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4)
(120/127)
120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4)
(120/127)
120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4)
2022.05.24.
태후는 붉은 비단 소파에 기대어 앉아 공작새의 깃털이 달린 화려한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지긋지긋한 여름이 물러가고 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기분이 몹시 좋았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버들가지가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곱게 흔들렸다.
시녀들의 안마를 받으며 한껏 여유와 안락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
태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호랑이 한 마리가 우아하게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이지가 느껴지는 것이, 한눈에도 감히 한갓 짐승으로만 칭할 수 없는 영물이었다.
반쯤 누워 있던 태후가 몸을 일으켰다. 별안간 녀석을 기억해 낸 탓이다. 아주 오랜 옛날, 그녀는 저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
시녀들이 놀라 뒤로 물러난 사이, 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황금을 닮은 누런빛의 털을 가로지르는 검은 줄무늬는 산줄기를 닮아 몹시도 아름다웠다.
태후는 화려한 부채를 버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놀랍게도 호랑이가 앞발을 땅에 짚더니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태, 태후 폐하!’
‘시끄럽다!’
시녀들이 놀라 그녀를 불러 댔으나, 태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존재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호랑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네 발로 서 있어도 눈높이가 같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두려움이나 압박감보다는 그저 환희가 몰아쳤다.
‘오랜만이구나.’
가슴 저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기쁨에 온몸이 떨려 왔다. 늘 싸늘했던 그녀의 심장에 누군가 불을 지핀 것만 같았다. 태후는 호랑이를 향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호랑이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들이밀며 뺨을 비볐고, 태후는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녀석을 품에 안자 왜인지 눈물이 치밀며 가슴이 벅찼다. 그녀는 녀석을 살뜰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함께 뺨을 맞대고 속삭였다.
‘반갑다.’
태후는 번쩍 눈을 떴다.
혼몽하여 멍하니 있기를 한참, 차차 정신이 돌아왔다. 화려한 천장을 가만히 눈에 담던 그녀는 손으로 제 어깨와 가슴팍을 매만졌다.
“분명…….”
“깨셨습니까, 폐하?”
인기척을 느낀 시녀가 얼른 다가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태후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시녀는 얼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등 뒤로 넘겨 주며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그러나 태후는 그녀가 내미는 물잔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꿈결같이 중얼거렸다.
“호랑이였다.”
“꿈을 꾸셨습니까?”
“……그래.”
가슴이 저릿한 환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뺨에 닿던 부드러운 털의 감촉도 여전했다.
태후는 제 뺨을 찬찬히 쓸다가 실소했다.
“내가…… 아무래도 태몽을 꾼 것 같구나.”
“태몽이요?”
“아주 오랜만에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 몹시도 아름답고 거대한 호랑이였지.”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다는 말이 이상했으나, 시녀는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몽이라면 혹시 아델라이드 황녀 전하의 태몽이 아닐는지요?”
루시오는 아직 혼인 전이고, 태후가 제 자식도 아닌 이의 태몽을 꿀 사람도 아니니 답은 하나였다. 태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그래. 그렇겠지.
수십 년 전, 크고 아름다운 호랑이가 그녀의 꿈에 나타나 아델을 안겨 주었다.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태후는 녀석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태후는 자꾸만 저려 오는 가슴을 꾹 누르며 입술을 끌어당겼다.
녀석이 안겨 준 딸을 그토록 모질게 대해서, 더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어미를 물어다 주었다고, 이젠 그 자식까지 데려와 주었구나. ……기특하게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설핏 물기가 배어들었다.
* * *
어느 날부턴가 아델은 몹시 나른해하며 잠이 늘었다. 웬만해선 사양하는 법이 없던 엘리자베타와의 술자리마저 도저히 안 되겠다며 거절할 정도였다.
리오넬은 몹시도 걱정하며 의원에게 보이자 안달했지만, 아델은 고작 좀 졸린 것으로 진찰을 받을 게 뭐 있냐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잠 때문에 업무 보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자, 결국 아델도 의원에게 진찰을 맡겼다.
