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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3) (113/127)


113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3)
2022.04.30.


탑을 파괴했지만 하산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인지라 황녀 일행은 산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구워 대접하는 자리에서, 노인 하나가 막내아들을 장가보낼 때 마시려고 아껴 뒀다는 20년 된 산딸기주를 꺼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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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귀하게 보관한 술인데, 내가 마셔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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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황녀님. 오히려 저의 영광이지요. 다 드셔도 됩니다.”

노인이 고개를 땅에 처박다시피 조아리자 아델은 얼른 술병을 받아 들며 그의 어깨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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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니 일어나게. 허리 건강에 좋지 않네.”

제법 커다란 술병을 꼭 끌어안고 친우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황녀의 표정이 어찌나 신이 났는지, 테오도르는 질색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기벨린은 반색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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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빨리 뚜껑 따 보십시오! 이보게! 이십 년이나 됐다는 게 사실인가? 나같이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딱 나이가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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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요,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평생 얼굴 한 번 뵙기 힘들 황녀께서 허름한 술병을 기쁘게 받아 들자 감격한 노인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여 댔다.

아델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병뚜껑을 열었다. 퐁, 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산딸기주 특유의 새콤하면서도 진한 향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기벨린도 아델이 내민 술병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켜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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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네. 맞아. 이십 년이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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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제가 딱 이십 년 전에 담갔습니다!”

고트로프 대표 술꾼의 인정에 노인은 신이 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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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뱅이 저거.”

테오도르는 학을 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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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이제 마실 차례. 잔 어딨어, 잔?”

또 다른 술꾼은 잔을 찾았다.

그렇게 산골 마을에선 때아닌 술 파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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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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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나는 다신 기벨린과 황녀 전하가 같이 오는 팀엔 안 낄 거다.”

산이 떠나가라 울려 대는 기벨린의 웃음소리에 테오도르가 진저리를 쳤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곁에 앉은 아델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벨린의 빈 잔에 술을 콸콸 쏟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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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만 벌써 몇 번째야.”

이 와중에도 홀로 고아하게 차를 마시던 카인이 되받아치자 테오도르는 낯을 일그러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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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황녀 전하께서 나 같은 놈의 청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니 문제지. 어쩜 그렇게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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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내 욕하니?!”

곧장 날아드는 날카로운 음성에 테오도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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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욕 아니고 사실이요. 근데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들으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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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했네. 욕했어. 그게 욕이야 인마! 전하! 저놈이 지금 전하 욕했대요. 당장 혼쭐을 내십시오!”

기벨린이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그 주정을 듣고 있던 아델이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그의 건장한 어깨를 찰싹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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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했다는데 욕이 맞다니. 그거야말로 나를 욕한 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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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갑자기 왜 저한테 그러세요?”

테오도르는 두 술꾼의 모습에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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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꼴을 얼마나 더 봐야 해?”

그러는 사이, 카인은 빈 잔에 차를 쪼르르 따랐다. 왁자한 주정 속에서 홀로 고아한 자태를 뽐내며 차를 홀짝이는 은발의 미남을 멍하니 바라보던 테오도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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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야.”

테오도르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렸지만, 카인은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투명한 찻잔을 바라보았다.

연한 녹색 찻물에 금붉은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이다가 불빛이 가라앉으며 고요해졌다.

카인은 찻물처럼 잔잔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폭포처럼 어깨 위로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 세상 어느 빛을 가져와도 그보다 눈부시지는 않을 금빛 눈동자, 반듯한 콧대와 미려한 입술.

흥취가 오르면 창백하던 뺨엔 발그레한 홍조가 일고, 더 기분이 좋으면 자꾸만 눈을 휘어 웃으신다.

테오도르는 기벨린과 아델의 조합이 넌더리가 난다 했으나, 카인은 기벨린과 함께할 때 아델이 보여 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는 기벨린처럼 아델을 재미있게 할 줄 몰랐다.

술을 함께 마시면 제게도 저런 얼굴을 보여 주실까 싶어 함께 술을 마셔 보았으나, 아무리 마셔도 쓰기만 할 뿐 취하지 않았다.

그가 취하질 않으니 아델의 얼굴도 말갛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아델이 번쩍 치켜든 잔을 입가에 대고 고개를 젖혔다. 카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다기를 정리했다.

딱 아홉 잔째였다. 그러니 일어나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델이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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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벌써 일어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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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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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하하. 그럼 제가 더 마실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전하!”

기벨린이 우람한 등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리자 아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겉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며 일어났다.

