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검종지보(8)
신공의 구결에 따라 몸 안의 내공이 순환했다. 자소공을 통해 쌓아 올린 내력이 자하 신공의 진기로 전환된다.
내부를 관조하기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색의 기운이 슬쩍 보였다 사라진다.
‘허, 벌써 2단공에 근접했다고?’
현무자가 그 빠른 성취에 감탄했다. 과연 광양지체다. 현무자 본인도 기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제자의 성취는 석년의 그와 비교해도 족히 2할은 빠르다.
“요즘 화식을 멀리한다고 들었다.”
“아, 그것이, 아무래도 수련을 위해서는 그쪽이 더 좋지 않을까 하여······.”
준형의 대답에 현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장자가 말하기를 노나라에 선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과 동떨어져 신선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칠순의 나이에도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낯을 가졌는데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고 했다. 지금 너의 행동이 이와 같다.”
“······.”
대체 지금 사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준형을 바라보며 현무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아마 그의 사부도 그를 볼 때 이런 기분이셨겠지.
“과거 전진의 대종사이셨던 중양자께서는 곡기를 끊고 호흡과 명상으로 몸의 탁기를 덜어내어 양신을 이뤄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내공의 증진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옳다. 화산 기종의 가르침 역시 과거에는 그러했고.”
“하면 어째서 지금은 꼬박꼬박 화식과 육식을 하는 것입니까?”
“백운 태사조님의 가르침이다.”
“백운 태사조님이요?”
현무자가 자신의 제자에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백운 태사조님 이전, 우리는 육신을 감옥이자 족쇄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양신을 이뤄 떨쳐내야 하는 족쇄 말이다. 하지만 백운 태사조 님의 생각은 달랐다. 육신은 우리가 양신을 이루기까지 걷는 길을 도와주는 지팡이다. 사람이 양신을 이루는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다. 그 먼 길을 걷는 데는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도움을 주는 지팡이가 부실한 것보다는 튼튼한 것이 좋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도인인 동시에 무림인이다. 노나라 사람 선표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었다. 그리고 무림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그런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명심하겠습니다.”
* * *
“이준형.”
“백운호?”
본래의 이준형은 이마에 ‘나 고수다.’라고 쓰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눈에는 정광이 번뜩였고 몸에는 폭발적인 기세가 넘실댔다.
하지만 육 개월 만에 만난 이준형은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더 약해 보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수련동에서 수련하는 동안 저 녀석 역시 현무 사숙 밑에서 수학했다는 것을 말이다.
저것은 그 넘칠 것 같은 기도가 어느 정도 갈무리된 것이라 봐야 했다.
“오래간만이다. 언제 나온 거야?”
“어제.”
“그랬군.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다. 축하해. 현종 사백 문하로 들어갔다며. 부모님께 네 칭찬 많이 해놨는데 역시 좋은 인재는 본산에 남는 법이라며 조금 아쉬워하시더라.”
화산 본산에 남는 걸 아쉬워했다고?
얼핏 듣기에는 그저 인사 같지만, 말하는 사람이 이준형인지라 역시 비꼬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지금까지야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지만, 애당초 오늘은 비무를 신청하기 위해 왔다. 굳이 참을 이유가 없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네. 근데 나보다는 네가 남는 걸 더 아쉬워하시지 않았을까? 가업은 역시 외부인보다는 핏줄이 이어야 하는 법이잖아.”
“지금 언사가 조금 묘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응, 네 착각이야.”
이준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착각이라······, 그래. 알겠다. 친구라고 생각하여 특별히 잘 대해줬더니, 역시 장광 녀석의 말이 옳았군.”
“무슨 말? 비천한 출신은 성품도 비천하다는 그런 말?”
“자격지심이 심하군.”
“에이, 자격지심이라니. 자격지심은 네가 강아현에게 품고 있는 그런 게 자격지심이지.”
녀석이 이를 악물었다. 감춰져 있던 기도가 슬금슬금 드러난다. 위협적이다.
“고작 나와 이렇게 말싸움이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대체 이렇게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지?”
“맞아. 말싸움이나 하러 온 건 아니고. 진짜로 한 번 싸우자고.”
“싸워?”
“어, 내일모레 비무회. 시원하게 비무나 한 번 하자.”
“비무라고? 내가, 너와?”
명백한 비웃음.
그의 시선이 나의 몸을 훑었다.
“미안하지만 난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당연히 부탁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약이고 뭐고 다 취소하고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쉽게 말해서 줄 서서 대기하라는 건가?”
“글쎄, 아쉽게도 정기 비무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 줄을 서서 대기한다고 네게 기회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군.”
“그렇게 강아현이랑 비무가 하고 싶은 거야? 진짜 화산 성골을 이기고 싶어서? 아니면 강아현 관심을 끌고 싶어서?”
“헛소리. 애당초 비무를 신청한 쪽도 강아현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나와 강아현의 결착을 바라고 있어. 그 증거로 아현이를 제외하면 아무도 나에게 비무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그 녀석들이 너나 아현이와 붙을 엄두를 못 내는 거지. 그걸 또 뭐 그렇게 해석하냐. 하여간 세상 참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다니까.”
-으드득
“백.운.호.”“어쨌거나 결론은 아현이 제외하면 딱히 너한테 비무 신청한 녀석은 없다는 거네? 그러면 다 해결됐네.”
“뭐라고?”
“아현이가 너랑 비무 하기 싫다더라. 나보고 대신 하라던데?”
마침내 녀석의 감춰져 있던 기도가 완전하게 드러났다.
눈의 흰자위에 자색의 기운이 엿보인다. 이건 육 개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흉폭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지?”
가볍게 호흡했다.
꾸준히 수련한 포원공의 진기가 나의 몸을 보호했다. 흉폭함으로 가득한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말 그대로야. 지난 삼 년. 너 이준형과 결착을 맺어야 하는 건 아현이가 아닌 나 백운호라는 말이다.”
“백.운.호.”
한참의 눈싸움.
“모레, 비무대에서 보자.”
마지막 무대. 마침내 이준형과 나의 비무가 결정됐다.
* * *
아현이 속삭였다.
“삼촌, 당연히 백 사제가 가볍게 이기겠죠? 그 녀석 그걸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하, 아현아. 그게 무슨 소리니.”
공야찬의 시선이 아현에게 매섭게 내려꽂혔다.
아현이 슬쩍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과는 제법 거리도 있고 그리 조용한 분위기도 아니다.
“아이, 삼촌 아무도 우리한테 신경 안 쓴다고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이 대답을 대신했다.
“알겠습니다. 현종 사백님. 사백님은 이번 비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다. 열심히 가르치기는 했다만 상대가 상대이니······.”
“그래도 백 사제가 단번에 이기지 않을까요?”
바로 며칠 전.
자신을 연거푸 일 합에 제압하던 백운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니, 그거야 네가 너의 약점으로 운호의 장점에 덤벼서 그랬던 거고, 준형이의 자하신공이 얼마나 성취를 이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백운호와 이준형이 비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비무대로부터 20리쯤 떨어진 운대봉 중턱.
“허, 저 녀석 보게?”
“왜? 뭐가? 그냥 평범한데? 뭐 문제 있어?”
“영감탱이가 나이 먹더니 시력이 문제인 거야? 아니면 기억력이 문제인 거야? 저게 어떻게 평범하다는 거야. 쟤 육 개월 전에 어땠는지 기억 안 나?”
“육 개월 전?”
이미 은퇴한 화산의 노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산의 미래를 책임질 삼대 제자들의 마지막 비무회를 관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