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4화 (24/288)

24화

서안행(2)

현 강호의 주도 세력은 누가 뭐래도 구파다.

당연한 일이다. 구파는 하나하나가 백 단위의 고수를 보유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할만한 문파들이다. 그런데 무려 그런 문파 아홉개가 합을 맞췄다.

물론 구파 내부에도 알력은 존재하고, 그들이 언제나 화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삼백 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서안부, 관중문.

“자네들은 이번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나는 이제는 화산보다는 종남이라고 생각하네.”

“에이, 아무리 서안부가 종남에 가깝다고 해도 어떻게 종남이 화산에 비할까. 아직 권신과 그 사제들이 그렇게 정정한데 말이야.”

“그래, 물론 지금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어찌 지금만 생각하겠는가. 본래 이런 관계는 십 년을 생각해야하는 법일세.”

“십 년 후?”

“그래, 십 년 후. 자네 지금 당장 굉자배 가운데 생각나는 고수가 하나라도 있는가? 난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래도 현 장문인인 굉허진인만 보더라도 팔 년 전 잔살비마를 추살한 것으로 이름이 높지 않은가.”

“잔살비마라······. 그래, 바로 그 잔살비마의 추살이 문제였지. 그 추살 과정에서 화산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굉자배 최고의 후지기수로 꼽히던 굉무도 죽었고, 결정적 공을 세웠던 굉허 진인도 큰 상처를 얻어 무공이 크게 퇴보했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나. 나는 사실상 거기서 화산의 굉자배는 끝이 난 거라고 본다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확실히 굉자배 가운데 천하에 이름을 떨칠만한 고수가 없어 보이긴 하는군. 하지만 그래도 현자배에 현무 도사라면 장차 천무십칠성 자리를 노리는 고수 아닌가.”

“바로 그것도 문제라네. 이제 막 마흔이 넘은 문파 제일의 후기지수가 노리는 것이 고작 천무십칠성이라니. 물론, 어지간한 대형 문파라면 그건 나쁜 일이 아니지. 하지만 구대문파는 어지간한 대형 문파가 아닐세. 하물며 그 가운데서도 화산이라면? 그들이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응당 천하제일을 노리는 고수 정도는 배출돼야지.”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더군다나 서안부는 종남과 지척이 아닌가. 내가 볼 때 앞으로 십 년이면 화산이 서안에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다 없어진다고 봐도 무방할걸세.”

“그래서 십 년, 십 년이란 말이로군.”

* * *

이른 아침.

습관처럼 뜨는 해에 맞춰 자소공을 수련했다. 사부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 사숙들이 강조했던 것 가운데는 아무리 경지가 높아진다고 해도 아침 자소공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실제로 이번에 본산에 제자로 들어간 녀석들의 면면을 살펴 봤을 때, 부상 등의 특별한 이유 없이 자소공 수련에 한 번이라도 빠진 녀석은 단 하나도 본산 제자로 입산하지 못했다. 이는 그분들의 말씀이 절대 빈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후읍

자소공의 구결에 맞춰 몸을 풀었다.

몸 중심에 단단히 자리 잡은 포원공의 진기와는 별개로 호흡을 통해 들어온 맑은 기운이 몸의 곳곳을 씻어내린다. 하지만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기운의 크기와 움직임이 미약하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질문에 사부가 답했다.

“화산은 중원의 오악으로 꼽히는 영산이다. 화산여립이라 했다. 특히 그 기운의 강성함으로만 따진다면 첫손에 꼽을만하다. 그런 화산을 벗어나는 만큼 자소공의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화산이 멀어지는 만큼 종남산이 가까워지는 것 아닙니까. 그곳도 우리 화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영험한 명산 아닌가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심법에 해당하는 이유로 우리가 향하는 곳이 정확히는 종남이 아닌 서안부라는 점이다.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내뿜는 탁기가 승하다는 뜻이니 심법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아, 그러고 보니 가끔 그런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었다.

대체 왜 화산에서는 소수의 제자만을 뽑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물론 수백의 문도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화산이라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모을 여력이 있다. 또한, 숫자는 결국 힘으로 이어진다. 굳이 제자의 숫자를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라면 이해가 된다.

사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종남산은 화산이 아니라는 점이다.”

“네?”

“자소공을 비롯한 화산파의 몇몇 기공들은 화산의 성질에 딱 맞게 만들어진 무공들이다. 영험한 산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태산여좌(泰山如坐), 화산여립(華山如立), 숭산여와(嵩山如臥), 형산여비(衡山如飛), 항산여행(恒山如行)이라고 했다. 오악 사이에도 이렇게 특성이 다르고, 그렇기에 나고 자라는 물산이 다르며, 그 기운이 다르다. 우리 화산파의 무공은 화산에 가장 어울리게 발전해왔다. 화산에서 가장 좋은 효율을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

문득 사부의 말에서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군요. 헌데 사부님,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포원공은 그런 제약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그런 제약이 존재하는데 저의 성취가 아직 미약하여 그런 제약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그건 둘 다라고 볼 수 있다.”

“둘 다요?”

“그래, 애당초 포원공은 화산의 무공답지 않게 안정을 중요시하는 무공으로 보인다. 몇몇 사조님들은 이것은 차라리 화산보다는 태산이나 숭산에 어울리는 무공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지.”

