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2)
(125/127)
125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2)
(125/127)
125화. 외전4. 호랑이 보러 가자 (2)
2022.06.11.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 듯,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엘라는 따분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모두 황궁으로 갔고, 또 그녀만 저택에 남은 참이다. 에흐몬트 황립 아카데미는 열 살이 되어야 입학할 수 있어서, 그녀는 지겨운 저택에서 늘 같은 선생님들과 공부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겨워.”
통통한 볼을 잔뜩 부풀리는 어린 아가씨에게 시녀들이 아기자기한 공단 인형을 슬그머니 내밀었지만, 엘라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딸이 없어서 그런지 유난히 엘라를 아끼는 테세우스는 가을이 되었다고 엘라에게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인형을 몇 개나 선물해 주었다.
엘라 역시 백부인 테세우스를 무척 따르며 좋아했으나, 인형만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늘 예의 바르게 감사하다 인사를 했지만 말이다.
“난 도대체 언제 크는 거야?”
“시간은 금방 흘러요.”
“아닌데. 나만 안 크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지겨우세요?”
“응. 정말이지 지겨워. 뭔가 재미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어.”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금빛 눈동자가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놀랍게도 소녀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우아하고 위엄 넘치는 외할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 * *
에흐몬트의 황태자 레온하르트, 줄여서 레오의 눈동자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황궁을 가로지르는 고트로프의 태후와 제 숙모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최근 숙모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 무례인 줄 알면서도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부모님도 물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시지만, 소년의 눈엔 긴 검을 들고 말을 달려 광야를 가로지르는 숙모의 모습이 황홀하게 비쳤던 것이다. 막연히 맹수를 떠오르게 하는 압도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그랬는데, 숙모님과 저토록 닮은 사람이 있었다니! 게다가 어찌나 위엄 넘치는지, 황제인 어머니까지도 내심 긴장을 하신 것 같았다.
문득 알렉의 반응이 궁금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봤지만, 그의 사촌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
“예, 전하.”
“고트로프의 태후께서는 무섭지 않으신가?”
알렉은 잠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외조모님께서 엄하다 한들, 전하께 감히 꾸중하실 수는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건 그러네.”
두 소년이 서로를 마주 보는 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태후가 멈춰 섰다. 엘리자베타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환대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태후 역시 우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화답했다.
“매번 올 때마다 환대해 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후는 황제 곁에 서 있던 대공에게도 몇 마디를 덧붙인 뒤, 한 걸음 나온 레온하르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태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그녀가 숙모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델은 빈말로도 온기 넘친다고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인간미가 없지는 않았다. 반면 태후는 오금이 저릴 만큼 차고 날카로운 쇠붙이 같았다.
레오가 예의를 차린 다음 얼른 뒤로 물러나자, 태후는 예의상 딸과 사위를 일별한 뒤 곧장 알렉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쇠붙이처럼 온정 없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손자를 바라보는 태후의 눈빛은 마치 혹한 속에서 벙근 유일한 생명을 대하는 양 온화하기만 했다.
“알렉산더. 오랜만이구나.”
목소리는 또 어찌나 다정한지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는 레오가 괜히 서운해질 지경이었다.
아델 또한 모후가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적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저 음성이 어머니의 것이라니. 눈빛은 또 어떻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할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렉이 슬쩍 웃으며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올리자 태후도 우아한 웃음을 터트리며 소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한편, 열 살 소년의 정중하고 의젓한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테세우스가 리오넬을 돌아보았다. 리오넬은 어쩐지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형의 눈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뭐?
“위버링겐 백작께 매일 감사하며 살아라.”
“…….”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매번 네 어린 시절과 알렉을 비교하시며 백작을 칭찬하셨을 거야.”
“……형, 그만해.”
리오넬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고, 곁에 있던 아델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깨물었다.
* * *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서도 태후의 눈길은 딸과 사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손주에게만 꽂혀 있었다.
“하하하, 영특하구나! 아주 영특해!”
태후는 알렉산더가 올해 황립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서 수석을 했다는 말을 듣고서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델은 아무래도 그런 어머니가 낯설었다. 딸이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그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수고했다고만 하시던 어머니였다. 그랬던 그녀가 저토록 웃으며 기뻐하다니?
할머니의 칭찬이 좋은지 드물게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쑥스러워하는 손자의 모습에 태후의 가슴이 술렁였다.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는 제 자식들을 키우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여운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낯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다니!
태후는 리오넬과 알렉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렉이 부모의 좋은 점만 골라 닮았군.”
리오넬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제 단점을 닮지 않아 다행이지요. 물론 아델에게선 안 좋은 점을 찾긴 힘들지만 말입니다, 어머님.”
“…….”
“…….”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조손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은 채 동시에 아델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남편의 찬양에 익숙해졌는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태후와 알렉은 미간을 살짝 들썩였다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어울릴 모습이었다.
알렉으로 기인했던 태후의 감동은, 불쑥 성장한 손녀를 맞이하고 더욱 커졌다.
태후는 그녀를 올려다보는 작은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곱슬기 없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보석 같은 금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하고 하얀 얼굴에 그림 같은 새카만 눈썹. 초상화로만 마주한 얼굴임에도 무척이나 낯익은 모습이다.
태후는 제가 무정한 어미라는 것을 인정했다. 죽음을 품에 안고 간 딸을 모른 척할 만큼 얄팍한 모정이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장성한 아델이나 루시오를 생각한다고 가슴이 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과거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린 것일까.
‘나도 늙어 가는 것인가.’
