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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97화 (97/150)

97. 형제 상봉

“그어…… 그어어어……!”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가니온은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으며 괴로움에 치를 떨었다.

병사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그들의 영혼이 가니온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하나 그냥 흡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흡수하는 것은 영혼과 함께 사념도 흡수했기 때문에 인간이 죽임당하면서 느낀 감정과 고통을 고스란히 흡수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감정들은 썩 유쾌할 리 없었다.

공포, 절망, 후회, 광기, 혼란 등……. 한둘도 아닌 무려 15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감정과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니온의 자아는 빠르게 타락되어 갔다. 더 이상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아가 붕괴해 버린 탓이다.

하나 반대로 그가 영혼과 사념을 흡수해서 타락해갈수록 라이프 베슬에 차오르는 힘은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15만의 반란군이 전멸하자 그란체스카의 목소리가 요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릇은 완성되었다. 남은 건 네 영혼을 그릇에 각인시키는 것뿐이다.

‘방법은?’

-피는 영혼의 통화다. 네 피 한 방울을 라이프 베슬에 떨어트려라. 그러면 각인이 이루어진다.

요한은 그란체스카의 말대로 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 피 한 방울을 라이프 베슬 위에 떨어트렸다.

그 순간.

사아아아아…….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구슬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본래대로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가니온은 아니었다.

번쩍.

죽음의 마나를 한계 이상으로 받아들인 탓에 생육신은 썩어 문드러지고 해골만 남은 그의 눈두덩에서 붉은 빛을 내뿜는 점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죽음의 마나가 마치 이전에 부딪쳤던 그란체스카를 연상케 했다.

오러 마스터 15만 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데스 켈러미티를 창조한 것이다.

-내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 약조한 대로 나를 풀어 다오.

‘그러도록 하지.’

-고맙다…….

구속에서 해방된 그란체스카는 가니온의 몸에서 흘러나와 흐릿한 인간의 형태로 승천하였다.

과연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 다른 희생자를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요한에게 가니온을 언데드로 만든 건 아무런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주인님의 충실한 종복입니다.

가니온은 요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게서 더 이상 생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앞으로 네 이름은 가니온이다. 나는 너를 앞세워 제국을 칠 생각이다. 혹시 이에 대해 이의가 있느냐?”

-저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주인님이 명령하시는 일을 그저 따를 뿐입니다.

대답하는 가니온에게서는 티끌만 한 감정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노가 얘기하는 것처럼…….

“좋다, 가니온. 첫 번째 명령이다. 생전 네놈에게 가담한 반란군들 전원을 언데드로 부활시켜라. 녀석들을 역습의 선봉에 세울 것이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요한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휘관들은 몰라도 죽은 병사들은 확실히 억울한 감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상관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세상이다.

어차피 이들은 반란군에 가담한 병사들이라 가족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었음에도 머리가 잘려 화장당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몸뚱이라도 내 방식대로 써먹어 주지.’

가니온이 앞으로 걸어 나가 손을 뻗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프 베슬 안에 농축되어 있던 죽음의 마나가 강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역시 죽음의 마나가 흘러 넘쳤고, 구슬에서 나온 죽음의 마나와 뒤섞이며 가시화되어 보일 정도로 마나가 농축되었다.

그것은 마치 희뿌연 회색빛 안개와도 같았다.

“절대로 저 안개에 접근하지 마!”

“전원!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

지휘관들이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을 안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만약 등 뒤에서 창으로 찌르며 뛰어들라 해도 병사들은 절대 안개에 접근하지 않았을 테니까.

오러 유저의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의 마나는 오러 유저건 아니건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평범하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는 회색 안개 속에서는 지금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망자들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목이 잘린 자는 잘린 목이 찾아와 붙고, 사지가 잘린 자는 팔다리가 다시 붙으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부활은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처참히 박살 난 육신은 저들끼리 뭉쳐 전혀 다른 언데드 몬스터로 거듭나고 있었다. 언데드 몬스터가 완성될 때마다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죽음의 마나가 녀석들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죽음의 마나가 녀석들에게 흡수되고 드러난 언데드 대군에 사람들도, 오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이들도 있었다.

혹은 주먹을 틀어쥐며 지금 당장이라도 저것들을 쓰러트려야 하는 것이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요한도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익히 예상했다. 오히려 큰 소란 없이 넘어가는 듯한 그들의 분위기에 더 놀랐을 정도니까.

“확실히…… 나도 죽어서 좋은 곳 가긴 글렀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건 분명 지옥행 티켓일 거라고 요한은 확신했다.

