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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외전 3 호랑이 보러 가자 (3) (126/127)


126화. 외전 3 호랑이 보러 가자 (3)
2022.06.14.


한 번도 제 딸을 이겨 본 적 없다던 태후처럼, 아델도 완고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버티고 서서 자기가 왜 고트로프에 가고 싶은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직은 어려서 홀로 가면 안 된다고 말하니 할머님이 함께 가시니 괜찮지 않냐고 되받아쳤고, 그럼 수업은 어찌할 것이냐 물으니 매일 해야 할 과제를 조금도 빠짐없이 해 오겠다 답했다.

그리하여 결국 소녀는 승리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후가 아델을 향해 거보라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시녀장을 불러 명했다.


“어서 고트로프에 사람을 보내거라. 내 손녀가 방문할 것이니 아예 궁을 하나 통째로 비워 꾸며 두라고. 돌아가는 여정 동안 엘라가 쓸 물건과 음식도 잔뜩 준비하도록 하고.”

 

 

* * *



“엄마 아빠,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선물 사 올게!!!”

여덟 살 인생이 무료하고 지겹다던 소녀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어 붕붕 흔들어 댔지만, 아델은 심란한 얼굴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엘라와 이렇게까지 의견이 갈린 것은 처음이었다.

엘라는 활달하긴 해도 제 어미의 말은 곧장 듣는 아이였고, 무엇보다 아델이 그간 마법사단을 이끌고 탑을 파괴하러 에흐몬트 전역을 돌아다니느라 딸과 함께할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한 탓도 있었다.

아무리 타이르고 얼러도 딸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자, 아델은 어린 딸과 싸워서라도 기어이 굴복시키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태후가 그녀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그것이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원망스러웠으면서도, 그녀의 안에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똑같은 성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델, 엘라가 고트로프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엘라에게 고트로프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나라잖아. 엘라,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지?’

아내와 딸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해 준 리오넬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엘라와 크게 감정싸움을 했을지도 모른다.

리오넬은 마차가 사라진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델의 등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무 심란해하지 마. 엘라는 잘 해낼 거야.”

“그것도 걱정되지만, 그냥…… 나도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구나 싶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루시오는 아직 후사가 없어. 그리고 엘라는 고트로프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어머니는 자기 외손녀를 끔찍이도 이뻐하고.”

루시오의 배려로 아델은 고트로프 황녀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잃지 않았다.

루시오에게 아직 후사가 없으니, 그녀는 고트로프의 제1 황위 계승권자인 셈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의 아이들 역시 황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아델이 리오넬과 결혼한 후 지금껏 단 한 번도 고트로프를 방문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 심지어 지금은 정치권에서 한발 물러섰다고는 하지만 태후가 전에 없이 낯선 모습으로 제 외손녀를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까지 보인다면, 어떤 불순한 세력의 표적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루시오의 아이가 태어나서 후계 구도가 공고해지면 편안해진 마음으로 가족 여행을 가려 했는데.

리오넬은 똑같은 얼굴로 공방을 벌이던 딸과 아내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아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럼 우리가 따라가면 되지. 우리 가족 모두가 루시오 폐하를 지지한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 주면 되잖아?”

아델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돌아보며 타박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다녀오는 데 족히 다섯 달은 걸려. 그때까지 당신이랑 나랑 둘 다 자리를 어떻게 비워?”

“당신도 나도 그동안 에흐몬트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잖아. 이제 탑도 거의 정리되어 가고, 엘리자베타 폐하의 치세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어. 우리가 잠시 없다고 무너질 거라면, 애초부터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아니, 그래도…….”

“엘라가 오는 날까지 노심초사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아. 그리고 우리도 이제 휴가를 받을 때가 됐지. 폐하께 허락은 내가 받아 올게.”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녀의 남편은 정말로 황제의 인가를 받아 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델. 집사에게도 짐을 꾸리라고 일러뒀어.”

“마법사단의 일은 어떻게 하고?”