낯익은 소녀의 모습이 그녀의 오랜 기억을 깨웠다.
태후는 거리낌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소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어 긴 손톱이 행여나 아이의 얼굴에 상흔을 남길까 조심스레 초승달처럼 곱게 휜 검은 눈썹을 매만졌다.
‘어머니!’
그녀의 딸은 어느 순간도 제 어미의 치마폭에서 노닐었던 때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향했던 둥근 눈동자에 사랑이 흘러넘치던 순간은 분명 있었다.
딱 이 아이만 했을 때, 그녀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던 시절의 아델.
태후는 누구 앞에서도 구부려 본 적 없던 무릎을 서서히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델은 물론,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시녀장마저 깜짝 놀랄 장면이었다.
엘라의 얼굴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훑던 태후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얘야. 잘 지냈느냐?”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할머니의 음성에 엘라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길게 웃었다. 그러고는 부모님께 하듯 서슴없이 할머니의 목에 팔을 휘감고 그녀에게 안겼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태후는 갑작스럽게 품을 파고드는 손녀의 행동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듯 두 손을 어쩌지 못했지만, 이내 엘라의 등을 마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내렸다.
“그래, 엘라. 만나서 반갑구나. 내가 네 할머니란다.”
아이에게선 아주 그리운 냄새가 났다.
이제껏 그리운 줄도 몰랐던, 그리운 냄새.
* * *
아델은 문설주에 기대어 어머니와 딸을 바라보았다.
태후는 엘라를 앉혀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는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연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요, 할머니?”
“응, 그래서 말이다. 고트로프엔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호랑이가 사는데…….”
“얼마나 큰데요?”
“두 발로 일어나면 나무만큼 크고, 네 사람이 들어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지.”
“우와!”
“그 호랑이가 이 할미의 궁에 있단다.”
“정말요?!”
어쩜 이리 예쁠까.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하며, 보드라운 얼굴 하며, 어디 한 군데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 총명하기는 어찌나 총명한지! 고트로프어는 또 얼마나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전에 없던 혈육의 정이 샘솟은 태후는 자식들도 보지 못한 자애로운 얼굴로 엘라를 마주 보았다.
아델이 문을 똑똑 두드렸을 때야 조손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챘다.
“엘라. 선생님 오셨어. 어서 수업받으러 다녀오렴.”
어머니의 말에 엘라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공부하고 오면 또 이야기해 주세요.”
“그리하마. 어서 공부하고 오너라.”
소녀는 기특하게도 아쉬워하면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얼른 공부하러 달려 나갔다.
엘라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후가 문가에 기대선 딸을 일별했다. 아델은 낯선 어머니를 잠시 지켜보다 불쑥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신 건 아니에요?”
아델의 말에 태후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왜? 너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으로 네 자식들을 대하니 죽을 때가 된 것 같으니?”
“낯선 것은 사실이에요.”
딸의 솔직한 말에 태후는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늙은 모양이지.”
“…….”
“이리 와서 차 한잔 따라 보렴.”
태후는 곁에 놓인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델은 몸을 일으켜 엘라가 앉았던 곳에 앉았다. 시녀장이 잔을 놓아 주자 아델은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찻잔에 고이는 찻물을 바라보던 태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넌 참 쉽지 않은 아이였어.”
찻잔에 향했던 아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머니도 만만치 않으셨어요.”
모녀는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어른인 나와 어렸던 네가 같았겠니? 쪼그마한 게 기어이 나를 이기고 말았지.”
“아버지께선 제 그런 점이 어머니를 닮았다 하시더군요.”
“그래. 네 아버진 물러터진 사람이었으니까.”
“…….”
“한 번도 이기지 못했어, 너를. 그리고 루시오. 하아…….”
태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깊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 녀석은 너보다 한술 더 뜨더구나.”
아델은 속으로 루시오가 잘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종국에 이리 처참하게 패배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싸우지 말 것을 그랬어. 그러면 흉이나 지지 않았을 터인데.”
태후의 허탈한 말에 아델은 조소를 머금었다. 태후 역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똑같은 웃음을 입에 걸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태후는 찻잔의 차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지나가는 듯 무심한 투로 말했다.
“내 너에게 모질었지.”
찻잔을 입에 대고 있던 아델이 눈만 치켜떠 어머니를 보았지만, 태후는 시선을 모로 튼 채 고집스럽게 딸을 마주하지 않았다. 아델은 눈썹을 까딱이며 찻잔을 내려놓은 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 무심하게 답했다.
“이미 지나간 일, 가슴에 담아 두실 필요도 없어요. 늘 제가 이겼다면서요.”
딱 그녀다운 대답에 태후 역시 입술 끝을 씰룩이며 피식 웃어 버렸다.
* * *
한편, 엘라는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호랑이가 머릿속을 맴맴 맴돌아서였다.
두 발로 서면 나무만큼 크고 네 사람이 들어도 들지 못하는 짐승이라니. 얼마나 멋있을까!
게다가 할머니가 말씀해 주신 산림도 너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산이 도대체 무엇일까?! 넓디넓은 지평선만을 보고 자란 엘라는 까마득하게 높은 흙더미에 바위와 나무가 쑥쑥 박혀 있다는 ‘산’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하여 엘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할머니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등나무 아래에서 부모님, 오빠와 함께 계셨다. 엘라는 자상하게 그녀를 굽어보는 할머니를 향해 다짜고짜 소리쳤다.
“저, 고트로프에 가 보고 싶어요!! 호랑이 보러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