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검종지보(9)
“쟤가 설마 걔인가? 그 육 개월 전에 봉가 놈 손녀랑 싸웠던 걔.”
“멍청아, 봉가 놈 손녀가 아니라 증손녀잖아. 손녀는 지금 홍매당 당주지.”
“뭐라고? 걔가 벌써 그만큼 컸어?”
새치 하나 보이지 않는 머리. 윤기 나는 피부와 맑고 깨끗한 눈동자. 올해로 팔순이 넘은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두 노인의 유치한 대화에 유일하게 옷을 잘 갖춰 입은 노인 하나가 핀잔을 줬다.
“사형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명색이 화산의 원로 아닙니까. 체통을 지키시지요.”
“체통은 개뿔. 그렇게 체면을 생각하는 놈이 몰래 애들 싸움이나 구경하러 나온 거냐?”
“맞아, 하여간 청허 저 녀석은 젊을 때나 지금이나 호박씨는 제일 잘 까면서 혼자 군자인 척한단 말이지.”
두 노인의 구시렁거림을 못 들은 척 외면하던 청허자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허, 대단하군요.”
“왜? 뭐?”
“저 아이의 공부 말입니다.”
“저 아이? 누구? 얼마 전에 봉가 놈 손녀랑 싸웠던 그놈?”
“아뇨, 그 상대편 말입니다. 듣기로는 현무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벌써 자하기공의 성취가 제법인 것 같습니다.”
청허자의 이야기에 두 노인이 속삭였다.
“청우야, 너 저거 느껴지냐?”
“염병, 내가 그게 느껴지면 지금이라도 당장 출두해서 천마 모가지 따야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겠냐. 저건 청무 사형이 와도 안 되지.”
“그러면 청허 얜 뭐야? 지가 청무 사형보다 세다는 거야?”
“글쎄다. 그냥 있어 보이려고 뻥 치는 거 아닐까?”
“뻥? 감히 하늘 같은 사형들에게 구라를 친다고?”
“청공 사형. 다 들립니다. 그리고 거짓말 아닙니다.”
“그러면 뭐야? 너 진짜 저게 느껴진다고?”
청허자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이십 리나 떨어졌는데 그걸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아직 암동에 계신 청무 사형이라면 또 모를까. 저는 그저 눈가에 자색 기운을 보고 유추했을 뿐입니다.”
“눈가에 자색 기운?”
청공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청우자에게 물었다.
“청우야, 쟤 지금 저거 자랑하는 거 맞지?”
“그야 이십 리밖에 사람 눈동자가 보인다는데 당연히 자랑이지. 어휴, 그래 청허 넌 젊어서 좋겠다. 세월이라는 게 그래요. 참, 야속해. 이래 봬도 나도 왕년에는 십 리 밖에 옥화 속곳에 묻은 얼룩도 구분하고 그랬는데 말이야.”
“멍청아 그건 안력이 아니라 음욕이고. 안력이라면 역시 내가 당가의 만천화우를 상대했던 그게 안력이지. 크, 그땐 정말 죽여줬어.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됐던 일이냐 하면 말이지. 때는 바야흐로······.”
“아, 저기 시작합니다.”
* * *
이준형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틀 전 보여줬던 그 흉폭한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담담하다. 마치 파랑 한 점 없는 호수 같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초전박살.
확률적으로 가장 높다. 아마 녀석이 생각하는 나의 실력은 육 개월 전의 그것, 혹은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한 수준일 것이다. 설마 내가 영약을 먹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차고 있던 검을 움켜쥐었다. 녀석과 나의 거리는 다섯 장.
포원공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 세 걸음. 세 걸음의 커다란 도움닫기가 만들어낸 막대한 역학적 힘을 검극으로 집중하여 펼쳐내겠다.
별것 아닌 공격 같지만, 그게 아니다.