기벨린은 ‘나가시게요?’라고 물으려다가 맞은편에서 카인이 함께 일어나는 모습에 말을 삼켰다. 술을 마시지 않아 말짱한 카인이 아델을 따라간다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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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마셔 보자!”

함께 술을 축내던 이가 사라지자 기벨린은 더 신이 나서 잔을 치켜들었다.

오늘 밤, 이 술은 다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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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화환 같은 달무리를 두른 보얀 달이 뜬 밤이었다.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낸 마을 뒤로 시커멓게 보이는 산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산중 마을도 평지라고 산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바라보던 아델이 허리춤에 걸린 흑검 자루를 톡톡 두들기다가 마력을 운용했다. 산재하던 마력이 그녀의 손바닥으로 확 빨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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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호랑이도 잡겠네.”

아델은 등 뒤를 일별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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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갈 건데, 너도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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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 싶으신 곳으로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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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게 참 마음에 들어, 카인. 내가 뭘 하든 잔소리를 안 하지.”

그녀는 몸을 돌리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독한 산딸기주를 아홉 잔이나 연거푸 마셨으나, 어깨는 반듯했고 걸음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카인은 그저 그녀의 자취를 쫓았다. 그녀가 걸었던 곳을 밟고, 그녀가 향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를 닮은 달빛 그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걷는 이런 순간들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무성한 잎사귀에 달빛마저 사라진 어두운 산길을 헤치고, 널따란 상판 같은 생김새가 아주 인상적인 바위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걸음을 옮겼다.

검은 모래 사이에 콕 박힌 진주처럼, 계곡은 어두운 산에서 뜬금없이 나타났다. 황녀가 용케도 이 계곡을 기억하고 있다 싶었다.

나무가 우거져 어둠에 휩싸인 숲과는 달리, 계곡 위론 달빛이 훤했다. 아델은 제 뒤를 따라온 청년을 일별하며 씩 웃었다.

테오도르였다면 왜 가면 안 되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을 것이고, 기벨린이었다면 ‘우리 전하, 마력만 있으면 호랑이도 때려잡으시잖아요? 저는 필요 없으시죠?’라며 애초에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그저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켰다. 대나무숲에서 그녀를 따라 나왔던 그 날 이후 언제나 그러했듯이.

처음엔 덩치 큰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든든한 오라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아델은 그가 제 뒤를 따르는 것을 모두 용인했다.

가물 때라 그런지 물이 많지 않았다. 적당히 시원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하얀 물보라를 지켜보던 아델이 평평한 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두꺼운 부츠와 덧신을 벗어 버린 뒤 종일 고생한 발을 찬물에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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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시원하다.”

카인은 저도 모르게 하얀 발목에 고인 시선을 얼른 들어 올렸다.

아델은 팔을 지지대 삼아 어슷하게 등을 뒤로 기울인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뒤로 쏠리며 드러난 초승달 같은 굴곡의 아미가 매혹적이었다.

느릿하던 카인의 맥동이 서서히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에 달이 고였다. 저 눈동자에 저만이 오롯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때때로 카인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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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별안간 그를 부르는 음성에 카인의 심장이 발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는 호흡을 멈추고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유유자적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델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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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세상이 낫니, 아님 날 따라 나와 마주한 세상이 낫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카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부는 바람에 그의 고운 은발이 달무리처럼 은은하게 주변으로 흩날렸다. 그녀를 스쳐 지나온 바람에는 그녀의 향이 묻어 있었다.

카인은 얼굴을 부드럽게 휘며 담담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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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밖의 세상이 낫군요.”

숲 밖의 세상엔 당신이 있으니까요.

그는 그녀가 걷는 길을 걷고, 그녀를 지나온 바람을 맞이하고,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을 눈에 담았다. 아델라이드를 통과한 세상이 그가 마주한 세상이었으니, 기실 그의 세상이 아델라이드였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세상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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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렇다니까.”

그녀의 웃음을 마주하자 마음속에서 불쑥 욕심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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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폐하께선 훗날 너와 결혼시키는 것이 어떠하냐 농담을 하셨지.’

 
언젠가 공작이 가볍게 흘린 그 말은 카인에겐 묵직하게 남아 어느 순간부터는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카인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달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아로새기듯 담았다.

* * *

그로부터 1년여 후.

카인은 미친 듯이 달렸다. 언제나 차분하고 고아하던 녹스의 수장이 황궁에서 달음박질이라니. 궁의 사용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달려 도착한 황녀의 궁에선 벌써 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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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기벨린의 고함이 어찌나 큰지 지나가던 시종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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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됩니다!!”

