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6화 (16/288)

16화

검종지보(4)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야, 그거 들었어? 준형이 현무 사숙 제자로 들어간다더라.”

“넌 그걸 꼭 들어야지만 아냐? 애초에 뻔한 일이지. 준형이 아니면 누가 현무 사숙 제자로 들어가겠냐.”

“하긴······. 그건 그렇지.”

화산에는 아주 오래된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다. 이제는 전통이라도 무방할 그 규칙은 도호에 무(武)자는 그 세대에 가장 뛰어난 이에게 붙여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뛰어난 재능이 항상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화산 역대 최고의 고수로 꼽히는 만리우보 공양소만 하더라도 백무가 아닌 백운이라는 도호를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보통 그 세대 최강의 무인은 도호에 무(武)를 허락받은 이들 가운데 나왔고 그것은 현재 이대 제자인 현자 배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무자 곽용.

올해 나이 마흔셋.

불과 서른의 나이에 절정에 올랐으며 이미 그 내공의 수준은 어지간한 일대 제자에 필적했다. 그는 소림의 종무, 무당의 자현, 점창의 청일과 함께 그 세대에서 초절정의 경지를 이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고수다.

천하제일을 노릴 재능.

현무자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곳에 존재한다.”

어슴푸레한 새벽.

마흔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그의 고강한 내공을 증명하듯 주름 하나 보이지 않는 대추빛 얼굴이 선명하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다섯 살에 처음 무공에 입문했다. 그리고 오늘 이날까지 단 하루도 자소공 수련을 빼먹은 적이 없다. 고수가 되는 길이란 그런 것이다. 꾸준함. 그리고 성실함. 만약 네가 지난 삼년 가운데 단 하루라도 아침 수련에 빠졌다거나 늦었다면 나는 네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절대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저 화산 운대봉의 높은 절벽을 사람의 형상으로 깎아놓는다면 이와 같을까?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마해왔다는 그의 자소공은 꼿꼿하게 서 있는 화산을 닮아있었다.

“우리는 사람의 저열한 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욕망하며 질투한다. 자연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에게는 그 본성을 이겨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믿는다. 우리는 저 자연의 짐승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나 역시 본래는 그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멍청했고 마치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다. 그나마 봐줄 만했던 것은 성실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아, 아닙니다!! 사부님이 어찌!!”

“아니다. 나의 과거가 그러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런 멍청했던 과거를 직시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화산을 닮은 사내의 이야기에 이준형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듯 화산의 공부는 단순히 먹고 숨 쉬고 움직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며 목적이다. 오직 너의 삶 자체가 화산이 될 때에만 상승의 경지는 스스로 자신을 허락할 것이다.”

* * *

“개소리다. 처음 의도야 어땠는지 몰라도 이렇게 폐단이 가득한 상황에서 그런 이상을 이야기하는 건 그야말로 완벽한 개소리지.”

“동의합니다.”

대체 어째서 우리 삼대 제자들에게는 이토록 거대한 자율이 허락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장굉 녀석이 패악질을 부릴 때마다 나는 그런 의문이 들곤 했다. 물론 저잣거리의 생활에 비하자면 이 정도 패악은 패악도 아니었기에 꾹 눌러 참긴 했지만, 이곳이 과연 명문 정파 화산이 맞긴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부님의 설명은 이러했다.

본래 화산의 사승관계는 지금처럼 일괄적으로 제자를 받아 그 중에서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은 100년 전 장문인이신 백운 태사조님이셨다.

화산의 가르침은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본래 태사조님이 장문에 오르고 처음 도입한 이 제도의 본래 목적은 바로 그것을 걸러내는 데 있었다고 한다.

무제한의 자율은 그 인간의 본성을 드러나게 한다. 즉, 단순히 무공의 뛰어남이 아닌 3년 동안 기초를 다지며 평소 삶의 태도, 행실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제자를 들이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백운 태사조님 이후로 벌써 백 년.

세월은 흐름 속에 낡아가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다. 제도 역시 낡아간다.

3년의 자율이 허락된 근본적인 이유는 잊혔고, 그저 그 틀만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제도로 굳어졌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철없던 어린 시절의 실수라는 개소리를 지껄일 거다. 그리고 사과하겠지. 더 화가 나는 것은 그 사과가 진심이라는 점이다. 화산의 기공을 대성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까.”

“사부님. 근데 가짜로 사과하는 것보다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쪽이 더 나은 거 아닌가요?”

“천만에. 가짜라면 차라리 나중에 응징하겠다는 복수심이라도 가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녀석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순간, 나는 복수할 대상을 잃어버렸다. 그때의 허탈함이란······.”

사부가 이를 바드득 갈며 소리쳤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나의 앙금은 독이 됐다. 반면 사과를 통해 모든 것을 털어 버린 그 녀석은 여전히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두들겨 맞은 사람만이 이를 아득바득 갈아야 하는 이것이?”

옹졸하다. 사람으로서 그릇이 참 작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인간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너는 그 녀석이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기 전에 꼭 응징해야 한다.”

녀석이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기 전에 나의 힘으로 응징한다. 그래, 좋다. 쪼잔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몹시 마음에 든다. 다만 문제는 현실의 장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작 열세 살에 검기까지 사용한 녀석이 앞으로 화산의 기공을 대성할 예정인데 그러기 전에 혼쭐을 내줘야 한다. 뭐 그런 말씀이신 거네요?”

“그래, 그러니까 어디 보자. 우리가 지금 여기에 들어온 게 두 달 전이니 정확히 말하자면 넉 달이 남았구나.”

“너, 넉 달이라고요? 대체 왜 그렇게 촉박한 겁니까.”

사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그날이 네가 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모두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녀석을 꺾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삼대 제자의 마지막 정기 비무회니까. 단순하게 녀석을 한 번 이겨 먹는다고 응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지금까지 으스대던 모두의 앞에서 단단하게 뭉개버려야 그게 진짜 응징이지.”

“그······, 그런가요?”

“당연하지. 잘 생각해보거라. 만약 지금 장광이 너에게 진심으로 무릎 꿇고 사과를 한다면 녀석에게 복수심이 남을 것 같으냐?”

사부의 질문에 잠깐 생각했다.

물론 난 오랜 시간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비무대에서 녀석을 좀 두들겨 팼다고 그 분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공격에 남자로서의 정체성까지 잃을뻔한 녀석이 진심으로 반성하며 무릎 꿇고 사과까지 한다면?

“글쎄요. 만약 그런다면 딱히 마음에 앙금이 남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 그게 바로 네가 이준형을 모두의 앞에서 꺾어야 하는 이유다.”

뭔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제는 현실의 높은 장벽이었다.

“근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그 녀석 영약을 하나 더 먹기 전에도 강아현보다 강하던 녀석인데요.”

그리고 그런 나의 걱정 가득한 질문에 사부가 으스스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그야 당연히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