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소드 아너
그날 밤.
왕도 중심에 있는 가니온 유스타프 공작의 공관으로 한 사내가 조용히 찾아왔다.
“공작 각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총관의 말에 공관 서재에서 책을 읽던 가니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처럼 달도 기운 늦은 밤에 자신을 찾아올 무례한 손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손님께서는 자신을 알파라고 소개하면 각하께서 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알파가 찾아왔다고?”
안 그래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알파에 대한 추측만 맴돌던 차였다.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접객실로…… 아니, 이곳으로 모시고 오게. 귀한 분이시니 접객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게야.”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총관의 안내를 받아 서재에 도착한 요한은 비로소 가니온 구스타프 공작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과는 필요 없으니 아무도 이 주변으로 들이지 말게, 알겠는가?”
“예, 각하.”
총관이 허리를 굽히며 서재를 나서자 서재에는 요한과 가니온 구스타프, 단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다과가 필요하다면 내가 준비해 주겠네. 여기에서도 기본적인 다과 정도는 준비가 가능하거든.”
“그럼 홍차로 부탁하지.”
“…….”
가니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방금 가니온은 옛 트리스탄 황실의 언어로 물어보았는데 그러자 요한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황실의 언어로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면서 요한은 자신이 뻔히 앞에 있는데도 소파의 상석을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머저리일 리는 없고…… 도대체 누구지?’
가니온은 직접 탄 홍차를 요한의 앞에 조심스럽게 놔두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론은 집어치우세. 자네는 누구인가? 이곳에서 내가 모르는 우리 사람은…….”
“말은 짧은 반면에 머리는 유난히 높구나. 가니온 유스터프…… 아니, 가니온 발코르 트리스탄.”
“……!”
가니온은 너무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설마 상대방의 입에서 다른 그림자들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진명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뭐, 제국이 통일을 이룩한 미래에는 개나 소나 알게 되는 이름이지만 확실히 지금은 충격이 크겠지.’
여기서 짚어 볼 것은 요한이 가니온의 진명을 아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소실된 트리스탄의 제국어를 이 정도로 유창하게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요한의 회귀 전 상황을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거, 요한은 전장을 전전하다 뇌전의 마나를 각성하고 아바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초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요한의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였고 어지간한 원소의 마나 사용자들조차 요한을 당해 내지 못할 만큼 요한은 강해졌다.
헥토르는 그런 요한의 힘이 탐났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왕국의 귀족 출신. 밥을 주고, 돈을 줘서 싸울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자신들에게 완벽한 충성을 바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가족을 만들어 주는 것.
황실의 직계 황녀를 요한과 결혼시켜 그를 황가에 편입하고, 황실의 예절과 언어, 가치관 등을 철저히 심어 주어 완벽히 황가의 사람으로 세뇌시키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황가의 일원이 되었다고 착각한 요한은 헥토르와 마찬가지로 당시 황제 직속의 특수 공작 및 전투 부대 ‘소드 아너’의 일원이 되어 헥토르와 함께 제국을 위해서 무한의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결국 사냥개는 사냥개였던 거지. 고귀한 황실의 핏줄은 될 수 없었던…….’
아내가 피임약을 먹어 임신을 피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고귀한 혈통이 아닌, 노예의 핏줄은 가질 수 없었다는 게 아내의 변명이었다.
아쉬울 건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뇌전의 마나를 포함한 원소의 마나는 유전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요한의 세상은 무너졌다. 그렇게 요한은 믿었던 아내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맞아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악몽 같았던 과거가 지금 요한에게는 뇌전의 마나보다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툭.
요한은 품속에서 메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그것을 확인한 가니온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메달 오브 소드?’
미스릴 코인에 양각된 검은 사자와 트리스탄 황실기가 교차한 중앙에 금빛 검이 조각된 동전.
이것이야말로 소드 아너의 증표였다.
다만 이것은 요한이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만든 가짜였다.
하지만 애초에 소드 아너라는 존재를 아는 이들 또한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위조했을 거란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가니온이었다.
“감히 위대한 검을 알아보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소서!”
명예의 검, 또는 위대한 검이라는 별칭으로 칭송받는 소드 아너답게 가니온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했다.
