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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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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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외전1. 그리움이 자취로 남는다면 (2)
2022.04.26.
“어어, 오랜만이야. 고개 좀 들어 봐.”
황태녀와는 서로 안면이 있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격 없는 하대와 묘하게 건성인 듯한 말투에 카인은 두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동작으로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소녀가 들고 있던 것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수도 근처에 있는 탑은 여기에선 워낙 멀어서 마력 운용이 쉽지 않은데, 증폭기도 없이 대단하더라. 이번엔 이거 쥐고 한번 해 봐.”
주인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날씬한 흑검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카인은 얼결에 그녀의 검을 받아 들었다.
“이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손바닥이 아니라 이 검으로 물길을 내는 것처럼 마력을 발산해 봐.”
황태녀의 강렬한 기백에 밀린 탓에 그녀가 어쩌다 이곳에 와 있는지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잘해, 기대하고 있으니까.”
한 걸음 멀어지며 덧붙이는 말에 전에 없이 긴장까지 하고 말았다. 카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마력을 운용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력이 그의 피부 곳곳으로 스며들며 마치 몸속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고양감에 놀란 카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치뜨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이 유쾌하게 말했다.
“어때? 그냥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모이지? 탑의 파편을 모아 만든 증폭기거든.”
황태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카인의 주의를 끈 다음, 방금까지 제가 앉아 있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제 마력으로 저걸 쪼개 봐. 화살을 쏘는 것처럼 마력을 날리는 거야.”
언뜻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수년간 홀로 마력을 운용을 깨우쳐 온 카인에겐 마치 마중물처럼 느껴지는 조언이었다.
카인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방출했다.
그간 대나무숲을 뒤흔들며 산발적으로 뻗쳐 가던 마력이 마치 강렬한 빛처럼 바위에 집중되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력이 바위를 강타하는 순간, 바위는 놀랍게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 버리고 말았다.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운용이었다.
카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날카로운 흑검으로 미끄러진 시선이 쩍 갈라진 바위로 향했다.
‘내가 해냈다고……?’
봄 잎사귀 같은 녹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무언가 막혔던 것을 한 단계 넘어섰다는 쾌감과 깨달음이 온몸을 내달렸다.
얼떨떨해하는 카인과는 달리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은 아델이 성큼성큼 바위로 다가가 매끈한 절단면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카인을 바라보더니 슬쩍 그의 몸을 훑었다. 딴에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는 듯했지만, 애초에 상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부터가 예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카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아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미안.”
“…….”
그녀의 사과에도 대나무숲의 정령같이 아름다운 소년은 새초롬해진 얼굴로 말이 없었다. 아델은 그에게서 검을 받아 들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얼마 전부터 아델은 탑 대항 본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솜씨 좋은 스트라이커가 부족하여 애를 먹고 있었던 데다, 황후의 반대 역시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었다.
그러던 차에 탑 대항 본부 창설과 관련해서 몇 가지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녹스 공작령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것은 정말 천운이었다.
심지어 슬그머니 진원지를 찾아 대나무숲에 와 보니, 다름 아닌 카인 녹스가 마력을 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직 정제되지 마력이지만,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솜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이 아니었다.
스트라이커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조금만 가다듬는다면 탑 대항 본부의 핵심 전력이 될 터였다.
게다가 카인 녹스는 유서 깊은 녹스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그의 배경이면 아델이 황후에게 대항하는 데 든든한 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앞의 소년을 탑 대항 본부에 영입하리라 다짐한 아델은 우아한 동작으로 검을 갈무리하며 슬쩍 카인을 떠보았다.
“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거야?”
카인은 답하지 않았다. 이번엔 불쾌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에게 ‘왜’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제 아들을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 조각처럼 다루는 공작 부인은 물론, 녹스 공작가의 후계자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어 강하게 키워야 한다던 공작조차도.
카인이 침묵하자 아델은 예쁜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 이렇게 훌륭한 재능을 어째서 대나무숲에서 썩히고 있는 거냐고. 이 힘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그녀의 낭랑한 음성이 카인의 귓가로 흘러들어 서늘하게 가슴을 적셨다.
