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검종지보(3)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정기 비무회의 주인공은 나 백운호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최약체로 꼽히던 내가 무려 장광을 상대로 승리했고, 최강을 다투는 강아현을 무릎 꿇게 했다. 이 정도면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산이었다.
“검기라니. 이준형 그 녀석 진짜 미친 거 아냐?”
“에이, 근데 그 정도로 검기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지. 검기라면 사공 사숙님이 보여주셨던 그 정도는 돼야 검기 아니야?”
“검에서 반 촌은 떨어진 곳이 잘려 나갔는데 그게 검기지. 대체 뭐가 검기냐?”
“반 촌이라니. 기껏해야 이 푼쯤 되려나?”
“반 촌이건 이 푼이건 하여간 검에서 떨어진 곳을 잘랐으니 검기 맞잖아.”
“그거야 뭐, 검의 예기에 잘려 나갔을 수도 있는 거고.”
“에이, 가까이서 보시던 동 사숙님이 검기라고 소리치셨잖아.”
“더 가까이서 보셨던 조 사숙님은 갸우뚱하셨잖아.”
그래. 검기란다.
물론 그게 진짜 검기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비무회에서 무려 검기를 선보였다.
아니, 인간적으로 검기 같은 건 그래도 정식으로 사부님 모시고, 어? 진득하니 수련 열심히 해서 매화선인쯤 된 다음에 뽑아내는 게 예의 아닌가? 근데 그걸 고작 열세 살에 발현한다고?
“먹을 때 돼서 먹은 거겠지.”
“네?”
“영약 말이다. 보통이라면 이전에 먹은 것을 소화하고 다시 몸이 준비되기까지 2, 3년은 더 필요했겠지만, 광양지체라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애당초 속도가 다르고 한계치가 다르며 수용력이 달라.”
며칠 전.
‘내가 네 사부가 되어주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물론 내 상황이 이번 비무회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무려 장광을 이기고 강아현을 무릎 꿇게 했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난 여전히 매력적인 제자 감은 아니었다.
현대 화산파 무공의 근본이념은 선심후수.
하지만 아쉽게도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내공을 수련하는 데 그리 적합한 몸이 아니다.
“같은 양의 밥을 먹고 같은 시간 몸을 움직여도 살이 찌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근육이 붙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살이 빠지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사람은 타고난 체질이 제각각이다. 내공 역시 마찬가지지. 백운 태사조 이후로 벌써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또한, 본파가 지금과 같은 제도를 정비한 것도 벌써 70년이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그에 관한 기준이 만들어졌다.”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부가 입을 열었다.
“이준형의 광양지체는 상상 위에 극품. 너는 하중이다.”
“하중이라······. 그래도 다행히 하하는 아니네요.”
“신체에 결손은 없으니까”
사실상 몸 어딘가에 장애가 없는 사람 중에는 최하급이라는 의미다.
“평균적인 사람이 일출에 맞춰 자소공을 빠짐없이 1년간 수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을 1년이라고 봤을 때,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너는 그 5할 남짓의 효과를 보더구나.”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까지 엉망은······.”
나의 항변에 사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화산의 충만한 정기와 대연무장 청강성 아래 깔린 한옥의 효능 덕분에 거기서 3할은 더할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의 6할 5푼쯤 된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건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말로 들으니 새삼 암담하다.
사부의 입꼬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광양지체의 경우 거의 두 배쯤 되는 효율을 보인다고 봐야 하니 너와는 네 배. 게다가 여덟 살 때 먹은 자소단을 다 소화했고, 최근에 또 하나를 먹었다고 들었으니······. 사실 검기를 발현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래, 여기까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사부의 입꼬리에서 시작된 뒤틀림이 어느새 입꼬리를 넘어 얼굴 전체로 번졌다.
“큭큭큭. 그건 정말이지 재밌는 이야기다.”
과연 저것을 미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평소 힘센 자들 앞에서 실실거리던 그 웃음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사부의 얼굴에 맺혔다.