타인의 공격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어렵다. 사실상 격렬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중에는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증무 태사조님이 항상 싸움을 끝낼 때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던 그 ‘완벽한 대답’에 가까운 위력의 공격이다. 물론 증무 태사조님의 그것이 모든 것을 이해한 ‘완벽한 대답’이라면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질문’이다.
촌음의 시간.
성공일까? 적어도 지금까지 반응만 봐서는 성공적이다. 첫 번째 걸음이 끝나고, 두 번째 걸음이 시작되고 나서야 이준형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다.
두 번째 걸음의 와중에 검을 뽑아낸다. 완벽하다.
녀석의 눈이 보랏빛으로 빛났다. 본인도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것일까? 이준형이 자세를 낮췄다.
그의 대응은 신경 쓰지 않는다.
수련동에서 이것을 펼쳐냈을 때는 무려 두 자 두께의 통나무를 박살 냈다.
그리하여 세 걸음.
도약으로 만들어진 힘에 나의 몸이 만들어내는 회전력까지 더했다.
-후읍
이준형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손이 움직였다. 맨손?
대체 무슨 생각이지?
* * *
자하기공.
강호에 신공이라 이름 붙은 무공은 제법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할만한 신공을 꼽는다면 자하 기공은 무조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그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이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든다.
자운장(紫雲掌)
자하기공의 성취가 이단공을 넘어가야지만 입문할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다. 바로 그저께,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 기세에 백운호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때 이미 눈치챘다. 이 녀석 뭔가가 있구나.
녀석은 장광을 이기고, 강아현과 박빙으로 싸우기 직전까지도 자신을 철저하게 숨긴 음흉한 놈이다. 무언가 단단히 준비한 것이 없는 이상에서야 이렇게 싸우자고 나설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준형이다. 장차 화산 제일, 강호 제일을 논할 재능이다. 그저 압도적인 무력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힘 대 힘.
이준형의 자운장이 백운호의 검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치 뒤가 없는 것처럼 찔러오던 백운호의 검이 환상적으로 움직였다.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 서둘러 그 검을 향해 손바닥을 움직였지만 늦었다.
그가 자운장에 입문한 것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자운장 자체가 자하 신공을 가장 효율적으로 뿜어내기 위한 수법에 불과하기에 그 난도 자체가 높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틀은 하나의 무공을 제대로 익히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뻐억!!
왼팔 상박. 백운호의 검이 명중했다.
날을 세우지 않은 무인검임에도 불구하고 한 움큼 살이 패였다. 그 순간 이준형은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 덕분일까? 이준형은 그 고통에 주저앉아 신음하는 대신 배운 그대로 멀쩡한 오른팔을 휘둘렀다.
-퍽
가벼운 타격.
백운호가 네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준형의 명백한 손해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준형과 백운호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그리고 이준형은 팔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보다 그 시선이 더 아팠다. 그는 이준형이었다. 그가 받아야 하는 시선은 오직 기대와 선망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툭툭툭.
왼쪽 어깨의 혈도를 점혈했다. 흘러나오던 피가 빠르게 멎는다. 물론 그리 오래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충분하다. 이를 악문 이준형이 백운호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 * *
이준형이 예상 밖의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나의 공격으로 녀석에게 부딪힐 것인가. 아니면 피해갈 것인가.
물론 나는 나의 검이 보여줄 위력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육 개월 동안 성장할 때 저 녀석은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리고 저 녀석이 검 대신 육장을 선택했다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저 두 개의 손바닥이 검보다 더 강력한 건 아닐까?
전력을 쏟아부은 검의 움직임을 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동범위 이상으로 움직인 근육이, 갑작스럽게 부하가 걸린 손목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해냈다.
녀석의 왼팔 상박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생각보다는 커다란 상처. 하지만 아직이다. 위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리한 공격으로 나의 몸도 조금 상했다. 진기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비명을 내지른 근육들이 강력하게 항의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준형의 오른손이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떻게 보면 정말 가벼운 동작이었다. 제대로 힘도 실을 수 없는 마구잡이다. 하지만 그 일장에 실린 힘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네 걸음 빠르게 뒤로 물러서 경력을 해소했다.