“알렉사 경이 잘 다녀오시라 전해 달라던데? 단장님도 좀 쉬실 때가 되었다면서.”

리오넬은 얼떨떨해하는 아델의 어깨를 끌어안아 부드럽게 이끌었다.


“나도 고트로프에 가 보고 싶다고 한 거, 기억나?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산야를 소개해 줘. 알렉, 너도 어서 여행 준비를 하렴!”

알렉산더도 아버지의 말에 어쩐지 설레는 얼굴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후작 일가의 여행에 후작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리오넬은 크게 준비해 갈 것은 없다고 사용인들을 다독였다.

고트로프 태후와 함께하는 여정인데다 태후가 손녀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참이니 세 식구가 더해진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터였다.

그리하여 앞서 출발한 태후와 엘라를 반나절 만에 따라잡은 세 사람은 고트로프로 향하는 배에 함께 몸을 실었다.

* * *

한편, 고트로프.

태후의 서신이 루시오에게 도착한 것은 중신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냉소적인 얼굴로 모후의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어 내리던 황제의 표정이 어느 순간 확 밝아졌다.

태후를 꼭 빼닮아 늘 얼음장같이 고고하고 차가운 황제가 드물게도 표정을 드러내는 건, 작년에 혼인한 황후가 곁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사이도 별로 좋지 않은 모후의 서신을 읽고 저리 반가운 표정을 짓다니?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모두가 의아하게 눈알을 굴리는 가운데 테오도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황제는 그제야 서신을 접으며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입술 끝이 자꾸만 치솟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폐하?”

기벨린까지 몸을 반쯤 일으키자, 황제는 황급히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엘리노어 위버링겐 헤르베르트.”

“?”

“내 조카가 모후와 함께 고트로프에 온다는군.”

자꾸만 입이 벙싯 벌어져서 루시오는 손으로 턱과 입을 쓸듯 감싸 쥔 채 웃음을 참았다.

루시오 역시 누이와 꼭 닮았다는 제 조카가 그립고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가끔 에흐몬트를 찾는 모후와는 달리 그는 고트로프를 다스리느라 조카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지 않았나.


“하하하, 엘리노어 아가씨가 오신다 이거지요? 음! 무슨 선물을 사야 하나?”

기벨린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맞은 편에 앉은 카인을 슬쩍 쳐다봤다.

시간은 때론 잔인하고 때론 자비로운 법. 아델라이드란 이름이 여전히 카인의 가슴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지 기벨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간 전부를 앗아 가진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델이 그렇게 떠나고 카인은 또다시 대나무 숲에 틀어박혔지만, 결국에는 슬픔을 털고 일어나 제 발로 세상으로 걸어 나왔으니.

카인 녹스 역시 온화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녹스도 준비를 돕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루시오를 기쁘게 할 서신이 한 통 더 도착했다.


“아델 누님도 고트로프에 함께 오신다는군! 알렉산더와 리오넬 헤르베르트까지 데리고 말이야!”

갑작스러운 황녀 가족의 방문 소식에, 고트로프 황궁은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마치 소년처럼 설렌 얼굴로 어린 조카들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며 아델라이드가 황녀 시절 머물렀던 궁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황후와 함께 조카들이 쓸 물건을 직접 고르고, 하다못해 커튼 하나까지도 까다롭게 신경을 쏟았다.

정작 황태자였던 소년 시절에도 그렇게 들뜬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기벨린과 테오도르, 카인을 비롯한 측근들뿐 아니라 황궁 사람들 모두가 기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진두지휘하에 아델이 사용했던 궁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그리하여 황궁 사용인들이 “우리 폐하도 사람이셨어.” 하고 수군거릴 무렵, 황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누이의 가족이 고트로프 항구에 도착했다.

* * *

배가 진동하며 멈추자 엘라의 작은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앞에 울창한 산림이 쏟아질 듯 펼쳐져 있었다.

