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우정과 믿음
부락은 이미 축제 분위기로 낮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가루칸이 하사한 술과 고기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축제 분위기가 아주 뜨거운데?”
“요 근래 배부르게 먹고 마신 적이 없었으니까. 올해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지. 그래서 사냥감들이 물을 찾아 멀리 떠났고 그 탓에 우리도 사냥이 시원치 않았다. 때문에 지금은 비축한 식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가. 괜히 미안하네.”
요한은 괜히 자신 때문에 잔치를 준비하느라 가루칸과 전사들이 무리한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함을 표했지만 아둔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상관없다. 애초에 네 녀석은 구실에 불과했을 뿐, 조만간 동포들의 허기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슨 명목으로든 잔치를 열었을 거다. 거기에 너라는 적당한 구실이 생긴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렇게 아둔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한 요한은 가루칸의 움막 앞에서 그 어느 곳보다 성대하게 차려진 잔칫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또 굉장하구먼…….”
“벗이 왔는가! 어서 이리 와 앉게.”
요한은 가루칸이 부르자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좋은 잔치에 초대해 줘서 고맙소.”
“크하하하! 이제 와서 안 어울리게 격식을 차리는가? 편하게 가루칸이라 불러라. 나도 편하게 알파라 부를 테니.”
가루칸은 요한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호방하게 웃었다.
요한도 피식 웃으며 술병을 넘겨받아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사실 나도 닭살이 돋던 참이었거든.”
“크크큭! 그럴 줄 알았지.”
가루칸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왁자지껄 떠들며 잔치를 즐기던 전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술잔을 들고 대족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가루칸은 목을 한 번 풀더니 우렁차게 소리쳤다.
“전사들은 듣거라! 우리 구르칸 오크족에게 오늘처럼 경사스러운 날은 없었다! 지금껏 우리에게 인간은 나약한 주제에 속만 시꺼먼 사악한 적에 불과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알파라는 강한 인간족의 전사가 찾아왔다!”
“알파! 알파! 알파!”
전사들이 요한의 가명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순간, 가루칸은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좌중의 이목을 휘어잡았다.
“우리 부족을 찾아오면서 그는 수많은 우리 전사들과 교전을 치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명의 목숨도 허투루 거두지 않았으며 자신의 실력과 진심을 증명했다! 전사의 의식은 또 어떤가? 내 제자들이 그의 주먹을 얻어맞고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버리는 꼬락서니를 그대들도 보았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특이한 점은 요한의 주먹에 나가 떨어졌던 제자들조차 박장대소를 했다는 것이다.
“그에 멈추지 않고 그는 나에게 도전했으며 결과적으로 나와 그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지금 전사의 의식에서 내 주먹을 한 번이라도 받아 낼 수 있는 굴강한 전사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기꺼이 상대해 줄 테니!”
사납게 외친 가루칸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전사들 모두 자신의 분수를 알고 가루칸의 힘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여기서 자신 있게 나서는 전사가 있다면 그는 겁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멍청이였겠지.
“전사의 의식은 단순히 치고받는 싸움질이 아님을 이곳에 있는 전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녀석은 나와 우리에게 자신의 실력, 배짱, 의지를 모두 증명해 보였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 사실에 불만 있는 놈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면 이 자리에서 알파가 우리의 진정한 맹우가 되었음을 나와, 우리와, 선조들께 고할 것이다! 모두 잔을 높이 들도록!”
그 말에 모두가 잔을 높이 들자 가루칸이 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네 차례다. 할 말 있나?”
“크흠! 그럼…….”
마찬가지로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보기만 해도 믿음직한 녀석들이다.
그 눈빛과 몸을 보면 얼마나 많은 수련과 실전으로 강해진 녀석들인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주 보았을 땐 그 무엇보다 두려운 적군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볼 땐 그 무엇보다 든든한 아군인가…….’
이런 녀석들이 목숨을 바쳐 따르는 가루칸은 얼마나 행복한 녀석일지…… 조금 부럽기도 했다.
“용맹한 오르크의 전사들에게 고한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요한이 씨익 웃으며 외쳤다.
“오늘 두 발로 걸어 나가는 새끼 있으면 내 손에 뒈진다. 마셔!”
와아아아아아아!
