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정기비무회(4)
머릿속에 수많은 경로가 명멸했다.
보는 눈은 많았다. 대놓고 노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하게.
하지만 나와 싸우는 장광 녀석이라면 확실히 인지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검이 장광의 검과 충돌했다.
지금까지 그의 검은 이렇게 떠들고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제대로 힘과 힘으로 부딪히면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힘과 힘의 대결에 응했다.
이미 상당히 힘이 빠졌음에도 여전히 그 덩치에 걸맞게 묵직한 검이었다. 하지만 지난 열여섯 번째 초식에서 이미 녀석의 손가락 하나를 망가트렸다. 검을 지지하는 축 중 하나가 망가졌다는 의미다. 검을 파지한 손에 힘이 부족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상은 없었지만, 몸 곳곳이 울긋불긋하다. 미세혈관이 파열되고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정상적인 위력이 나올 리 만무하다.
-쾅!!
장광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만신창이가 됐다고 해도, 힘의 싸움에서는 나 정도는 무조건 이길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리고 이 일검이 그런 녀석의 마음을 완전히 박살 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경우의 수를 계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광의 검을 튕겨낸 나의 검이 처음 움직이던 방향에서 틀어졌다.
정확하게 내가 의도한 그 방향으로.
-퍼억!!
외공의 고수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단련한다. 사실상 몸 밖에 튀어나온 내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최대의 약점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련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가죽이 찢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타격을 흡수하는 것은 근육과 뼈다. 그리고 남자 최대의 약점에는 근육도 뼈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단말마 비명이 장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게거품. 확대된 오공에서는 그 고통을 증명하는 분비물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이런!!”
비무를 중단시킬까 말까 고민하던 사숙들이 빠르게 비무대 위로 올라와 장광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아직 터지지는 않았다. 어서 약당으로!!”
“젠장, 누구 판관필 가진 사람 없어? 이 녀석 외공이 상당해서 혈도가 제대로 짚이지 않아.”
고작 열세 살이라고 믿기 힘든 장광의 외공이 지금은 독이 됐다.
극심한 통증으로 경련하는 녀석의 통증을 경감시켜주기 위해 혼혈을 짚어주려던 사숙이 급하게 판관필을 찾았다.
“지금 여기 그런 게 어딨어. 일단 약당으로 먼저 옮기자고.”
사숙 중 한 분이 녀석을 둘러업고 몸을 날렸다. 팔 척의 거한을 등에 업었음에도 그 걸음이 표홀하다.
비무대에서 내려온 나에게 강아현이 날 듯이 다가왔다.
“잘했어.”
격의 없는 손바닥이 나의 어깨를 두들긴다. 오늘도 역시 기분 좋은 복숭아향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걸로 네 부탁은 들어준 거다.”
“부탁?”
“네가 그랬잖아. 다치지 말라고.”
주변의 시선이 뜨겁다.
강아현은 우리 삼대 제자들에게 절벽의 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단순한 꽃이라면 절벽을 오르는 것만으로 꺾을 수 있겠지만, 강아현은 그 스스로가 삼대 제자의 선두를 다투는 고수다.
게다가 출신 자체가 화산의 본산. 옥녀봉을 지배하는 홍매당 당주의 맏딸이다. 그녀와 교류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화산 본산 출신의 몇몇이 전부다. 그런 그녀와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는다면 이런 질투 가득한 시선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 중에는 이준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 그걸 또 기억한 거야?”
강아현이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확실히 어떤 각도로 봐도 예쁜 얼굴이다.
“당연하지. 내가 살면서 봤던 여자 중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가 내 몸을 걱정해준 건데. 그걸 어떻게 까먹겠냐.”
“지······, 지금 대체 뭐······, 뭐라는 거야!!”
강아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발갛게 달아올랐다.
본인 스스로가 예쁜 걸 잘 알고, 또 그걸 영악하게 활용하는 주제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부끄러워하다니. 참 묘한 여자다.
“아무튼 이거나 먹어.”
강아현이 목갑 하나를 내밀었다.
“응? 이게 뭔데?”
“요상단이야. 외상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멧돼지랑 싸웠는데 속은 다를 거 아니야. 이왕 비무를 하는 건데 몸 상태 핑계를 듣고 싶진 않으니까. 먹고 운기요상이나 하도록 해. 기다려 줄 테니.”
