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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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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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외전3. 발드르 형제의 구원자 (1)
2022.05.14.
“빌어먹을 탑.”
원망스레 단어를 씹어뱉으며 긴 한숨을 내쉰 리오넬이 눈을 어스름하게 내리깐 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빌어먹을 탑.
카를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쥔 권력의 반석이었던 탑은 리오넬에겐 늘 목덜미에 겨눠진 칼날과도 같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젠 전령의 깃발이 보이기만 해도 심장이 덜컹거리며 넌더리가 났다. 황궁으로 오는 전령 모두가 제 아내를 찾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탑만 보였다 하면 위버링겐 백작을 찾을 셈인가?!’
지난날 데스포네 공작의 횡포를 견디며 마법사단의 변변한 도움 없이도 누구보다 앞장서 목숨 내놓고 탑을 파괴해 왔던 사람답지 않게, 리오넬은 아델을 찾아온 전령을 보며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그, 그래도…… 아직은 백작님께서 계셔 주셔야…….’
‘다녀올게, 리오. 걱정 말고.’
전령이 약삭빠르게도 헤르베르트 후작의 무시무시한 눈길을 피해 아델을 애처로이 바라보면. 그녀는 그의 애칭을 입에 담아 그를 달래 준 뒤 떠나갔다.
아델이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 온 세상을 태울 듯 뜨겁게 달아올랐던 계절 끝에 찬 기운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내 없이 얼마나 긴 불면의 밤을 견뎌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조차 싫었다.
부부는 거의 한 계절을 떨어져서 있었다. 거의 한 계절을!
리오넬은 눈을 질끈 감으며 집사가 따라 주는 술을 들이켰다. 술잔을 쥔 커다란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왜, 도대체 왜.”
아델은 거의 두 달 만에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가 막히게도 리오넬뿐만이 아니었다. 그중 최대 복병은 다름 아닌 그의 형수이자 제국의 황제, 엘리자베타 울리히 에흐몬트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남의 아내를 탐내시는지.”
좀처럼 술을 즐기는 법이 없는 리오넬이 이 밤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였다. 취기를 빌어 음산하게 화를 삼키는 그의 눈이 새카만 밤처럼 가라앉아 거세게 일렁였다.
그렇게 그 빌어먹을 밀주가 마시고 싶으시면 대공인 형과 대작하면 될 일 아닌가.
아델이 수도로 귀환한 날, 정작 리오넬은 애태우며 기다렸던 아내와 사람 많은 홀에서 잠시 손을 잡고 얼굴을 확인하는 정도의 시간밖에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리오!’
햇살 같은 음성이 귓가에서 아른거리는데,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궁으로 돌아온 아델을 냉큼 탈취한 엘리자베타가 리오넬에게 시종을 보내 일방적인 통보를 해 왔던 것이다.
[내 친히 위버링겐 백의 승전을 기념하여 축하하려 하네.]
“허, 그놈의 기념.”
그간 황제는 무수히 많은 ‘기념’을 핑계로 리오넬과 테세우스를 따돌린 채 위버링겐 백작과 단둘이 술잔을 기울였다.
급기야 애마의 출산을 기념한답시고 아델을 불러들였을 때는 그저 헛웃음만 흘리던 리오넬조차도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델…….”
아델라이드, 앓다 죽을 이름이여.
심지어 그녀들이 즐기는 건 독하기로 유명한 밀주 원액이었다. 곁에서 보고 있다면 적당히 만류할 테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더 애가 탔다.
그 독주가 안 그래도 산더미 같은 업무를 처리하고 원정을 다니느라 늘 과로에 시달리는 아델의 속을 얼마나 망가트릴지 생각하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리오넬은 쏟아지는 고뇌에 몸을 수그리며 아델의 이름을 하염없이 읊조리다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이사라도 가야 하나.”
그러나 밤이 깊도록 아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되기 전, 시종을 보내 오늘은 황궁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말만을 전했을 뿐.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다 허망해진 리오넬은 넓디넓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눈만 슴벅였다.