확실히 그랬다.

자소공만 하더라도 기운이 들어와 몸 곳곳을 호쾌하게 순환하며 전신을 씻어내린다. 하지만 포원공은 그보다 훨씬 둥글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기초를 다지는 일단공과 이단공의 경지까지다. 이론만이 존재할 뿐, 아직 아무도 다다른 적이 없는 상상의 경지인 오단공은 제쳐두더라도 당장 삼단공에만 들어서도 이것이 화산에 어울리는 공부라는 것은 명확해진다.”

“삼단공이라니, 조금 까마득하네요.”

“그거야 부단한 수련밖에는 답이 없지. 어쨌거나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이번 출산에 너를 동행시키는 것도 네가 익힌 공부가 포원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포원공이라고 해도 번잡한 도시로 나가는 만큼 그 성취가 줄어들겠지.”

사부가 나를 강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검술의 완성이다. 내공은 그저 그 검술을 풀어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그러니 지금 너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세밀한 검술지도다.”

그렇게 말을 끝낸 사부가 나의 검술을 봐주겠다며 매농검을 펼쳐보라고 했다.

“잠깐, 거기서 대체 왜 그런 움직임을 보인 거지? 분명 이전에는 조금 달랐는데?”

“그게 그러니까 사부님께서 얼마 전에 검병의 다섯 가지 파지법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강론해주신 것에서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초식과 팔초식을 연계할 경우 루파(螻把)에서 만파(滿把)로 전환이 필요한데 이 경우 검병을 반 바퀴 회전하여 움직이는 쪽이 더 빠른······.”

나의 설명에 사부님이 헛기침을 하며 이제 됐다는 손짓을 보냈다.

“크흠, 그래. 내가 그것을 굳이 강론한 이유를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로구나. 애당초 초식의 연계에 있어서 파지법의 전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화산검의 검병이 그런 형태를 띄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명심하거라. 세상에 본래 그런 것은 없다. 무언가가 그런 모양을 띄고 있다면 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각에 가까운 검무.

사부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하루 더 나아지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지만 검술에 완성이란 지난한 법이니, 자만하지 말고 더 정진하도록 하거라.”

“사부님, 그렇다면 납매검은 펼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크흠, 물론 그것 역시 매일매일 수련해야 하지만, 지금은 본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문의 명으로 서안에 일을 해결하러 가는 길 아니냐. 그러니 온종일 수련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서 짐을 챙기도록 해라.”

* * *

서안부 주양문은 백 년 전, 백운 진인이 화산의 사승 체계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잡았던 바로 그 시기에 속가 제자였던 주양검객 조유라는 사람이 세운 문파다.

당시 서안부를 양분하고 있던 것은 종남의 속가 가운데 그 성세가 가장 컸던 태을문, 그리고 서안의 향족들이 주축이 된 관중문이었다. 본래라면 문파를 세우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양검객 조유 본인부터가 서안에서 오백 년을 내려온 향족의 후손이었고, 당시 화산의 성세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리하여 주양문은 불과 십 년도 되지 않는 기간 만에 서안을 삼분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한참 잘 나갈 때는 화산의 속가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만한 성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곳이 주양문이로군요.”

건물 자체는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모르게 영락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법 꼼꼼하게 청소하여 먼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칠 자체가 바래간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먼저 전해진 것일까? 대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흰 머리가 성성한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어이고!! 어서오게나!! 안 그래도 오늘쯤 도착하시지 않을까 하여 아이들을 성문 밖으로 미리 내보냈는데. 이 녀석들이 또 엉뚱한 길로 샌 모양이야. 내 아주 이 녀석들을 그냥!! 헌데, 혹시 더 오는 사람들은 없는 건가? 아니, 별다른 뜻은 아니고.”

그가 너무나도 명백하게 별다른 뜻이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사부가 그 노인의 그 별다른 뜻을 단번에 잘라냈다.

“화산 이대 제자 현종이라고 합니다.”

“아차차, 내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나를 소개하는 것도 잊었구만. 나는 이곳 주양문의 문주인 조익이네. 강호의 동도들에게는 자전검이라고 불리고 있지. 그나저나 내가 예전에 산에 있을 때 종회, 그러니까 굉명과 아주 친해서 말이야. 오래간만에 얼굴이나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혹시 더 오는 사람은 없는 건가?”

하지만 여전히 질척거린다. 그 노골적인 질척거림에도 불구하고 사부가 웃는 낯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아, 굉명 사숙님과 친하셨군요. 사숙님은 지금 외당 당주 일로 너무 바쁘셔서 자리를 비우기 힘드실 겁니다. 제가 나중에 복귀를 하게 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크흠, 그런가?”

“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것은 저와 제 제자뿐입니다.”

“그렇군. 둘 뿐이라······. 하긴, 뭐 그러면 어떻겠는가. 무려 대 화산파의 본산 제자인데. 서안에서나 행패 부리는 무지렁이 놈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겠지. 아니 그런가? 하하하하하.”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표시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사부가 거듭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최근에는 통 보기 힘들었던, 과거 강론에서 이준형, 강아현 등에게나 보여주던 표정이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어쩐지 시작부터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