‘카인, 날이 추우니 당분간은 방 밖으로 나오지 말아라. 감기 걸리면 큰일이니.’
‘그것 봐요. 조금만 추워도 이렇게 금방 아프잖아요. 우리 카인은 아직 바깥에 내놓기에는 너무 여리고 약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 인이 박인 걱정들이 반발처럼 떠올랐다.
“……제가 강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인이 잠긴 목소리로 되묻자 아델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쪼개진 바위를 가리켰다.
“저거 안 보이니?”
카인은 아델의 손끝을 따라 제가 마력으로 두 동강 낸 바위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코끝이 맵싸해지며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둥둥, 심장의 맥동이 귓가에 거세게 울려 댔다.
이곳에서 그는 늘 병약한 소년이었다. 도움을 주고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건강을 되찾고 나서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황태녀는 그가 강하다고 했다. 그녀가 칭찬하고 인정한 것은 녹스라는 거대한 이름도,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외모도 아닌 카인이 오랫동안 홀로 오롯이 갈고닦은 능력이었다.
황태녀의 한마디가 그조차 알지 못했던 가슴 속 불씨를 서슴없이 건드렸다.
“웬만한 스트라이커도 저걸 저렇게 깔끔하게 못 갈라. 보아하니 누구한테 따로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진짜로 대단한 거라고.”
카인이 내리깐 시선을 들어 아델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여린 새순이 아니라 짙푸르고 울창한 고트로프의 산림을 닮은 녹색 눈동자가 쇳물처럼 끓고 있었다.
아델은 언젠가 아버지인 황제가 흘러가듯 읊조린 말을 떠올렸다.
‘녹스 공작 부인의 걱정이 정말 유난스러워. 장차 공작가를 이끌어 갈 소공작을 언제까지 몸이 약하다고 온실에만 둘 것인지.’
그녀의 금안에 이채가 돌았다.
“카인 녹스.”
그리고 빠르게 할 말을 고른 뒤, 신중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넓은 세상을 보여 줄게. 너랑 내가 함께 가꾸어 갈 세상을 보여 줄 테니까, 이 좁은 곳에서 나가자. 나는, 그리고 고트로프는 네 힘이 필요해.”
시원스레 내민 자그맣고 하얀 손바닥이 아주 가볍게 소년을 압도했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 줄 테니까, 나랑 함께 가.”
차갑게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카인이 아델의 뒤를 따른 것은,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 본 상대를 각인하여 따르듯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 * *
그 후 카인은 탑 대항 본부의 핵심 인력이 되어 아델라이드와 함께 탑을 파괴하며 고트로프 전역을 누볐다.
아델라이드는 모든 면에서 카인과 달랐다. 그녀는 태양과도 같아서 존재만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했고, 그녀의 행보는 늘 큰 파급을 일으켰다. 황후에 의해 황태녀가 아닌 황녀로 끌어내려진 후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인이 박여 그를 좀먹고 있던 무수한 걱정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아주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너는 강해, 카인.’
카인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아델은 끊임없이 카인을 북돋아 주었다. 거리낌 없이 한발 앞장서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었다.
시간은 흘렀고, 소년은 깊고 그윽하게 눈빛을 가진 남자가 되었다. 파릇한 열매가 무르익어 가듯 동경이 존경으로, 존경이 연모로 익어 갔다.
이토록 강인하고 매혹적인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인!!!”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그를 재촉하자 카인도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을 몰았다.
“자, 오늘 저 능선을 넘어야 해. 가자!!”
조용하고 평온한 대나무숲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척박한 산야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정은 늘 거칠고 험난했지만, 그녀와 함께이기에 찬란했다.
카인은 어느새 제 인생의 이정표이자, 세계가 되어 버린 여자를 따라 거침없이 내달렸다.
* * *
“탑, 탑입니다!!! 급수는 최소……, 최소 2급!”
“스트라이커, 스트라이커!!”
붉은 하늘이 펼쳐지면 어김없이 도래하는 재앙을 올려다보며 기사단장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빌어먹을!! 키퍼도 아직이야?!!”
