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취향은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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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취향은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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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취향은 유전
2022.04.12.
마침내 긴 식사가 끝났다.
원래대로면 엘리자베타가 직접 태후에게 에흐몬트 황궁을 소개해 줄 차례이지만, 보아하니 그랬다간 사위가 장모에게 말 한 번 붙이지 못할 게 뻔했다.
엘리자베타는 그쯤에서 헤르베르트 후작에게 슬쩍 동아줄을 내려 주기로 했다.
“에흐몬트 황궁의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답니다. 한번 거닐어 보시겠습니까?”
“좋지요.”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으나, 아무래도 그 영광은 헤르베르트 후작에게 양보해야 할 것 같군요. 어떠십니까?”
태후는 그제야 도도하게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리오넬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지만 내심 태후에게 말을 붙일 기회만을 노리던 리오넬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태후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리오넬을 빤히 바라보며 고고하게 답했다.
“그러지요.”
* * *
정원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쪽은 장미정원으로 유리 화원이…….”
“됐네. 유리라면 고트로프에도 널리고 널렸어.”
태후의 시녀마저 한숨을 쉴 정도의 박대였다. 하지만 리오넬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압니다. 다만 장미가…….”
“난 장미를 싫어하네.”
태후는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걸어가 버렸고, 리오넬은 얼른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슨 말을 해도 면박을 당하니 쉽게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아델과 꼭 닮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순간의 무안함도 이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때, 서늘함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꼿꼿하던 태후의 어깨가 주춤했다. 리오넬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서자 태후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바람막이라도 하려는 겐가?”
언젠가 창백한 얼굴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아델의 곁에서 바람을 막아 주던 때가 떠올랐다.
차마 닿을 수도 없어 안타깝고도 달콤했던 그날의 기억에, 긴장으로 약간 딱딱해졌던 리오넬의 표정도 절로 부드럽게 풀리며 단정한 입매에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태후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리오넬은 머뭇거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태후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참.”
리오넬은 눈치 빠르게 태후가 이 행동을 썩 나쁘게 여기지 않음을 간파하고는 은근슬쩍 그녀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서 시녀보다 앞서 양산을 펼쳐 준다든지, 앉기 전 미리 자리를 살핀다든지.
태후가 아델 못지않게 서늘한 시선으로 리오넬을 빤히 응시하자 리오넬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부드럽게 마주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서늘한 표정, 자연스레 몸에 배어나는 위엄까지.
아델과 꼭 닮은 태후를 바라보며 리오넬은 짙은 눈썹을 기울여 웃었다. 꼭 시간이 흘러 좀 더 나이가 든 아델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날카로운 눈매를 휘며 웃자 남자의 인상이 확 바뀌었다. 그의 다정한 미소에 말문이 막힌 태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아델이 이자를 선택한 데엔 틀림없이 저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야.’
사실 처음부터 태후가 진 싸움이었다. 그녀의 딸은 단 한순간도 제 어미에게 진 적이 없었으니. 태후는 그저, 딸이 제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때, 리오넬이 부드러운 제안을 해 왔다.
“헤르베르트 후작저에 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낙엽수가 흐드러져 아름답습니다.”
“아델도 거기에서 머문다지?”
“예.”
“결혼도 안 한 남녀가 한집에서 생활하다니, 아델 황녀는 누구보다 예법에 밝은 아이인데 믿을 수가 없군.”
“제가 무척 졸라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어서요. 비록 두 달째 뵙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태후의 입이 벌어졌다. 스스로 경박스럽다고 생각해 얼른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크게 헛기침을 하는데, 리오넬이 순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가 보시지요.”
“그것참, 특이한 자일세.”
“폐하의 눈에 제가 많이 부족하리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황녀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고 아름다운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황녀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예쁘게 봐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작정하고 애교를 부리는 예비 사위에게 휘말려 태후는 얼떨결에 황궁이 아닌 헤르바르트 후작저에 머물게 되었다.
* * *
딸과 어머니는 취향이 비슷했다. 술을 희석하여 마시지 않는 것도 실은 태후의 취향이었으며, 하다못해 걷는 모양새마저 닮았다.
다행히 이 취향은, 리오넬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국방부 장관, 발드르 직계, 헤르베르트 후작이라는 직함을 줄줄이 가진 남자에게선 체면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오넬은 아예 태후의 시중을 들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어머님, 이것도 한 번 드셔 보시지요. 참 달고 맛있습니다.”
리오넬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폐하 대신 어머님이란 호칭을 입에 담으며 자연스럽게 과일을 내밀었다.
잔뜩 날을 세우던 예비 장모도 입안의 혀처럼 곰살맞게 구는 예비 사위의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는지 우아하게 포크를 받아 들었다.
“저건 등나무인가?”
태후가 건물 외벽에 자리 잡은 나무를 가리키며 묻자, 리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답했다.
“예. 오월에 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이 정원에도 봄꽃이 흐드러지지요. 정말 아름다웠는데, 올해 내내 아델이 바빠 제대로 즐기지를 못했습니다.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이리 잔뜩 가꾸었는데…….”
그의 말끝이 끝으로 갈수록 흐려졌다.
태후는 리오넬의 축 처진 눈꼬리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 애가 원래 좀 그러네. 어딘지 쌀쌀맞은 데가 있지. 자네가 이해하게.”
리오넬은 태후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을 돌렸다.
“등나무꽃이 만발하면 아름다우니 내년 오월까지 이곳에서 머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됐네. 나도 바쁜 사람이네.”
“벌써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람 참.”
그때였다.
정원 한편이 어수선해지는 듯싶더니, 아델이 불쑥 나타났다. 달려왔는지 잔뜩 헝클어진 딸의 모습에 태후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잔소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아델!!”