저거였구나.
가벼운 호흡.
포원공의 진기가 전신을 빠르게 순환한다. 신공이라고 불리는 몇몇 기공들처럼 신묘한 위력은 없지만 안정적이다. 날숨 한 번에 몸을 떠돌던 탁기 절반가량이 해소됐다. 잠깐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처음의 잔잔한 기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흉폭함을 내뿜는 이준형이 빠르게 쇄도했다.
이왕이면 처음의 일격으로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크게 이득을 보고 시작하는 셈이다.
나의 검이 움직였다.
-깡!!
녀석의 팔뚝을 두들긴 검에서 마치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손바닥만이 아니다. 최소한 상박까지는 강철과 같이 단단하다.
왼팔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움직임은 단단했다. 막강한 내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나를 압박해온다. 검의 우위를 살려 최대한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대체 못 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녀석의 보법이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해있었다.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움직임 자체가 다르다.
부운약표(浮雲躍飄)
하늘의 구름처럼 천변만화하며 부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공격이 거듭될수록 점점 녀석의 기세가 흉폭해졌다. 일격 일격이 치명적인 공격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대체 내공이 얼마나 되기에 이런 공격이 이렇게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일까?
녀석이 찌르고 치켜올린 손끝에 스친 옷소매가 나풀거렸다. 채 닿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에 실린 경력만으로 그 소매 아래 피부가 벌겋게 일어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녀석의 외침이 그 움직임을 따라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나의 검이 움직였다.
* * *
운대봉 중턱.
“저거, 저거. 자운장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뭐야? 그러면 저 애송이가 벌써 자하신공 이단공이라고?”
“이 정도면 동굴 가서 청무 사형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냐? 쟤 아직 정식으로 본산 제자가 된 것도 아니잖아. 저 정도면 청무 사형보다도 더 빠른 것 같은데? 역대 최고 기록 아니냐?”
두 노인의 호들갑에 청허자가 고개를 저었다.
“굉무가 더 빨랐었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 아이가 자하신공에 입문하고 고작 넉 달 만에 이단공에 올랐던 거?”
“그······, 그랬었지.”
잠깐의 어색한 침묵.
“어? 근데 잠깐만. 저거 뭐냐?”
“와, 저 어린 녀석 저거 대단한데? 저기서 저런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에잉, 저 녀석 자운장이 수박 겉핥기네. 저기서는 3초식인 운중조양을 응용했어야지.”
“글쎄다. 그랬다면 저 어린 녀석이 검을 다르게 놀렸겠지. 근데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사부가 굉무의 제자였던 현종 그 녀석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현종 그 녀석은 여전히 검에 파고들고 있는 거냐?”
“글쎄요. 저도 본산 소식을 다 아는 건 아니라서. 근데 지금 제자라는 녀석이 검을 쓰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쯧쯧쯧. 그 사부에 그 제자라더니. 아주 고집들은 닮아서. 똑같은 허상이나 좇고 있으니. 참으로 아쉽구나. 아쉬워.”
청공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리고 그런 청공자를 향해 청우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쉬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기 전까지 구분도 못 하는 놈들인데 아쉽기는 뭐가 아쉽다는 거야. 아니다.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지. 그건 괜히 남들한테 똥 먹어보라고 권하기까지 하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사형들, 저 녀석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가 봅니다.”
“호, 제법인데? 자운장의 성취는 부족하지만 그런데도 저런 걸 보면 내공의 운용이 상당한 것 같구나. 이거 청무 사형한테 말해주면 못 본 걸 좀 아쉬워하겠는데?”
청공자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한 고수들의 감각조차 완벽하게 속이는 놀라운 무공.
“그런 걸 알고 있다면 이 늙은 사형에게도 좀 와서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청무 사형?”
화산파 제일 고수. 권신 청무 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