한참 동안 아델에게 이것저것을 묻던 의원은 빙그레 웃더니 리오넬을 따로 불렀다. 그러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를 꺼냈다.
“태기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태기라니?”
“산모마다 증상은 다르지만, 보통 초기엔 매우 나른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직 확진하기에는 이릅니다. 달손님이 끊겨야 하고, 좀 더 나아가서는 배가 불러 와야 확실하지요.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부터 몸 관리에 신경 쓰시도록 하십시오.”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명석한 판단으로 승리를 이끌어 냈던 리오넬마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말이었다.
리오넬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늘 단정하고 총명한 얼굴은 여전히 얼떨떨하게 흐트러진 채였다.
의원이 물러가고 나서도 리오넬은 떨리는 손으로 턱과 입을 매만지며 어지럽게 방을 서성였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아델에게 달려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나른하게 누워 있던 아델은 기어이 몸을 일으켜 입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파리한 안색을 본 리오넬이 낯을 굳히며 사용인들을 물렸다.
“리오.”
리오넬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하얗고 작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뺨을 쓸어 주는 손길이 애틋했다.
“왜, 뭐라고 하는데.”
나른한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델은 제 뺨을 훑는 커다란 손등에 손을 얹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지? 걱정 말고, 시녀들을 도로 불러 줘.”
그러나 리오넬은 대답 대신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한 품에 들어오는 가는 어깨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리오넬은 가만가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속삭였다.
“아델.”
“응?”
“오늘은 가지 마.”
“!”
몽롱한 와중에도 아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늘 편히 말하라 잔소리를 해도 고집스레 예의를 갖추던 리오넬이, 처음으로 존대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아델은 숨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이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거세게 뛰고 있었다. 아델은 기이한 불안감에 작게 떨었다.
“왜?”
어리둥절하게 묻자, 리오넬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며 두 눈을 길게 휘어 웃었다.
사무치게 사모하는 이의 안에, 그 사랑의 결실이 움텄다.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꼭 꿈인 것만 같았다.
그는 목이 메어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가 온 힘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아이가 생겼을지 모른다고 해.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지만.”
그의 속삭임에 아델의 떨림이 멎었다. 아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이?”
“응.”
“우리 아이를 가졌을지 모른다고?”
“응.”
아델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천천히 배를 매만져 보았다. 납작한 것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천천히 눈을 슴벅이는 그녀의 이마에 리오넬이 입을 맞췄다.
“사랑해.”
꽃잎처럼 달콤한 음성이 귓가로 스며들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몸이 더 나른해지는 느낌에 아델은 온몸에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댔다.
살면서 아이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트로프의 황태녀였을 때도, 국혼을 위해 황후로서 에흐몬트에 머물 때도 후계 생산은 그녀가 마땅히 짊어진 의무였으므로.
그러나 이 아이는 달랐다. 이 아이는 그녀가 사랑으로 선택한 사내와의 결실이자, 그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줄 든든한 울타리였다.
“사랑해.”
황궁에서 해야 할 일도, 황제에게 조언을 올리고 국정을 의논할 일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들이 밀려나고 그 말만 남았다.
리오넬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몸을 안아 올렸다. 아델은 그의 품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꼬리에 구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이 매달렸다.
이제 어머니가 된다는 말에 필연적으로 떠오른 것은, 얼음을 깎아 놓은 듯 냉엄한 고트로프 태후의 얼굴이었다.
황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제 손으로 딸을 황태녀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으로도 부족해, 머나먼 타국으로 내치듯 시집 보낸 모친을, 아델은 누구보다 닮았다. 그래서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그녀가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품에 안겨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나른함에 온몸을 맡기자, 달콤한 향내가 폐부로 스며들며 푹신한 솜사탕으로 온몸을 채운 듯한 충만함이 밀려들었다.
나른하게 뜬 금안에 어린 빛은, 여전히 태양 같으면서도 어느새 풍요롭게 무르익은 들녘의 색을 닮아 있었다.
* * *
아마도 그 날이었을 것이다.