방계 혈족인 자신들은 막말로 황실의 피만 타고났을 뿐, 황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귀족들에게 불과했다.
그러나 소드 아너에 입단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능력 있는 직계 황족의 남성뿐이었다.
물론 요한 같은 예외도 존재했지만 그건 요한이기에 가능한 예외였을 뿐, 그를 제외한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정도 가치가 있으니 요한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고.
다시 돌아가 직계 황가의 남성도 최저 요건일 뿐이었다. 다방면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소드 아너의 문턱도 넘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드 아너는 그 자체로 황위 계승권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과거 트리스탄 제국이 대륙을 일통하고도 스스로 포기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황위 계승권 다툼이었다.
소드 아너는 그 실패에서 배우고 보완한 제도였다. 즉, 소드 아너에 들지 못하면 과거와 다르게 아무리 직계 황가의 남성이라도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제국 귀족이나 다름없는 방계 혈족 출신의 가니온이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소드 아너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드 아너는 이름, 나이를 감추고 한 명의 위대한 검으로서 오로지 본신의 능력만으로 스스로가 황위 계승자에 걸맞은 존재임을 증명한다. 그것이 소드 아너의 사명이다.”
스르릉.
말을 뱉는 도중에 요한은 옆구리에 걸려 있던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과정 중에 어떠한 외부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된다. 특히, 임페리얼 섀도와의 접촉은 엄금한다. 만약 감사관에게 이 사실이 발각될 경우…… 접촉한 소드 아너와 임페리얼 섀도를 즉결 처형한다.”
흠칫!
꿀꺽…….
칼날이 자신의 목젖에 닿자 가니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본인 역시 오러 마스터에 이른 검의 절대 강자였지만 소드 아너의 검 앞에서는 한낱 평민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저, 전하…….”
“가니온, 네 능력은 확실히 뛰어나다. 이 벨로반 왕국에서 영광스러운 그림자들의 수장을 맡기에 합당한 능력자지. 그 능력은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네놈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어.”
요한은 검면을 슬쩍 들어 가니온의 턱을 받쳐 들었다. 그의 구레나룻에서 흐른 땀 한 방울이 턱 선을 타고 검면에 떨어졌다.
“너는 내가 이루려는 업적을 의심하고, 조사하고, 방해했다. 구르칸 산맥에서 내 유용한 체스말로 사용하려 했던 하워드를 암살하고 오크들의 짓으로 위장해 내가 준비한 교역로 사업을 무너트리려 했을 때는 그야말로 살의가 끓어오르더군.”
“죄, 죄송합니다! 전하, 우매한 속하가 전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살기 가득한 말에 가니온은 눈을 질끈 감고 변명했다.
여기서 가니온이 요한을 죽여 살인멸구 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죽음을 각오하는 건 그런 일이 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니온을 비롯한 그림자들은 황실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수백 년을 버텨 온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황위 계승권자들인 소드 아너는 능력 있는 직계 황족을 넘어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벨로반 왕국의 미천한 놈들 앞에서 감히 내 얼굴을 공개하려 해? 정녕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소드 아너에게 정체를 들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녕 네놈이 몰라서 그런 짓을 꾸민 게냐?”
“겨, 결코! 맹세코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우매한 속하가 전하의 정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해 저지른 불충! 만약 그 죄를 물으신다면 달게 받도록 하겠나이다.”
정말로 죽음을 기다리는 가니온의 모습에 요한은 속으로 그를 실컷 비웃어 주었다.
‘이 녀석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물 한 잔 마시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이렇게 죽이기는 아까운 놈이지. 실컷 써먹고, 필요 없어지면 그때 처분해도 늦지 않아. 그러고 보니 이 방식도 제국에게 배운 셈인가?’
어쩐지 가니온의 모습에서 단두대에 목이 걸린 자신이 겹쳐 보였지만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제국이었으니 인과응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내 정체가 궁금하더냐? 원한다면 네놈에게는 보여 주마. 내 정체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 나를 방해한 것이 아니더냐?”