“그럼 직접 입궁하셔서 백작님을 모셔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처량한 모습을 보다 못한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리오넬이라고 왜 시도해 보지 않았겠나. 하지만 이럴 때면 황제는 비열하게도 아예 그의 알현 자체를 거부하곤 했다.
침울하게 침대에 누운 리오넬은 한참이나 애달프게 아내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더듬으며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전령과 황제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이젠 아델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으신가?”
투정처럼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그의 귓가로 흘러 불타는 가슴으로 번져 나갔다. 순식간에 커져 버린 불길이 온 심장을 살라 먹으며 재와 그을음을 시커멓게 토해 냈다.
리오넬이었다면, 아무리 황제가 붙잡았다고 해도 이런 날 그녀를 홀로 기다리게 하지 않으리라.
리오넬이었다면, 그녀가 그리워 술은커녕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신가 보군.”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그녀가 그리워서 부리는 치기 어린 투정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아델은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고, 황족으로서 개인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을 우선하여 굽어살피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어찌 그가 감히 나를 먼저 봐 달라 조를 수 있을까. 그러니 이 애타는 마음도 모두 그녀를 사랑한 그가 오롯이 가져가야 할 몫일 테다.
리오넬은 거칠게 얼굴을 훑어 내며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넓은 침대에 처참하게 늘어진 그의 모습은 지금껏 패배를 모르던 에흐몬트의 국방부 장관이라기보다는 패잔병처럼 안타까웠다.
* * *
그리고 그 무렵, 리오넬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새카맣게 타 버린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대공 테세우스였다.
테세우스는 텅 빈 부부침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실소하며 안경을 벗어 버렸다.
어쩐지 황제께서 집무실 바로 옆 방에 침대를 들인다고 하실 때부터 그토록 기분이 나쁘더라니.
그는 얼굴을 거칠게 훑어 낸 뒤 매끈한 턱을 손으로 감싸 쥔 채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황제와의 결혼 후 테세우스는 대공의 칭호를 받아 황제궁에서 살게 되었으나, 발드르 공작으로서 처리하던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황제와 공작이 처리하는 업무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이는 결국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되었으나, 이전보다 훨씬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했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우기고 우겨서 황제의 집무실에 대공의 책상을 놓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알현실을 겸하는 그곳에서 업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테세우스는 아침이면 대공저로 출근하였다가 밤이면 궁으로 복귀하는 일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사실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늦은 밤에 일이 끝날 때면, 때론 집사조차 차라리 대공저에서 하룻밤 머무시고 다음 날 환궁하시는 것이 어떠하냐 물어 왔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엘리자베타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하시네…….”
찰나라도 좋으니 온기를 나누러 달려왔건만, 그를 맞이한 것은 차게 식어 있는 거대한 침대뿐이었다.
‘실은 폐하께서 늦은 시각까지 업무를 보신 뒤, 제왕학을 공부하고 계십니다. 갑작스럽게 황위를 이어받아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도저히 허리가 아파 앉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책을 들고 침대에 잠시 누우셨다 기절하듯 잠드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엘리자베타를 찾아 집무실에 가기를 여러 차례, 결국 보다 못한 긱스 부인이 황제를 대신하여 대공에게 사정을 귀띔해 주기에 이르렀다.
잠귀가 예민해 중간에 깨 버리면 도로 잠드는 데 애를 먹는 아내를 알기에, 테세우스는 잠든 그녀 곁에 몸을 누이지도 못했다.
그저 문가에 우두커니 선 채, 곤히 잠든 엘리자베타의 윤곽을 애타는 눈으로 더듬다 몸을 돌릴 수밖에.
테세우스는 텅 빈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눈을 슴벅였다.
테세우스 역시 그녀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죽은 카를은 으레 제국의 후계자가 그러하듯 유년 시절부터 황태자로서 제왕학 등 ‘황제를 위한 학문’을 익히고 선황제를 곁에서 지켜보며 차기 황제로 키워졌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타는 그러한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황제가 되었다.
발드르 공가를 이끄는 테세우스로서도 상상할 수조차 없을 중압감이 그녀의 가녀린 등 뒤로 쏟아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중압감을 이겨 내고 훌륭한 군주가 되고자 필사적인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리즈…….”
