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검종지보(6)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군.”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가던 기해혈의 성장이 어느 순간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딘가에 꽉 막힌 것처럼 도무지 늘어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할 때 네가 먹은 영약은 자소단이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는 약효가 많이 부족하구나. 그만큼 단환이 하품이었든지, 아니면 네 체질이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하든지. 혹은 둘 다인 듯하다.”
“사부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강아현은 그 귀한 것을 대체 무슨 이유에서 저에게 준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먹은 약 비슷한 것이라고는 자신과의 비무 직전 강아현이 건네준 단환이 전부였다. 물론
“글쎄다. 내가 그 녀석이 아니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네 녀석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든지, 아니면······.”
“아니면?”
“정말 그게 요상단인 줄 알았을 수도 있지.”
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자소단이 어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닌데요.”
나의 이야기에 사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글쎄다. 강진 그 녀석이라면 책상 아래 어딘가에 굴러떨어진 자소단이 하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라서······.”
강아현은 대체 왜 나에게 자소단을 준 것일까? 설마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걸까?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다, 돌이켜보면 화산에 온 이후에 조금 위축돼서 그렇지 조가촌 저잣거리에서 생활하던 때 나는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내공의 성장이 멈추는 속도가 빠른 것 이상으로 검술의 성취가 빨랐으니 말이다.”
“그런가요?”
사부는 나의 매농검에 크게 만족한 눈치였다.
심지어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고작 넉 달 만에 이런 성취라니······. 과거 검종의 마지막 대종사이셨던 증무 태사조님이 이러했을까?”
솔직히 조금 걱정됐다.
평소 증무 태사조님이 보여주는 드높은 자존심을 고려한다면 사부가 나와 자신을 비교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날 밤 몽원경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배를 움켜쥐고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웃는 태사조의 모습이었다.
그래, 이건 아예 기분 나쁠 거리도 못 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태사조는 그날도 검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쾅!!
* * *
“그래, 그 아이는 좀 어떻더냐.”
“광양지체, 광양지체 하더니 정말이지 놀라운 자질입니다.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자하 신공에 입문할 줄이야······.”
“칠 년 후가 기대되는구나.”
“네, 사부님. 실망하시지 않도록 잘 지도해보겠습니다.”
굉허진인이 크게 웃었다.
“허허허, 실망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난 단 한 번도 너에게 그 비슷한 감정도 느낀 적이 없었다.”
현무자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마지막 공개 비무회지?”
“네, 이제는 얼추 본산에 남을 아이들도 다 가려졌습니다.”
“그래도 더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거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더 필사적일 것이다.”
“네, 사제들에게 특별히 더 주의하도록 시키겠습니다.”
“그래.”
* * *
그날의 그 마지막 일 검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 검은 마치 본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분명 그날 승리한 것은 아현 자신이었지만 백운호는 그 비무 중에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고 다시 싸운다면 도저히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백운호가 그 마지막 일 검을 다시 내민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육 개월.
강아현은 무공에 입문한 이래 이 정도로까지 수련을 한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지독하게 수련에 몰두했다. 다음번에도 백운호에게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강한 의지가 그녀의 수련을 도왔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버지라는 든든한 후원자 역시 존재했다.
“아빠, 이게 뭐야?”
“요즘 무공 수련한다고 얼굴이 헬쓱한 것이 아주 그러다가 조만간 쓰러지겠더라. 몸에 좋은 거니까 챙겨 먹어.”
“아, 쫌!! 아빠 또 홍매당 약재 빼돌린 거 아니야? 이러다가 또 어머니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때도 아빠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내가 진짜 요상단인 줄 알아서 큰일 났었잖아.”
설마 요상단이라고 건네준 그 약들이 기준치에 살짝 미달하는 자소단이었을 줄이야.
“어이구, 우리 아현이 지금 아빠 걱정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네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말로만 그러지, 아빠한테 아주 끔뻑 죽어요.”
“아빠 그때 어머니한테 쫓겨나서 일주일이나 사랑방에서 잤잖아. 기억 안 나?”
“떽!! 쫓겨나다니. 그건 그냥 사랑방에 가구들이 얼마나 튼튼한가. 이 아빠가 직접 몸으로 시험을 해본 거지.”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휴식이다. 사람의 몸은 강철이 아니고, 누적된 피로는 사람을 망가트린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혹독한 수련 다음 날, 피곤한 몸으로 하는 수련은 그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제일의 연단사 강진의 적극적인 지원은 수련의 성과를 크게 높여줬다.
그렇게 육 개월.
지금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
강아현이 검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이야.”
“백운호?”
육 개월 만에 보는 강아현은 이맘때의 아이들이 그렇듯 몰라볼 만큼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그보다 대체 언제 수련동에서 나온 거야?”
“조금 전에. 나오자마자 찾아온 거야.”
“수련동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인사도 할 겸, 그리고 부탁 할 일도 있어서.”
“인사? 부탁할 일?”
“우선 고마워. 그렇게 귀한 약인 줄 몰랐어.”
“아, 그거······. 아니야. 나도 그게 그렇게 귀한 건 줄 몰랐으니까.”
“뭐가 어찌 됐건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강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건 알겠어. 그보다 부탁할 일은 뭐야? 설마 비무?”
“맞아. 비무 때문이야.”
“너도 그게 신경 쓰였구나. 하지만 난 이미 선약이 있어서······.”
“알아. 마지막 공개 비무회에서 이준형과 붙기로 한 거. 그래서 온 거야.”
사실 그녀가 엄청난 불쾌함을 표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기회를 아무 이유 없이 양보해달라는 말인데. 불쾌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의외로 불쾌한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함보다는 기대감? 이상하게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지금 그래서 온 거라고?”
“어, 미안하지만 그 비무 기회 나에게 양보해줬으면 해서.”
“그ㄹ······, 어? 자,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너 이준형과 비무가 하고 싶으니까 나한테 양보를 해달라고?”
마치 변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
강아현이 차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네? 나한테 비무를 해달라고 부탁해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지금 이준형이랑 비무가 하고 싶으니 나보고 양보를 해달라고?”
“미안, 당연히 맨입으로 해달라는 건 아니고······”
“아 됐고.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칼이나 뽑아.”
“응?”
그녀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 역시 지난 육개월 동안 그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듯 그 기세가 예리했다.
슬쩍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그녀의 검을 타고 흐른다.
“우선 이 자리에서 나를 이겨봐. 네 부탁은 그 이후에 생각해보자고.”
강아현의 몸이 가볍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쾅!!
“마, 말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