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루비리드의 결단
“거, 거래요?”
“그게 무슨 황당한…….”
“인간 따위가 우리에게 거래를 청할 깜냥이 된답니까? 당장 노예로 팔려 간 우리 동족들을 해방하고 머리가 닳도록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허탈함, 황당함, 분노, 역정 등의 감정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예상했던 장로들의 반응에 루비리드는 천천히 그들을 진정시켰다.
“고정들 하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아무리 그래도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대장로님께서 왜 그런 뻔뻔한 인간의 서신 때문에 저희들을 소집하신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서신을 당장 찢어 불에 태워 버렸을 겁니다.”
“맞습니다! 추악한 인간의 거래 따위, 들을 가치도 없지요!”
장로들의 반응에 루비리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에 대한 바닥없는 증오를 그녀라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 또한 인간이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였다.
엘프들의 대장로이자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루비리드와 인간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루비리드는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에드뮈엘 경비대장이 보기에는 어땠습니까? 그 인간은 우리에게 거래를 운운할 정도로 능력이 확실해 보이던가요?”
“정찰대원 넬사의 증언 외에도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는 거라면 뭐라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요? 그게 뭐죠?”
“그자가 움직일 때, 한순간 푸른 불꽃도 아닌 것이 마치 번개가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사라진 그자의 움직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분명 놓치지 않고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 앞에 서 있었……. 응?”
설명을 하다 말고 묘한 시선이 의식되자 에드뮈엘은 고개를 들어 좌중을 훑어보았다.
“왜, 왜들 그러십니까?”
침이 흐르지 않을까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턱을 벌리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에 에드뮈엘은 부담감을 느끼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두나스 장로가 그에게 다급히 되물었다.
“바, 방금 푸른 번개가 꽃처럼 피었다고 했나? 그자가 움직였을 때 푸른 번개가 피어났다고?”
“예? 아, 예……. 그러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제게 접근을…….”
“당장 정찰대원 넬사를 호출하게! 지금 당장! 어서!”
그렇게 회의장을 찾아온 넬사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장로들에게 자신이 봤던 전투 상황을 증언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의 머리 위에 스로잉 나이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둥실둥실 떠 있다가 푸른 번개가 꽃피면서 동시에 사라졌다고?”
“네! 그거야 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습니다. 정작 인간은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노예 사냥꾼 놈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더라니까요? 그게 얼마나 속이 시원했던지…….”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군.”
“그러게 말일세.”
장로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표정을 굳히자 상황을 알 리 없는 에드뮈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로님들은 그자의 정체를 아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루비리드가 대신했다.
“에드뮈엘 경비대장은 아바타라는 존재에 대해 아시나요?”
“아바타요? 그게 뭡니까?”
“아바타는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사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는 건 신의 권능이라고 불리는 뇌전의 마나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죠.”
“뇌전의 마나라면…… 설마?”
화들짝 놀라는 에드뮈엘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대의 생각이 맞습니다. 두 사람의 증언대로라면 그는 아바타…… 즉, 뇌전의 마나의 주인이라 할 수 있겠죠. 원소의 마나의 왕이라 불리는 그 강력한 힘의 주인 말입니다.”
거짓일 리 없었다.
하이 엘프는 진실을 투영하고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존재.
에드뮈엘과 넬사의 말에는 그 어떤 거짓도, 과장도 들어 있지 않음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무 말도 없다는 것 덕분에 장로들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그자는 어쩌고 있나?”
“그 자리에서 대기 중입니다. 현재 제 부하들이 감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 장로의 물음에 에드뮈엘이 답했다.
“아직까지 그쪽에서 별다른 소란이 없는 걸 보면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아바타의 요구 사항이 무엇입니까, 대장로님?”
방금 전까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발대발하던 장로들이 상대가 아바타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만으로 태도가 확 달라졌다.
그 모습에 루비리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서신의 내용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우리가 가진 ‘정령의 눈물’을 요구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하는군요.”
“저, 정령의 눈물을 그자가 어떻게 알고……!”
‘정령의 눈물? 그게 뭐지?’
에드뮈엘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정령의 눈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령의 눈물에 관한 사항은 극비 중의 극비 사항이었다.
일반 엘프들은 정령의 눈물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장로라 해도 정령의 눈물이 언제 열리는지, 어디에 보관 중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예로 붙잡혀 간 동족들을 통해 알게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노예로 끌려간 장로 엘프는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그자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직접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간악한 인간의 무엇을 믿고 엘라임까지 그를 초대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는 아바타로 추정되는 인물이 아닙니까? 그런 위험한 인물을 엘라임에 이곳으로 불러들인다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대장로님!”