엘리자베타, 앓다 죽을 이름이여.
테세우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아내의 이름을 읊조리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 * *
발드르 형제를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깔리게 한 두 여자는 그 무렵 우아한 자세로 마주 앉아 온화하고도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동시에 잔을 들어 올린 그들이 밀주 원액을 시원스레 들이켜자, 곁에 있던 긱스 부인이 사납게 쌍심지를 세웠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녀의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오.”
“마지막이라 했잖소.”
긱스 부인은 허리에 손을 얹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정중하게 밀주 병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것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순 두 여자의 눈빛에서 아쉬움과 서운함이 지나갔으나, 노련한 노부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술병을 치워 버렸다.
엘리자베타는 긱스 부인의 꼬장꼬장한 등을 일별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 주시오.”
아델은 물로 입을 가신 뒤, 말을 이었다.
“고트로프의 제왕학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나누어 다투게 하여 다스려라, 그리하면 모두 충성할 것이다.’”
“그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시오?”
“만고불변의 정치 기술이라는 데엔 동의합니다. 안건을 통과시킬 때, 방해되는 어느 한 집단을 악의 축인 것처럼 몰아 약간만 바람을 잡으면, 다른 집단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여 주게 되지요.”
엘리자베타는 군주의 일면을 드러내는 아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군주는 편안할 겁니다. 전면전을 펼치는 두 집단을 관망하기만 하면 일도 처리되고 충성도 따라올 테니까요. 가뜩이나 상대와 싸우고 있는데 군주의 눈 밖에 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러나 군주는 편할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는 혼란이 계속되니, 마치 내장에 달콤한 독을 쌓는 격입니다. 하니, 이번 안건에 대해서는 저라면 후자의 안을 택할 것 같습니다.”
테이블에 놓인 초가 결국 제 몸을 절반이나 녹여 촛농을 뚝뚝 떨어뜨리는 시간, 엘리자베타는 아델의 말을 뇌리에 새기듯 경청하며 지혜롭게 반짝이는 금안을 마주 보았다.
어스름한 빛을 담고도 어찌나 찬란한지 하늘의 별을 빼내어 두 눈에 박아 넣은 것 같았다.
황제의 자리에 앉은 후, 엘리자베타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산길을 오직 별빛에 의지해 걸어가는 나그네가 된 심정이었다. 매 순간 거인에게 가슴을 짓밟히는 듯한 부담감이 쏟아졌다.
‘너는 카를 울리히와 어찌 다를 것인가. 그리하여 어떤 군주가 되려 하는가.’
처음엔 그저 탑을 없애기만 하면 모든 것을 바로잡고 평화로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탑의 파괴는 황제가 해야 할 가장 당연한 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부친이었던 선대 황제 역시 그리 책임감 있고 유능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카를과 데스포네 공작의 폭정으로 인해 에흐몬트는 그야말로 안팎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황제로서 제국의 골수까지 스며든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했으며, 탑을 방치하는 동안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마저 박탈당한 백성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엘리자베타는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군주로서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만사를 제쳐 놓고 이제 와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도 나지 않지만, 황제로서의 위신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하루 종일 일에 치이다가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홀로 서적들을 뒤적이며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홀로 익히는 학문에 진척이 있을 리 없었다.
테세우스를 비롯한 유능한 참모진이 그녀를 보필하고 있다 해도, 최종적으로 판단해 결정하는 것은 황제의 몫이었다.
보통의 황제는 황태자 시절부터 선대 황제의 의사결정과정을 꽤 오랜 기간 곁에서 지켜보며 체득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엘리자베타로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의 연속이었다.
엘리자베타에겐 학문의 방향성을 잡아 줄 스승과, 의사 결정 과정을 도와줄 조언자, 더불어 그녀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느껴 본 선구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그녀의 고민을 곁에서 지켜보던 긱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위버링겐 백작에게 의견을 구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오랜 기간 고트로프의 황태녀로서 교육받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엘리자베타의 자안이 빛을 되찾은 듯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