목갑 안에는 기름종이에 쌓인 단약 하나가 들어있었다. 기름종이를 풀어헤치자 청아한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이거 귀해 보이는데?”
“아버지가 급할 때 먹으라고 챙겨주신 약이야. 대단한 약은 아니야. 집에 가면 내 방에 두 개나 더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먹어.”
“그래? 그렇다면 고맙게 먹을게.”
아현이가 준 단약을 가볍게 씹어 삼켰다.
이야기 속의 영약들을 보면 입에 넣는 순간 물처럼 스르륵 녹아내린다던데 그러지는 않는 걸 봐서 그녀의 말처럼 그렇게 대단한 약은 아닌 것일까?
-후읍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심법인 자소공을 운용했다.
정해진 동작대로 몸을 움직인다.
단약의 효과일까? 매일 새벽, 대연무장에서 내공을 수련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몸이 달아오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조금 전 비무로 지쳐있던 기맥에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극도로 혹사한 육체에 안마가 가해지는 것 같은 시원함이다.
반 각?
그렇게 자소공의 동작을 모두 끝냈을 때 나의 몸은 장광과 싸우기 전보다 좋아진, 아니 그걸 넘어 내 인생 최고의 상태로 올라왔다.
이거 약의 효과가 너무 훌륭한데?
“끝났어?”
“응, 그런데 이 약, 정말 대단한 약이 아닌 거야?”
“그렇다니까. 아버지가 그냥 급할 때 먹는 요상단이라고 그랬어. 그때 보니까 막 연단로에서 한 번에 서른 개도 넘게 연단하고 그러시더라.”
정말 귀한 약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몇 개를 구해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러면 시작해볼까?”
* * *
“강 수석님?”
“여보, 불길하게. 갑자기 또 왜 그래? 강 수석님이라니.”
“강.수.석.님. 분명 재료는 서른다섯 개 분량을 가져가시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결과물이 스물한 개뿐이죠?”
매화당 수석 연단사 강진이 자신을 노려보는 아내의 살벌한 시선에 침을 꼴깍 삼켰다. 한때는 저 예쁜 얼굴이 마냥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도 벌써 15년. 아내는, 아니 매화당주는 정확히 15년만큼 더 무서워졌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강진 자신의 전문분야다. 아무리 미심쩍다고 해도 우기면 별수 없을 것이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그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니, 영약을 만드는데 서른다섯 개 분량 재료를 가져가서 서른다섯 개를 다 내놓는 연단사가 세상에 어딨어!! 어? 스물한 개도 나 정도 되니까 뽑은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다고.”
그의 큰 소리가 통한 것일까?
대번에 아내의 기세가 줄어든다.
“알죠, 저도 잘 알아요. 근데 기준치 이상의 단환이 무려 스물한 개나 나왔는데 기준미달인 단환이 고작 셋. 당신 같은 연단사가 열한 개 분량이나 완전히 태워 먹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렇죠. 뭐라고 추궁을 하려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당신 실력이 줄어든 거라면 앞으로 계획도 좀 조절해야 하니까요.”
“그래?”
“당연하죠. 게다가 당신이 몇 개 가져다 쓴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차피 당신 아니면 그 재료로 그만큼 뽑아낼 수도 없는걸요. 안 그래요?”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니기는요.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솔직히 말해줘요. 진짜 당신 실력이 줄어든 거면 매화당의 운영계획 자체를 수정해야 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당신 요즘 부쩍 피곤해하는 것 같긴 하던데······. 보니까 종 차석도 이번에 옥고환 수율을 제법 괜찮게 뽑더라고요.”
“자기 설마 지금 종묵 녀석이랑 나를 비교하는 거야?”
강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연단 능력을 의심하다니. 단언하건대 천하를 통틀어 강진 본인에 비견될만한 연단사는 소림의 공국 신승뿐이다.
“아니, 비교가 아니라.”
“여보, 아니 매화 당주님. 나 강진이야. 강진. 이거 왜 이래? 그리고 애당초 종묵 그 녀석이라면 자소단 스물한 개는커녕 열다섯 개도 간신히 뽑아낼걸? 게다가 내 실력이 줄긴 왜 줄어!! 어? 말이 스물한 개지. 그래도 효과 절반은 발휘할만한 녀석도 무려 다섯 개나 더 뽑아······.”
“강.수.석.님?”
그리하여 그 순간.
강진은 자신의 어째서 강호인들이 자신의 아내를 나찰이라 부르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