요한이 어깃장을 부리며 가면을 손으로 가져가자 화들짝 놀란 가니온이 고개를 조아리며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드 아너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큰 대역죄인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 두 눈을 도려내 주십시오! 전하!”
이 정도 했으면 요한은 더 이상 가니온이 자신의 가면 속 진짜 얼굴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타이밍이 좋았어. 만약 회귀한 직후, 처음부터 이자를 찾아와 이 방법을 썼다면 분명히 내 정체를 의심했겠지.’
지금의 상황 모두 요한이 꾸민 게 아닌, 그가 요한을 의심하고, 조사하고, 방해하면서 자처한 일이다. 당연히 그가 지금 요한의 정체를 의심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만약 처음부터 메달 오브 소드를 가지고 찾아와 소드 아너라고 밝혔으면 아무리 황실 말을 하고 메달을 보여 줬어도 분명 가니온은 요한의 정체를 의심했을 터였다.
요한은 검을 거두며 자리에 앉았다.
“네 충심을 인정한다. 네 능력도 인정한다. 그리고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도 인정한다. 내 형제들은 멍청하게도 눈앞의 이익과 업적에만 눈이 멀어 폐하의 눈길이 닿는 제국 근처에서만 활동하고 있으니까.”
다른 소드 아너들의 근황까지 얘기하자 그렇지 않아도 의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던 가니온의 눈동자에는 이제 확신의 빛까지 보였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소드 아너라 확신해도 의문은 있었다.
“한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찾아와 어떤 업적을 이루시려는지요? 혹, 그 업적이 진행하고 계신 구르칸 산맥 교역로와 큰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 트리스탄 제국의 영광스러운 통일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 구르칸 산맥 교역로는 그 즉시 제국군의 군사 및 물자 운송로로 사용되게 될 것이다. 그 가치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한가?”
“……!”
가니온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치켜들더니 크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래, 만약 구르칸 산맥 교역로가 개발되어 제국군의 운송로로 쓸 수만 있다면 벨로반을 비롯한 남부 왕국 정벌에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다!’
남부 왕국들은 제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만큼 그 영향력이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 약하고 반항도 거셀 수밖에 없다는 게 가니온의 생각이었다.
제국 주변에는 가니온과 같은 위치의 그림자들이 많았지만 남부 왕국들 중에서는 그 혼자뿐이라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었다.
하지만 구르칸 산맥 교역로가 개발되고 제국군이 그곳을 통해 남부로 내려올 수 있다면 훨씬 빠르게, 더 적은 희생으로 남부 왕국들을 정벌 할 수 있을 터였다.
“하면 특별하게 더러운 오크 놈들과 협상을 맺은 이유도 혹시 있으신지요?”
“오크 놈들은 신의가 깊지만 생각이 얕은 멍청한 놈들이다. 녀석들을 이용해서 제국의 적을 한 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더냐? 적들의 수도 줄고, 오크 놈들의 숫자도 줄어들 테니 나중에 정리하게도 쉬울 테고. 괜히 놈들을 치는데 우리 고귀한 제국군의 피를 흘릴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지당하신 말씀이오, 훌륭하신 판단이시옵니다! 과연…… 소드 아너의 지모는 감히 저 같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통감하나이다.”
그에 요한이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 가니온 너 역시 충분히 훌륭하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트리스탄의 후손들이 아니더냐? 제국을 위하는 충심은 우리 모두 같으니 괜찮다면 나를 도와 다오. 지켜본 바, 다행히 이곳까지는 감사원이 파견되지 않은 모양이니 당분간 그 점을 이용해야겠다.”
“제, 제가 전하를 도와도 되겠사옵니까.”
“물론. 만약 네 도움으로 내가 황위를 계승하는 데 큰 진전이 생긴다면 그 은혜는 훗날, 내가 옥좌에 오른 뒤 반드시 갚도록 하지. 어디 보자…… 이 나라의 제후 정도면 어떻겠느냐?”
“……!”
본래 제후의 자리는 방계가 꿈도 꿀 수 없는 것.
그 자리를 약속하는 요한의 모습에 가니온은 고개를 땅에 박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쿵!
“속하, 가니온 발코르 트리스탄! 전하께 제 운명을 맡길 것이옵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