“맞습니다! 만약 대장로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엘라임을 수호하고 있는 결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재고하여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루비리드의 결단에 약속이라도 한 듯 장로들 중 일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뜯어말렸다.
그들의 말로 일리는 있었다.
루비리드는 엘라임의 관리자임과 동시에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힘으로 유지중인 수호의 결계 덕분에 이곳이 인간들의 이목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다.
“장로분들의 말처럼 제 힘으로 이곳 엘라임을 수호할 수 있는 걸 크나큰 영광이라 생각함과 동시에 제 힘이 부족하여 이 숲 전체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후회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부족한 제 힘조차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이윽고 언젠가는 엘라임조차 지키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로님! 그런 일은 결코……!”
“어허! 이 무슨 무엄한 짓인가. 조용히 하고 대장로님의 말씀을 끝까지 경청하세.”
두나스의 일갈에 다른 장로가 입을 다물자 루비리드가 살짝 두나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해서 저는 제 힘이 완전히 다 하기 전에 인간들과의 전쟁을 끝낼 방법을 매일같이 고민해 왔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었죠…….”
“차라리 지금이라도 엘븐 글로리아에 지원군을 요청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느 장로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엘븐 글로리아의 지원군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최소 세 개의 인간 왕국을 무사히 넘어야만 합니다. 그런 일은 현재로선 불가능하죠. 하지만 지금……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바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자가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호적인 목적으로 저희를 찾아왔다면 분명 교섭의 여지가 있으리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절대 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바타의 능력이라면 분명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장로 도셉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간을 너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저희는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대장로님.”
“도셉 장로의 말씀도 옳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어도 그때는 반드시 옵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겠죠. 그래서 두나스 장로와 도셉 장로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 대신 아바타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만나고 싶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방금 전, 장로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두 사람도 잘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대장로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저 역시 대장로의 뜻을 따르도록 하죠.”
두나스가 친 루비리드 장로들의 대표라면, 도셉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의 대표였다.
두 대표가 함께 같은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면 보다 객관적인 해답이 나올 것이라 그녀는 생각한 것이다.
* * *
“하암…….”
요한은 약속한 장소에서 모로 누워 늘어지게 하품을 하였다.
전선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보여 주기엔 너무나도 태평하고 무신경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포위한 경비대 대원들도 조금씩 어깨에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좀 쉬라고 말해도 어차피 안 통하려나? 하기야, 통했어도 들어 먹었을 리가……. 응?”
그 순간, 숲 안쪽으로 시선을 집중한 요한의 눈동자에서 작은 안광이 번뜩였다.
‘왔군.’
“나 참, 오래도 기다리게 하네. 그냥 심플하게 생각하지 말이야.”
숲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노인은 두나스와 도셉이었다.
그러자 요한은 그들의 뒤쪽을 스윽 둘러보더니 말을 건넸다.
“둘만 온 거야? 병사들도 없이?”
“우리와 협상을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들었다. 그런데 병사가 필요한 이유가 어디 있지?”
“생각보다 이해력이 좋은 친구들이네. 말도 잘 통하고.”
만약 자신의 무력을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이들은 군사들을 이끌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모른 척 주변에 숨겨 둔 뒤 시치미를 뗐겠지. 하지만 기척을 아무리 넓혀 보아도 숨어 있는 군사들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바타라 추정되는 인간이 협상을 원한다기에 온 것일세.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그대는 아바타인가?”
“읏차.”
도셉의 질문에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 대신 기운을 서서히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저, 저건……!”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실명할 수도 있으니까.”
파지직, 콰릉! 콰과광!
요한의 몸에서 자잘하게 튀어 오르던 스파크가 순식간에 날뛰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전류가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요한에게 집중적으로 번개가 내리 꽂히는 듯한 형상이라 주변에 있던 엘프들은 차마 그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그만! 그쯤하면 되었네! 자네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더 없을 테니 그쯤하게! 이러다 우리 모두 다 타 죽겠어!”
“고작 이 정도로 우는소리 하기는…….”
요한이 힘을 갈무리하자 그제야 장로들과 경비대원들이 요한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아직도 남은 잔류 번개들이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 방전하는 광경은 도저히 인간으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