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3화 (3/288)

3화

몽원경(2)

공야찬 사숙의 말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젠장, 이게 다 어젯밤 꿈 때문이다.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던 그 꿈에서 증무 태사조는 나의 매화검 곳곳을 건드렸다.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설마 그게 의식 깊숙한 곳에 남아 이렇게 실제 수련에 영향을 줄 줄이야.

지금까지 애써 재능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가르침을 따라가는 녀석으로 잘 보여왔거늘.

“검을 휘두르는 꼴이 제법 볼만해졌구나. 구제 불능의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구제는 가능한 수준인가 보군.”

응?

하지만 뜻밖에도 공야찬 사숙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칭찬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까지 그토록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칭찬 비슷한 말이라도 나온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래, 힘이 부족하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가 한 마디를 더 중얼거리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게 지금까지 우습게 보이던 그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어이고, 그래. 역시 잘한다. 아주 호쾌해. 검술은 그런 맛이 있어야지. 역시 이진섭 장로님의 손자답구나. 어릴 적부터 영재로 이름이 높았다더니. 크, 다들 잠깐 멈추고 여기 준형이 하는 것 좀 보고 배워라. 어? 검술은 말이야.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다.

공야찬 사숙의 칭찬에 이준형이 뽐내듯 검을 휘둘렀다. 타고난 근골에 이십 년 내공을 증명하듯 그 검의 움직임이 민활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검에서 들리는 파공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의 검이 공기를 찢는다는 느낌이라면, 이준형의 검은 말 그대로 공기를 부숴버린다는 느낌이다.

‘저건 맞대는 순간 내 검은 그냥 박살 나겠는데?’

그렇게 이준형이 다른 이들의 기를 팍팍 죽여가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모두가 지켜볼 때, 그와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이준형에게 뒤지지 않는 검기를 뽐내기 시작했다.

강아현.

화산 옥녀봉에 있는 홍매당 당주의 장녀로 본산 출신의 제자 가운데 최고의 자질을 갖춘 녀석이다. 내력의 양에서는 광양지체를 타고난 데다가 자소단까지 복용한 이준형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정순함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얼마 전 비무회에서 그녀는 이준형을 상대로 70여 초를 다퉜고 중간중간 그를 위기로 몰아넣기까지 했지만 아쉽게도 지구력 부족으로 패배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이준형보다 먼저 매화선인이 되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건 오직 강아현뿐일 것이다.

“그래, 역시 아현이도 잘하는구나. 검의 날카로움이 잘 살아있어.”

두 녀석의 검을 보고 있자니 나의 검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아니, 사실 저 두 녀석만이 아니다. 나의 검은 다른 아이들처럼 빠르고 강맹하며 예리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장 배경이 다르고, 타고난 자질이 다르며, 받는 지원이 달랐다.

세상은 본래 공평하지 않다.

“야, 백운호.”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때, 장광이 내 근처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 광아 왜?”

“왜는 무슨. 나 오늘 저녁 취사장 청소 당번인 거 알지? 수고 좀 해라.”

“아!”

“아? 지금 ‘아!’라고 그랬냐? 이 새끼가?”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준형이가 조사당 청소 당번이잖아. 그거 대신해줘야 할 것 같아서.”

장광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의 뺨을 툭툭 두들겼다. 8척 장신에 어울리는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었다. 가볍게 두들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답답한 새끼야. 어차피 조사당은 위패 좀 닦고 먼지만 쓸면 끝나는 일이라 혼자 하는 일이잖냐. 취사장 청소 끝내고 가서 하면 되지. 어우, 하여간에 애새끼가 요령이 없어요. 요령이.”

“미, 미안.”

“새끼야. 대체 넌 언제까지 미안하게 살 생각이야. 미안할 일인 줄 알면 우리 좀 알아서 잘하자. 어? 언제까지 내가 이런 걸 일일이 알려줘야 하겠어.”

개자식.

하지만 개자식을 웃으며 대하는 것은 이미 저자에서 수도 없이 경험했다. 나는 오늘도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 *

산중의 해는 빨리 저문다.

취사장 청소를 끝내고 선대 장문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조사당에 왔을 때, 이미 해는 저문 이후였다.

조사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위패를 꺼내 깨끗한 광목천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보는 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할 수는 없었다.

‘어디 협객담을 보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위패를 닦다 보면 누군가 기연도 내려주고 그러던데 말이야.’

혼자 어처구니없는 상상도 해가면서 위패를 닦다 보니 어느새 내가 가장 존경하는 4대 전 장문인이신 만리우보 백운자 공양소 사조님의 위패 차례가 됐다. 사실 백운 태사조님을 가장 존경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화산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유독 공양소 사조님의 위패만 더 반질반질한 느낌이다. 다른 위패를 대충 닦는 놈은 있더라도 공양소 사조님의 위패를 대충 닦는 놈은 없다는 의미다.

당연한 일이다. 백운 태사조님이야말로 현대 화산의 근본 그 자체였으니까.

‘게다가 나 같은 녀석에게는 희망이나 다름없고 말이야.’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다. 끝없이 정진하고 정진한다면 누구나 대성할 수 있다.

백운 태사조님은 만리우보라는 그 별호에 걸맞게 어린 시절 둔재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조사당 청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어느새 해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몸에 먼지만 털어내고 서둘러 잠자리에 누웠다. 내일 조식 당번이다. 지금부터 바로 잠든다고 해도 세 시진도 채 자지 못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네?”

“네가 공양소 녀석처럼 되는 것 말이다. 그나저나 감히 이 몸을 만났음에도 그토록 찾던 백운이 누군가 했더니 공양소 그 녀석이라니. 쯧.”

뭐지? 이 갑작스러운 전개는?

어느새 내 눈앞에는 증무진인 목운평 태사조님이 서 계셨다.

“뭐야, 또 꿈인가?”

“꿈이라······. 뭐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 꿈이 네게 큰 도움이 된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꿈을 꾸고 공야찬 사숙의 수업에서 칭찬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네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공야찬 사숙 눈에 조금 든 것 같아요.”

“아무렴. 누가 가르쳤는데. 보는 눈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지.”

잘생긴 얼굴의 그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그 오만함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근데 지금 뭐 해?”

“네? 뭘 하다뇨?”

“칼 안 들어? 그토록 바라던 기연을 만났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증무 태사조의 검이 나의 어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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