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검종지보(5)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했다.
사부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렵겠지. 이건 지금까지 네가 배운 검술과는 많이 다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쉬운데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나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보여줬던 사부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분노와 광기. 그리고 억눌린 독기.
게다가 사제의 연을 맺긴 했지만, 대체 왜 갑자기 나에게 사제의 연을 권했는지도 알 수 없다. 나에게 사부는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종종 사부가 나에게 보내는 눈빛.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제자가 아닌, 잘 자라고 있는 가축을 바라보는 듯한 그 눈빛이 나를 억눌렀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검종의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너도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오직 기술만으로 큰 힘을 이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한번 지긋이 바라본 사부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선심후수가 그저 무식하게 사료를 퍼먹여 키우는 돼지와 같다면, 우리 검술일성의 길은 정교하게 하나씩 쌓아 올리는 탑과도 같다. 그렇기에 결국 무학의 완성에 이르는 길은 오직 검술일성의 길뿐이다.”
분명 하나하나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검술의 초식과 그 사용법, 그리고 왜 그런 형태의 초식이 사용되는지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틀린 말은 없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아, 이걸 이렇게까지 파고든다고?’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대단한 깊이를 가진 부분도 존재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감상은.
‘굳이 이걸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라는 느낌이었다.
마치 하나에 하나를 더한 값이 둘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가 무엇인지, 그리고 더하기가 무엇인지 그리하여 나오는 둘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전히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던 수법들을 이론적으로 제대로 정립을 해준다고 해야 할까?
사부의 가르침은 몽원경의 증무 태사숙조님이 아무 설명 없이 무턱대고 검만 휘두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정작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은 내공 심법이었다.
검술일성의 맥을 이었다는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는 데 정작 가장 요긴한 것이 내공 심법이라니. 하지만 사부가 가르쳐주는 심법은 분명 나에게 신세계였다.
기존에 내가 익히고 있던 자소공은 동공이다.
근골을 단련하고 기맥과 기혈을 튼튼하게 하며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야말로 무공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꼭 필요한 공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내가심법(內家心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자소공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조식(調息)이다. 물론 자소공이라고 하여 행공(行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소공은 인위가 아닌 자연을 추구한다. 호흡을 통해 기운을 받아들이고 동작을 통해 그것을 자연스럽게 운용한다. 이래서는 내공의 증가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자소공으로 기초를 단단하게 다졌다면 그 위에 이제 기둥을 쌓아야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전문적인 행공법이었다.
포원공(抱元功)
사부가 나에게 전수한 심법으로 이 심법을 전수할 때 사부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에는 대단한 신공절학들이 있다. 금강불괴지신에 이른다는 소림의 역근이나, 융통무애하다는 무당의 태극기공. 본문의 자하신공만 하더라도 대성했을 때 도검불침에 주안의 효능까지 있지. 하지만 장담하건대 너에게는 이 포원공 이상으로 어울리는 공부도 드물 것이다.”
내가 다른 내공심법들을 익힌 게 아닌 이상 사부가 한 말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소공을 익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내공이 증가했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먹었다는 영약의 효과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벽곡단만을 섭취했고, 사부의 무공 강론을 들으며 포원공에 매달렸다. 처음 수련동에 들어왔을 때 좁쌀만 하던 기해혈이 어느새 대추씨만큼 부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구나. 이렇게까지 따라올 수 있다니. 과연 기본적인 납매검에서 그만한 활용들을 스스로 뽑아낼 만한 자질이다.”
“부끄럽습니다.”
“좋다. 내가 보기에 납매검은 이만하면 됐다. 오늘부터는 매농검(梅弄劍)을 익혀보자.”
“매농검이요?”
* * *
“그래, 좋은 검술이지. 그간 조금 지루해지고 있었는데 이제야 조금 재밌어지겠구나.”
몽원경에서 눈을 떴을 때, 증무 태사조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했다.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태사조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디 오늘도 한 번 받아 보거라.”
이번에도 역시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격.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막아내지 못할 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검종지보라고 했다.
정말 증무 태사조가 나에게 내밀었던 숙제가 그 검종지보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놀라운 기예다. 한순간에 나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최적의 길을 찾아낸다.
모르는 이가 봤을 때 이것은 예지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사실 이것은 그저 오늘 서쪽으로 저문 해가 내일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것을 파악하는 일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그것은 기술 자체의 한계가 아닌 그 기술을 구사하는 나의 한계다. 정보는 무한에 가깝지만,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나의 두뇌는 유한하다.
-쾅!!
하지만 나와 같은 수준의 내공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이제 증무 태사조의 검이 주는 정보는 나의 처리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태사조가 마지막까지 숨겨두려 노력했던 공격조차 나를 위협하지 못했다.
“쥐꼬리만 하던 내공이 조금 늘어서 그런가? 제법이로구나.”
“이렇게 검을 맞댄 것도 벌써 넉 달이 넘어갑니다. 목 위에 달린 것이 균형추도 아닌데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크, 좋은 말이다. 그래 목 위에 달린 것이 균형추가 아니라면 같은 수법에 계속 당해서는 안 될 노릇이지. 그런 의미에서 딱 좋은 시점이로구나.”
그 순간 태사조의 검이 변했다.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마지막 비무에서 강아현이 사용했던, 그리고 오늘 내가 배운 매농검이다.
그 수준은 강아현은 물론이거니와 사부가 보여줬던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 게다가 그 검형의 활용 역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태사조가 내주었던 숙제를 통해 검의 형이 아닌 검술 그 자체로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검형이 추가되는 것으로 뚫릴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증무 태사조의 입가에 웃음이 점점 진해졌고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내 머릿속을 명멸했다. 막고, 막고 또 막아내며 태사조의 수를 눈에 익혔다. 그 어마어마한 연산 속에서 매농검의 검형이 점점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제는 처음 납매검을 상대할 때만큼 태사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수월하게 느껴진다. 다음, 그리고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태사조의 공격 사이 실낱같은 틈새로 나의 검을 꽂아 넣었다.
그래, 이제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대답을 하는 사람이 바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해가 서쪽에서 떠올랐다.
* * *
‘마······,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공야찬이 입으로 튀어나올 뻔한 경악을 어금니를 악무는 것으로 참아냈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매달린 검을 움켜쥐었다. 검병에 음각된 글자가 그의 마음을 달래줬다.
예상은 했지만, 이걸 이렇게 곧바로 드러낸다고?
납매검의 응용을 순식간에 흡수한 것은 그렇다 치자. 그것은 발상의 문제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매농검은 다르다. 매농검은 화산의 검술 가운데서도 그 형의 복잡함으로는 손에 꼽히는 검술이다. 그런 검을 고작 하루 만에 완벽하게 펼친다?
백운호가 매농검의 형을 배운 것은 바로 어제다. 그리고 오늘 녀석은 그 형을 완벽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그가 본 아이들 가운데 재능으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강아현조차도 반년을 넘게 수행했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둘 중 하나다.
저 녀석이 정말 터무니없는 천재이거나, 혹은 무언가 감춰둔 것이 있거나.
그가 다시 한 번 운호를 바라봤다.
‘이제 넉 달.’
그로서는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전자라면 그 천재성을 활용할 것이고, 만약 후자라면······.
공야찬이 자신이 알려준 것을 고작 하루만에 완벽하게 펼쳐낸 훌륭한 제자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