까마득한 하늘에서 시작된 검은 재앙이 무서운 속도로 땅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흔해 빠진 하급 탑은 아니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탑을 보고 있으려니 애가 탔다. 기사단장은 의미가 없는 줄 알면서도 검을 뽑아 들었다.
“왜 아무도 안……!”
그가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찰나,
“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기사단장은 홀린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작은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여자는 곱슬기 하나 없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단히 묶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포 섞인 비명이 여기저기 난무하고,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본능적인 혐오가 드는 검은 탑이 가까워지는데도 그녀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긴 검을 꺼냈다.
주인과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먹빛 검을 본 기사단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희가 차올랐다.
“황녀님!!”
고트로프의 마녀, 고트로프의 흑표범이라 불리는 황녀 아델라이드가 왔다.
“황녀님?!”
“황녀님께서 오셨다고?!!”
희망에 찬 수런거림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아델라이드는 몸을 낮추며 날카롭게 하늘을 살폈다.
“키퍼! 탑을 잡아라!!”
황녀의 명령에 기벨린과 테오도르를 비롯해 뒤따라온 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자 들고 있는 마력 증폭기로 마력을 방출했다.
이윽고 실타래 같은 빛줄기들이 탑 주위로 얼기설기 짜이기 시작했다.
“잘 잡고 있어!”
아델라이드는 탑 주위로 휘몰아치는 기류를 읽으며 마력을 운용했다. 그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마력의 불꽃이 손에 든 증폭기를 통해 폭발적으로 발산되기 시작했다.
“카인, 내가 먼저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신중히 탑을 노려보던 아델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그리고 자꾸만 몸이 훌쩍 들리려는 것을 억누르며 탑 아래까지 다가가, 결정적인 순간 기류에 온몸을 내맡겼다.
사람들은 가뿐하게 기류를 타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황녀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미쳤다…….”
사람들의 탄성은 아델에게 닿지 않았다. 온몸을 상승기류에 맡기는 순간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의 고함만이 귓가에서 요동쳤다.
상승기류를 탄 아델은 한 마리의 새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탑의 핵을 감지했다. 그리고 핵의 위치를 파악한 순간, 곧장 검을 찔러 넣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상위 탑인 만큼 핵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탑 밖으로 튕겨 나온 아델을 기벨린이 가볍게 받아 냈고, 그와 동시에 카인이 탑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도약한 카인은 이내 아델이 올랐던 것보다 훨씬 높은 위치까지 도달했다.
망설임 없이 탑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핵에 증폭기를 찔러 넣고 마력을 쏟아냈지만, 밖에서 탑을 올려다보던 아델은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흑검을 쥐었다.
“한 번은 더 해야겠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탑 밖으로 카인이 튕겨 나왔다.
“쟤 잡아.”
낙하하는 은발의 미남자를 힐끔 눈짓한 뒤 아델은 또다시 탑을 향해 질주했다.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그녀가 탑으로 사라지고 얼마 뒤. 하얀 불꽃이 바람을 타고 탑 전체를 휘감아 옮겨붙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어떻게 해!!! 황녀님은?!”
눈이 멀 것같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이 탑을 휘감자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늘 보아 왔던 모습인지라 탑 대항 본부 사람들은 “끝났네.” 하고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인은 증폭기를 집어넣은 채 불타는 탑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화염의 소용돌이가 멎자 핏빛 하늘이 서서히 분홍빛으로 옅어지다가 끝자락부터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무섭게 타오르던 불꽃도 태울 것이 사라졌는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너울너울 하늘을 타고 오르는 불꽃은 몹시 아름다웠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 너머, 카인의 불꽃이 늘 그랬듯 하늘을 올려다본 자세 그대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기벨린과 테오도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리는데도 항상 저러셔.”
“내 말이. 취미 생활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시던데.”
두 친우의 성토를 흘려넘기며 카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어느 순간 급격히 낙하 속도가 늦춰지며 아델이 별안간 몸을 휙 뒤집었다. 창백한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든 것이 마치 강림하는 신 같았다. 수십 번을 반복해서 봐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카인은 벅찬 숨을 서서히 내쉬며 이미 익숙한 이 순간을 또다시 뇌리에 새겼다.
아델라이드.
그의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