아델과 엘리자베타가 나란히 임신한 것으로 모자라 산달까지 같으리란 소식에, 에흐몬트의 네 권력자는 필연적으로 대공저에서의 그 밤을 떠올렸다. 그러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긱스 부인은 연이은 희소식에 크게 기뻐했고, 이후 황궁과 후작저를 분주히 오갔다. 그녀가 굳이 후작저까지 들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아델의 건강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타는 선대 황후를 닮았는지 감사하게도 건강했다. 선대 황후는 제 입으로 임신이 체질이라 할 만큼 임신 중에 오히려 몸이 더 좋아졌었다.
드레스를 위해 체중을 관리하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자 피부에 윤이 돌며 활력이 넘쳤던 것이다.
반면 아델은 하루가 다르게 바짝바짝 말라 갔다. 유난하다고 할 정도로 입덧이 심했고, 먹질 못하니 도무지 기운을 차리지 못해서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긱스 부인은 바싹 마른 아델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조금이라도 드시고 싶은 음식을 최대한 떠올려 보세요.”
아델은 힘없는 숨을 내쉬며 피식 웃어 버렸다.
“황궁 총관리인이 이리 자꾸 오면 어쩌오.”
“그런 말씀 하지 마시고, 음식이요.”
“솔직히 모르겠소. 내내 멀미를 하는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려서.”
“그럼 맛이라도요. 음식 종류를 모르겠으면, 느끼고 싶은 맛을 떠올려 보세요. 뭐라도 좀 드셔야 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후작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 오실 거예요.”
그녀가 꿀을 탄 물로 연명한 지도 어언 한 달.
애가 닳을 대로 닳은 리오넬은 아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설령 바다 너머의 음식이라 해도 그녀가 편히 먹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배를 탈 기세였다.
아델은 여전히 납작하기만 한 배를 어루만지며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음……. 뭔가…… 새콤하면서도 달고…… 시원한 그런 맛을 느끼고 싶소.”
긱스 부인은 얼른 수첩에 아델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었다.
“언제가 드셔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
“계속해서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뭔가 짭짤하면서도 질기고. 하, 그것도 잘 모르겠소.”
모호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으나, 긱스 부인은 일단 다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새롭게 공수해 온 식자재 앞에서 주방장과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리오넬에게 달려갔다.
“후작님!”
긱스 부인의 부름에 리오넬이 고개를 틀었다. 후작 역시 제 아내 못지않게 바싹 마르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날렵한 턱이 어찌나 날카로워졌는지 베일 것만 같았다. 긱스 부인은 얼른 수첩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리오넬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첩을 확인했다. 마치 전쟁 중 공수한 극비 문서를 보는 양 매우 심각하고도 다급한 얼굴이었다.
“새콤하고 달고 시원하고, 짜고 질기고.”
곁에서 후작의 음성을 듣던 주방장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그간 리오넬의 등쌀에 시달리며 아델이 먹을 만한 음식을 궁리하고 만들어 내느라 주방장의 몰골 역시 말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맛은 널렸어요. 이건 거의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수준이에요.
긱스 부인은 다 죽어 가는 주방장을 안쓰럽게 일별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직 고트로프에서는 연락이 없습니까?”
보통 딸은 어머니를 닮기 마련이라, 아델이 저토록 힘겨워한다면 어머니인 태후도 못지않게 힘든 임신 기간을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아직 없소.”
지극히 낮은 목소리에 서린 기운이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후작의 준수한 얼굴에서 음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런데 그때, 후작저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각하! 칼뱅 백작령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칼뱅 백작령?”
그곳 사람이 올 이유가 없었던지라 리오넬이 되묻자, 집사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백작님의 임신을 축하드린다며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어찌할까요?”
그 말에 지금껏 날이 서 있던 리오넬의 표정에 한 줄기 웃음이 섞여들었다. 아델의 결혼식에도 없는 형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소박한 선물을 안겨 주었던 노신사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안 그래도 영지 재건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터인데, 꼬장꼬장한 노신사는 아델에게 조금이라도 보은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리오넬이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은 언제나 감사한 법이지. 들여라.”
“예!”
그러나 그저 ‘감사한’ 선물에 불과했던 것이, ‘감격스러운’ 선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