드물게 테오도르의 성난 목소리마저 문밖으로 새 나왔다.

카인은 거칠게 들썩이는 가슴을 죽을힘을 다해 가라앉혔다. 경련하듯 벌벌 떨리는 손을 들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첨예하고 거친 기운이 몰아닥쳤다.

기벨린은 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방을 어지럽게 서성였고, 테오도르는 납덩이처럼 시퍼렇고 냉한 기운을 감추지 않고 흘려 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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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아델은 창문틀에 어깨를 어슷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입매를 굳힌 채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녀는, 언젠가 이런 일이 도래할 것임을 예상했던 사람 같았다.

세 사람은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목이 졸렸다.

황녀의 혼기가 꽉 차오르자 고요하던 고트로프 정계가 들썩였다.

비록 황태녀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녀는 고귀한 황족이며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였다. 그러니 모두가 그녀를 탐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혼사를 주관하는 태후궁으로 매일같이 수많은 가문의 귀부인들이 드나든다고 하였다. 그중에는 녹스 공작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에흐몬트에서 국혼 제안이 왔고, 태후는 기습적으로 그 사실을 발표했다.

현 황제인 루시오 고트로프가 후계를 생산하려면 족히 10년은 걸릴 것이다. 가뜩이나 황녀에 비해 기반이 약한 황제의 입지를 더 곤궁하게 만들기 충분한 기간이었다.

고트로프의 황실은 전에 없이 강력했지만,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었다.

아무리 태후가 황제의 뒤를 굳건히 비호하고 아델이 황좌에 욕심을 내려놓았다 한들, 능력 있는 황녀를 이용하여 제 욕심을 차리려는 무리가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아델은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었다. 그녀의 사람들이 그녀의 동생을 죽이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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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실 것이지요?”

기벨린이 간신히 물었음에도 아델은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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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돕겠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도 그녀는 한참이나 답이 없다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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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도울 사람은 내가 아니라 폐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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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그 말이 그 뜻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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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날 도울 수 없어. 그건 내 이름과, 그 이름에서 오는 책임의 문제니까.”

그들의 황녀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아델은 긴 숨을 몰아쉬더니 축객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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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가라. 홀로 있고 싶으니.”

기벨린과 테오도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폈다 반복하면서도 그녀의 명에 따랐지만, 카인만은 우두커니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카인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두 친우는 그를 채근하지 않고 저들끼리 물러났다.

아델은 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카인을 의아하다는 듯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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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그녀가 부르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가 눈을 들었다. 나가지 않고 뭐 하느냐 채근하려던 아델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청량한 기운이 가득하던 녹음의 눈동자에 흉포한 야성이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서없이 자란 밀림의 풀처럼 그의 눈에 서린 기운이 마구잡이로 뻗치고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그녀의 국혼을 반대하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아델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를 향해 몸을 온전히 돌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그를 마주하며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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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지 마라. 내 문제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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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무람없던 아델의 명령처럼, 그의 청 역시 무람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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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델이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한 얼굴로 되묻자 카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아델은 새삼 그의 늘씬하면서도 건장한 체격을 실감했다.

성큼 다가온 기세와는 달리 카인은 적당한 선에서 멈춰 섰다. 그는 결코 아델에게 무례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대신 그의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서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급격히 한쪽으로 기우는 눈높이에 아델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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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당장 일어나!”

하지만 카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오른쪽 무릎이 기어이 바닥에 닿았다. 카인은 고개를 치켜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간절히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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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혼인하세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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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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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의 이름을 가지세요. 녹스가 울타리가 되겠습니다. 두려워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압니다. 제가 막겠습니다. 제가 막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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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가차 없는 거절에 목이 메었다. 카인은 입술을 벌벌 떨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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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아델은 그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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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 형제와도 같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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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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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 형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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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 없습니다.’

카인은 가슴을 갈라 제 심장을 꺼내 보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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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보세요. 당신 앞에만 서면 미친 것처럼 들썩이는 이 심장을 보시고도, 제게 형제란 말씀을 해 보세요.’

아델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일렁이는 아름다운 녹음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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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녹스. 녹스는 녹스로 존재해야 한다. 녹스 공가는 고트로프의 반석이자 황제의 오랜 지지자였지. 내가 너와 결혼하면, 녹스는 대나무숲에 갇히고 만다.”

그게 뭐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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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선 안 돼. 내가 그날 널 왜 그곳에서 꺼냈는지 기억해라.”

제가 왜 그곳에서 나왔는지 당신은 정녕 모르시는군요.

그러나 카인은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마주하는 단단한 눈빛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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