“가니온, 언데드 군대를 수거해서 돌아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가니온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언데드 대군의 발아래가 꿀렁거리더니 늪지대처럼 녀석들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언데드 한정으로 무한정 보관할 수 있는 데스 켈러미티의 아공간 흑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언데드들을 모두 수거한 가니온은 붉은 빛의 구슬이 되어 요한에게 날아왔다.

구슬은 목걸이처럼 변해 요한의 목에 걸렸는데 이 목걸이가 바로 ‘리치킹의 목걸이’였다.

“의무병들은 부상자들을 살펴라!”

“중상자들은 서둘러 의무대로 이송한다!”

그렇게 두어 차례 큰 소동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제야 부상자들을 챙기며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저기…… 하이든 경, 오크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함께 싸운 전우들을 그저 두고 보기만 할 생각이었나? 오크 쪽 부상병들도 함께 살피고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지원을 아끼지 말게.”

“예, 각하!”

그렇게 필요한 조치를 서둘러 내린 하이든과 하워드는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요한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다.

“요한!”

“아버지!”

하이든은 요한을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누구보다 고생이 많았구나. 장하다. 장하다, 내 아들!”

“아버지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모두 아버지 덕분이에요.”

두 사람이 해후를 마치고 떨어지자 하워드가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네가 정말…… 요한이니?”

“형…….”

요한은 자신을 보고 파르르 떠는 형의 눈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요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껴 주고, 믿어 주었던 형을 지금까지 속여 왔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미안…….”

“미안하다!”

“……?”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하워드의 모습에 요한이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자 하이든 역시 놀라서 요한과 하워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너는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면서 숱한 수라장을 넘어 왔는데, 형이라는 놈이 동생을 이렇게 가까이에 두고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내가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속인 내 잘못이지, 속은 형 잘못은 아니지. 그리고 나만 고생했나? 우리 가족들 중에 고생 한 번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워드는 요한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동생을 와락 안았다.

“미안하다. 형이란 작자가 네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그건 아버지도 했던 말인데. 아버지나 형이나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준 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됐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하워드는 피식 웃으며 포옹을 풀고는 요한을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컸구나. 요한, 네가 크면 분명 이 형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매번 얘기했지.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확실히 그건 형만 해 준 얘기네.”

“크흠!”

요한의 대꾸에 옆에서 하이든이 겸연쩍은 얼굴로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자, 그럼 뒷수습도 끝난 듯하니 우리도 왕도로 돌아가자꾸나.”

“그런데 오크들은…….”

요한이 조심스럽게 묻자 하이든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라의 위기를 벗어나도록 도와준 구국의 동맹을 대접도 없이 빈손으로 돌려보내라고? 벨로반에 그런 법도는 없다. 싫다고 해도 강제로 끌고 와 대접할 생각이니 걱정 말거라.”

피식…….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 하이든 크림포드 백작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이 일을 제가 오크들 쪽에 전달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하이든에게 허락을 구한 요한은 형, 하워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

“알고 있다. 담아 둔 얘기는 집에 가서 천천히 나누자. 지금은 너도 나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으니 말이야.”

“너도 좀 이따 보자, 자현.”

“후에 뵙겠습니다, 주군.”

그렇게 마자현과도 인사를 나눈 요한은 두 사람과 헤어진 후, 가루칸을 찾아갔다.

오크족의 절친한 벗이 찾아오자 오크들은 두 팔 벌려 요한을 환대했다.

“여, 왔냐. 알파.”

“이제는 괜찮아, 가루칸.”

“……그래. 드디어 네 이름을 찾은 거냐, 요한?”

툭.

요한과 가루칸은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을 제외하면 요한이 이름을 되찾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건 가루칸밖에 없었다.

“여기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

“어떤 전투든 승전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지.”

“그것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이야.”

“아아…….”

가루칸과 요한은 오크족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압도적인 승리를 얻긴 했지만 상대방도 15만이라는 만만찮은 대군이었다.

당연히 전사들 중에서도 부상자가 꽤 많았는데 인간 의무병들이 그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지.”

“이제부터라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이런 모습을 질리도록 보게 될 테니까.”

“크하하하! 그거 참 기대가 되는구먼.”

“아 참, 승전 축하 연회에는 당연히 참석할 거지?”

요한의 질문에 가루칸은 엄지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승전에 연회가 빠질 수 없고 연회에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이참에 진짜 연회란 게 무엇인지 인간 귀족 녀석들에게 똑똑히 가르쳐 줘야겠어. 으하하하하!”

크게 웃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요한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뀐 밤이 아닐 수 없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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