전사들은 환호하였고 이내 광란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구르칸 전사의! 용기는! 산맥보다 높고! 두 주먹은! 강철보다! 단단하다!”
“아둔이 또 노래 시작했다!”
“누가 저 새끼 끌어내려! 아니, 죽여!”
돼지 멱을 따는 아둔과 그런 아둔을 필사적으로 말리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으며 술과 고기를 입에 넣는 사람들.
무슨 영문인지 웃고 떠들다가 삽시간에 주먹이 오가며 싸움판이 벌어지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을 말릴 생각은 없고 돈을 걸며 응원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등…….
수많은 오크 군상들이 바로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중 요한의 최고 관심사는 바로 오크 셰프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요리들이었다.
얼마나 요리가 대단하길래 접시 위에 그득하던 요리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또 눈 깜빡할 사이에 채워지길 반복했다.
‘처음 보는 요리들이 많네.’
“크하하하! 신기하지? 인간들이 먹는 음식들과는 많이 다르니까. 그래도 맛은 보장하니 속는 셈치고 한번 먹어 봐.”
요한의 포크와 나이프는 가루칸의 권유가 끝나기도 전에 두툼한 정체불명의 고기를 앞 접시로 가져와 썰고 있었다.
배와 등이 만날 만큼 허기가 졌던 탓도 있지만 설명 배가 불렀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만큼 음식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가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물우물…….
그리고 입에 넣은 고기의 맛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음……!”
“어때? 맛있지? 크하하하!”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을 것 같은 육질의 부드러움, 한 번 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터져 나오는 육즙!
그리고 그 육즙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풍미가 혀와 코와 뇌를 가지고 놀더니 이내 아쉬움을 남기며 위장 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문제는 그런 음식이 눈앞의 고기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둔이 말한 게 이거였나?’
요한은 전사의 의식보다 더 치열하게 식탁 위에 쟁탈전에 참전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고기고 술이고 전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겁고 치열하기 짝이 없는 특별한 잔치의 밤이 깊어 갔다.
***
달빛조차 잠들어 버린 깊은 밤.
드르렁, 퓨우……. 드르렁, 퓨우…….
“우리 마누라. 예쁜 얼굴이 왜 이렇게 거칠어졌어. 냄새도 심하고.”
누군가는 세상모르게 코를 골면서 곯아떨어지고, 누군가는 다른 전사의 발바닥을 마누라와 착각해 뽀뽀하면서도 행복해했다.
잠든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모두가 만족스럽고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물론 주변은 개판 오 분 전이었지만.
그 가운데, 단 두 명만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차분한 모습으로 술잔을 나누었다.
요한과 가루칸이었다.
“자네, 생각보다 인기가 많더군.”
가루칸이 요한의 술잔을 채워 주며 피식 이죽거렸다.
“그러게. 하하하…….”
요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잔치가 이어지는 내내 치열하게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들던 오크족 여인들 때문이었다.
“나처럼 비실비실 인간은 취향이 아닌 거 아니었나?”
“물론 외모야 취향이 아닐 수 있지만 실력은 내가 보증한 강자가 아닌가? 동족의 여인들은 외면보다 내면을 더 중시하는 속 깊은 여성들이거든.”
“그것 참…… 괜찮은 취향이네…….”
“그중에서 자네 취향은 없던가? 아니면 아인종이라 꺼려지던가?”
아인종이라고 해서 딱히 인간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구르칸 오크족 역시 피부색이 녹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인간과 크게 다른 점은 찾기 어려웠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지금 사고 치면 진짜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참을 뿐이지. 지킬 게 생기면 아무래도 몸을 사리게 되는 법이잖아, 인간은.”
“그런가. 미안하다. 안 그런 척 하려고 해도 내 안에 자격지심이 아직 남아 있었나 보군.”
“괜찮아. 나 역시 즐거운 경험이었으니까.”
요한은 그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며 대꾸했다.
가루칸은 차오르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방금 자네가 말한 진짜 해야 할 일 말이야. 혹시 우리를 찾아온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맞아. 그걸 설명하기 전에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벨로반 왕국 크림포드 백작가의 차남, 요한 크림포드다.”
