭐고 한, 삼백 리 밖에서 기척을 느꼈다고 해도 난 믿을 수 있어. 게다가, 정 안될 것 같으면 그 양반들이 나서면 끝 아니겠냐. 인급의 마인 따위 백 단위로 덤벼도 씹어먹을 괴물들이잖아.”
“삼백 리요?”
“너도 그 괴물들 직접 보면 내 말이 이해가 될 거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것들이 사람이냐?”
사내, 칠대 세가의 지낭 제갈첨이 확신했다.
“내가 봤을 때 이건 화산이 잔살비마의 혈사로 얻은 피해를 떨쳤고, 이제 다시 무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확실한 신호다.”
* * *
서안에서 전해진 소식에 가장 놀란 곳은 어디였을까?
이제 뭔가 좀 해보겠다고 움직이던 종남? 슬슬 화산을 넘어 다시 천하제일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는 소림? 혹은 무당?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저 마교?
아니었다.
그 소식에 가장 놀란 곳은 다름 아닌 화산파였다.
“사형 그 소식 들었어요? 현종 사형이 인급 마두를 제거했다는거요?”
“뭐라고? 찬이가? 그 녀석 무공 십 년 가깝게 답보상태 아니었어? 굉무 사숙이 말년에 이상한 시도를 하던 거 걔가 물려받았었잖아.”
“그게 효과가 있었나 봐요. 생각해보면 백운호가 준형이 이긴 것도 결국 그거잖아요.”
“그거야 그 시기에는 아직 내공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니까. 초식에서 압도하면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면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요. 덕분에 저도 요즘 제자 놈이 묻는 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깜깜하다니까요. 우리 때는 분명 ‘십 년이야 술을 연마한 사람이 더 강할 것이고, 이십 년을 연마한다면 비등할 것이며, 삼십 년이 흐른다면 결국 공을 쌓은 이를 따를 수 없다.’라고 배웠잖습니까.”
“당연하지. 결국 ‘도(道)’에 닿을 수 있는 건 부단한 공부뿐이야.”
“근데, 그렇다면 현종 사형은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죠?”
“그러게······. 오늘 사부님께 한 번 여쭤보자.”
이제 막 상승의 경지를 접하기 시작한 이대 제자들이 흔들렸다.
굉허자가 탄식했다.
“전호후랑(前虎後狼)이라. 늑대를 피하려 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는구나. 사부님의 말씀이 옳았다. 애초에 일을 그리하면 안 되는 것을······.”
화산파에 폭풍이 몰아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