엘라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바다에 인접한 커다란 산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 저게 산이란 건가요?”

알렉 역시 평소와 달리 상기된 표정으로 고트로프의 산림을 바라보았다.

잔뜩 들떠 신이 난 손주들의 모습에 태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산이고, 이곳은 고트로프란다.”

산을 타고 넘어온 여름 바람이 소녀의 코끝을 향기롭게 파고들었다.

알렉의 손을 잡고 있던 리오넬도 푸르게 펼쳐진 고트로프의 산림을 아로새기듯 눈에 담았다.


‘너는 본 적이 있나? 그분이 고트로프 산야를 달릴 때 어떤 얼굴을 하시는지?’

언젠가 어둑한 복도에서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아름다운 사내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 어린 아델은 제 친우들과 함께 거침없이 말을 달렸을 것이다.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자신만만하고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틀어 곁을 바라보자, 눈 앞에 펼쳐진 고국의 풍경을 찬찬히 시선으로 훑는 아델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의 눈에 서린 애틋함이 리오넬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곳. 그녀가 무엇보다 사랑했던 그녀의 땅. 그녀는 그 모두를 뒤로한 채 그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로 왔다. 늘 사무치게 감사한 그 사실이 새삼 절절히 가슴을 울렸다.

리오넬은 아델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고트로프에서 당신 향기가 나.”

그의 속삭임에 아델이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이윽고 배와 부두 사이에 교량이 설치되자 태후가 친히 엘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자, 내리자꾸나.”

여정 동안 손주들을 통해 전에 없던 혈육의 정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태후는 아이들에게 모기 한 마리라도 붙을까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를 아는 모두에게는 매우, 아주, 대단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황제와 함께 나온 기벨린은 불쑥 나타난 작은 아델을 보고 눈을 치떴다가, 더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소녀를 이끄는 태후를 보고는 두 눈을 비볐다. 테오도르나 카인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제 어머니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루시오가 간결한 인사를 건넸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그래요, 황제. 오랜만이군요.”

서로를 향한 태후와 황제의 눈길은 여전히 서릿발처럼 매섭고 서늘했지만, 엘리노어를 바라보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봄날 훈풍이 분 듯 온화하고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루시오는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금안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첫째 조카인 알렉도 예쁘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린 시절의 누이를 쏙 빼닮은 소녀는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엘라도 어머니와 닮아 초면임에도 익숙한 외숙을 향해 싱긋 웃으면서 할머니와 배에서 연습한 대로 고트로프식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엘리노어 위버링겐 헤르베르트라 합니다.”

크으. 귀여워!

입까지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열렬히 지켜보던 기벨린이 탄식하며 몰래 손뼉을 쳤다.


“저렇게 귀여운 딸 하나 낳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인데!”

“그러다 아들만 셋이 됐잖나. 덩치는 벌써 아버지처럼 커다란.”

“…….”

테오도르의 일침에 기벨린은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뵙고 싶었어요!”

앙증맞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엘라의 솔직한 고백에 루시오가 크게 기뻐하며 서슴없이 무릎을 굽혀 소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나도 네가 무척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엘라.”

엘라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마주 안아 주었다.


 
루시오가 제 어머니를 보며 놀랐던 것처럼 태후 역시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후의 등 뒤에서 아델이 리오넬, 알렉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루시오는 엘라를 안았던 손을 풀고 몸을 일으켜 오랜만에 마주하는 누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누님.”

아델은 동생의 다정한 부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포옹했다. 루시오도 응석을 부리듯 커다란 몸을 구부려 그립던 누이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았다.


“잘 지냈니?”

“좀 자주 오시지 않고요.”

동생의 투정 아닌 투정에 아델은 루시오의 어깨를 놓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잊고 있었다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니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늘 고국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에 닿는 푸른 녹음, 익숙한 사람들과 특유의 향기가 아델의 가슴을 뭉근하게 데웠다.

홀로 훌쩍 떠났던 고향에 비로소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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