요한이 잔을 내밀며 자신을 다시금 소개하자 진지한 눈빛으로 요한을 쳐다보던 가루칸이 그와 술잔을 부딪친 후 깔끔하게 잔을 비웠다.
“보아하니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서 알파라는 가명을 쓴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이유가 있나?”
“구르칸 전사들의 의지와 용맹함은 믿는다. 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치밀함과 교활함도 믿고 있거든.”
“그렇군. 한데 그 정도로 용의주도한 녀석이 나에게만 본명을 가르쳐 주는 이유가 뭐지?”
“아무리 그래도 벗에게까지 이름을 속일 수는 없잖아. 만약 너 정도 되는 녀석이 잡혀서 내 이름을 실토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도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겠지.”
“크하하하! 누가 이 몸을 잡아다 심문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마음 푹 놓거라.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짠.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술잔을 채워준 뒤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백작가라면 인간 귀족 계급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 귀족일 텐데, 그런 가문의 자식이 어째서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온 거지? 네 녀석의 저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말을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우리 부족을 단번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신기한 것투성이라 말이야.”
“이제 와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보통 친구라고 선포하기 전에 그걸 먼저 물어보지 않나? 아무래도 순서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요한의 말에 가루칸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한 전사의 의식이다. 말은 신용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든 오크든 그 누가 됐든 마찬가지지. 하지만 주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주먹이 말을 한다고?”
요한은 자신의 주먹을 살펴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한 번도 자신이나 다른 누구의 주먹이 말 하는 걸 들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사심이 깃든 주먹은 뱀처럼 교활하다. 탐욕이 섞인 주먹은 고드름처럼 서늘하지. 겁쟁이의 주먹은 갓 태어난 아기 새의 솜털보다 가볍고, 뜻있는 자의 주먹은 대나무처럼 올곧으며, 용맹한 자의 주먹은 태양보다 뜨겁다. 그리고 나 같은 진정한 전사의 주먹은 무쇠보다 단단하지.”
가루칸은 요한의 주먹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의 주먹은 태양보다 뜨겁고 대나무처럼 올곧았다. 그리고 나만큼은 아니지만…… 뭐, 바위 정도로 단단하기는 했지. 그런 놈들은 신용할 수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제자들도 모두 나와 비슷하게 느꼈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인정했다고 해도 전사들은 결코 너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가? 오르크의 전사들은 대단하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주먹의 목소리는 듣지 못할 것 같거든. 아무튼 나는 내 주먹한테 감사하면 된다 이건가?”
“그런 거지. 그런데 아직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만.”
“믿지 못할 얘기를 하게 될 텐데, 그래도 들어 볼래?”
“물론.”
요한은 자신이 회귀자이며 회귀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회귀한 지금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가루칸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가루칸은 그 얘기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아침 해가 밝아 오기 시작했다.
“네놈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요한.”
얘기가 끝나자 가루칸은 술병에 들어 있는 마지막 술 한 잔을 요한의 술잔에 채웠다.
요한은 차오르는 술잔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그렸다.
“믿어 달라고 말해 놓고 얼떨떨하긴 하네. 이렇게 쉽게 믿어 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거든.”
“벗이 믿어 달라 하였고 나는 믿겠다고 했다. 여기에 의심이 끼어들 자리가 있나?”
두 사람은 마지막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나누었다.
마지막 술잔을 깔끔하게 비운 요한은 일어나 가루칸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다…….”
자신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그의 목소리가 전사의 의식에서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요한의 목소리와 겹쳐서 들렸다.
‘그랬군. 그래서…….’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과에 진심이 전해졌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그가 어째서 바깥세상과 단절된 구르칸 오크족의 언어와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인지, 왜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찾아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것인지 모두 이해가 되었다.
이해하고 보니 더 잘 보였다, 요한의 절박한 심정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하지 마라. 네가 회귀 전에 나를 죽이고, 우리 부족을 몰살시켰던 일은 나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아니,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이지. 그걸 막기 위해서 지금의 너와 나는 이렇듯 술잔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벗이여.”
피식.
“듣고 보니 그러네. 고맙다, 친구.”
짠.
예정되어 있던 미래는 조금씩 지워지며 그렇게 새로운 역사가 그려지고 있었다.
< 회귀한 도련님이 살아가는 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