아델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난 리오넬의 얼굴이 어찌나 기쁨으로 환히 빛나는지, 태후는 눈을 껌뻑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루시오 대신 어머니가 에흐몬트에 방문했다는 사실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리오넬을 쥐잡듯 잡고 있을까 걱정이 되어 달려온 참이었다.
아델은 반사적으로 리오넬의 얼굴을 살피며 태후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태후가 다리를 꼬며 비소를 머금었다.
“왜? 내가 헤르베르트 후작을 못살게 굴었을 것 같아 그러니?”
딸은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않았고, 모녀의 분위기는 더없이 냉랭해져 버렸다.
그녀들 사이를 리오넬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과한 걱정입니다. 막 어머님께 내년 오월 등나무꽃이 필 때까지 계셔 달라 청한 참입니다.”
“뭐?”
아델이 ‘어머님’이란 호칭에 한 번, 그의 제안에 두 번 놀라 눈을 치뜬 사이, 태후는 보란 듯이 리오넬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게 후작, 방금 자네가 건넸던 과일이 참 달고 맛있군. 하나 더 주게.”
“물론입니다.”
리오넬은 살가운 태도로 태후에게 다가가 과일을 건넸고, 태후는 아델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하니? 와서 앉지 않고.”
태후의 표정은 여전히 도도하였지만, 아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고트로프에서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못 본 몇 달 사이, 태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델은 얼떨결에 자리에 함께 앉게 되었고, 그 뒤론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니,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어머님, 어린 시절 아델은 어떠했습니까?”
“말도 말게. 똑똑하기로는 제국에서 겨룰 자가 없었으나, 나를 닮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 덕에 나와 참으로 많이 부딪쳤지.”
“어린 시절 아델이 무척 궁금합니다. 혹 초상화가 있으면 훗날 한 점 보내 주십시오.”
“그러지. 그것도 어찌나 싫어했는지, 황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날이면 울지 않은 화공이 없었네.”
“그러셨습니까?”
“제가 하기 싫은 이유를 얼마나 요목조목 설명을 하던지, 나조차도 말문이 막히곤 했지.”
“고트로프 황제 폐하도 꼭 뵙고 싶습니다.”
“언제든 오게. 아델이 바쁘면 두고 자네만 와도 좋네. 환영하지. 고트로프 황궁도 소개해 줄 터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아델은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황당해하든 말든, 장서 간의 다정한 대화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 * *
“살갑더구나.”
“……네.”
“다정하고.”
“그렇죠.”
“생긴 것도 멀쑥하니 잘생겼고.”
“그럼요.”
“극약을 버린 것은, 리오넬 헤르베르트 때문이었니?”
태후의 붉은 입술에 걸린 궐련이 실 가락 같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태후는 궐련을 손가락으로 집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동자만 굴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아델이 에흐몬트에 품고 간 죽음은 늘 태후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 댔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딱 그만큼의 모정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녀는 아델의 어미였다.
“네.”
꽤 긴 침묵 끝에 나온 대답에 태후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다시 궐련을 입에 물었다.
“그래. 그럼 됐지.”
태후는 한참이나 말없이 궐련을 태웠다. 가느다란 실낱같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아슴거렸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될 길을 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전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이 있어서였다.
태후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잘 살아.”
“…….”
“이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어미의 간섭도, 남편의 방해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봐.”
난생처음 듣는 어머니의 온기 어린 말에, 아델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럴 거예요.”
“뭐…… 입안의 혀처럼 구는 남편도 나쁘지는 않겠더구나.”
태후가 입술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네 결혼 준비가 끝나면 다시 연락하마. 어째 어미인 나보다 황제가 더 난리더구나. 내가 직접 주관해야 할 일이거늘, 손도 못 대게 해. 어쩜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제멋대로인지.”
그 후, 태후는 며칠을 더 머물다 고국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딸은 마지막까지도 데면데면했으나, 장모와 사위는 퍽 친근했다.
“잘 지내게.”
“조심히 가십시오. 언제든 오시고요.”
“사람 참. 나도 바쁜 사람이라 했거늘.”
“서운해서 그러지요, 어머님.”
아델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매우 얼떨떨해했다.
* * *
“닮으셨습니다.”
발코니에 서서 태후가 떠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델에게 리오넬이 속삭였다.
아델은 부정하지 않았다.
“닮은 듯 다르시고요.”
그 말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머니 비위를 맞춘 거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리오넬이 그녀를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아델이 귀여웠다.
리오넬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아델은 귓가를 은은하게 붉히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리오넬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손짓하는 대로 흐트러지던 아델이 별안간 깨달았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러니까 나 대하듯 대했다, 이거로군?”
의미 없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깊은 입맞춤이었다.
아델이 그의 목에 손을 휘감자 리오넬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일정이 없으시지요?”
“음?”
“없으셔야 할 겁니다.”
아델은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도로 입을 맞췄고, 두 사람이 서 있던 발코니 창문이 닫혔다.
* * *
그리고 그해 겨울.
엘리자베타는 한 통의 묵직한 서신을 받았다. 발신인은 고트로프의 루시오 황제였다.
“고트로프 황제가 아예 국혼 준비를 한 모양인데.”
곁에서 함께 업무를 보던 테세우스가 펜을 잉크병에 꽂아 넣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위버링겐 백을 말씀하십니까?”
“관문을 열어 달래. 누이의 혼인 물품을 보낼 것이라고. 더불어, 혼인 때엔 직접 참석하고 싶다는군?”
“고트로프의 황제가 직접 말입니까?”
일전 갑작스러운 태후의 방문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번엔 황제가 직접 오겠다니?
엘리자베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헤르베르트 후작의 결혼이 내 결혼보다 성대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