“개소리!!! 고작 그딴 것이 검기라고? 그저 사육되는 돼지 새끼들이 뒤룩뒤룩 살을 찌우듯 비대하게 크기만 키운 내공이 차다 못해 넘쳐버린 그딴 게 검기?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다.”
며칠 동안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이제 나의 사부가 된 이 공야찬이라는 사람은 절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제자로 들어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애당초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백 년 전에는 많았다. 칠십 년 전에도 적지 않았지. 사십 년 전에는 극히 일부였고, 이제는 오직 나 혼자뿐이다.”
사부의 말에 따르자면 화산에서 이제 검술일성의 길을 걷는 사람은 오직 사부 하나뿐이다. 그렇기에 나의 선택지 역시 오직 사부일 수밖에 없다. 내가 몽원경에서 받는 가르침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부의 가르침뿐이기 때문이다.
미친듯이 화를 내던 사부가 순식간에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너를 제자로 받겠다는 것은 이미 장문인께 말씀드렸다. 흔쾌히 허락하시더구나.”
“그렇군요.”
“그러니 오늘부터 당장 폐관에 들어가겠다. 7번 수련동을 빌려놨다. 숙소에 가서 짐을 챙겨 오도록 해라.”
“네? 폐관이요? 하지만 아직 저희 기수가 정식 제자로 들어가기까지는 육 개월이나 남았고 사부님도 검술 총론 강의가 있으시잖습니까.”
사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그 담담한 얼굴 속 눈동자에 억눌린 분노와 광기가 엿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필요한 건 다 얻었다. 굳이 그런 광대짓을 더 하고 있을 이유는 없겠지. 무엇보다 너에게는 지금이 가장 중요해.”
“네? 대체 왜?”
“내공.”
“내공이요? 하지만 이제 와서······. 게다가 어차피 검술일성의 길은 결국 검을 깨닫는 것 아닙니까?”
“멍청한 소리!! 선심후수라 하여 오직 심만 있더냐. 그랬다면 내가 검술총론을 너희들에게 강론할 이유가 없었겠지. 검술일성 역시 마찬가지다. 검술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내공은 필수인 법이지.”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선심후수건 검술일성이건 결국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이고의 문제이지. 어느 한쪽만을 취하라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
하지만 굳이 지금 내공에 집중을 한다고 뭔가 극적으로 달라질까?
“최근에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네 몸속에는 약 기운이 가득하다.”
“약이라고요?”
잠깐만.
설마 강아현이 요상약이라고 줬던 그 약이 정말 영약이었던 거야?
맙소사.
나의 어깨를 움켜쥔 사부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만약 그 약 기운만 다 소화할 수만 있다면······.”
-꿀꺽
설마······.
“얼추 다른 녀석들 평균치 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 거다.”
* * *
-큭큭큭
증무 태사조가 배를 잡고 웃었다. 볼멘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니,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보통 그렇게 무게 잔뜩 잡고 이야기하면 천하제일, 아니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이준형 정도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얼추 평균이라뇨.”
“아니, 이 녀석아. 세상이 어디 그리 쉽다더냐? 게다가 네 녀석 그 몸으로 얼추 평균이라도 가는 게 어디더냐.”
하긴.
맞는 말은 맞는 말이다. 게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이기도 했다.
“태사조님, 그런데 대체 검종은 왜 이렇게 순식간에 몰락한 걸까요? 사부님 말씀으로는 태사조님의 우화등선과 동시에 비기들이 실전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게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게 당시에는 검종이 주류였다면서요. 그렇다면 그 비기라는 것들을 태사조님만 알고 있었다는 거, 조금 이상한데요.”
“글쎄다. 그거야 내가 떠난 이후의 일 아니냐. 나야 모를 일이지. 그러니 잔소리는 이쯤 하고 어서 검이나 들어라. 시간 아깝다.”
“태사조님!!”
증무 태사조님이 말 대신 검으로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이야기라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7번 수련동.
나의 수련이 밤낮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