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2022.03.26.
리오넬은 서늘한 눈으로 데스포네 공작을 빤히 쳐다보다가 침착하게 명령했다.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와 레녹스 푸아티에를 생포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위압적인 체격의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다가왔다.
“이익!!”
데스포네 공작 편의 사람들이 좁은 철문을 어떻게든 닫아 보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는 병사들과 시종들을 앞으로 밀어내며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아나자 공작을 지키던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무릎을 꿇었고, 시종들도 들고 있던 궤를 내려놓고 투항했다.
“좇아라!”
리오넬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서둘러 두 사람을 추격했다. 근위대 소속 기사들은 황궁 내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황궁 밖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해 버린 근위대를 피해 헐떡이며 한참을 달리던 레녹스는 문득 황궁의 하수도를 기억해 냈다. 북문과 연결된 하수도는 곧장 강과 이어진다.
“저기 있다, 좇아라!!”
턱밑까지 다가온 추격에 레녹스는 데스포네 공작의 팔을 잡고 막무가내로 끌어당겼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레녹스와 공작은 정신없이 하수도에 도착했다. 황궁의 모든 오물이 지나는 길답게 하수도 안은 고약한 악취가 가득했고, 더러운 구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이! 여기 말고는 길이 없어?!”
“어서요! 여기로 가면 강과 이어진단 말입니다!!”
데스포네 공작은 시궁쥐처럼 구정물에 몸을 담고 도망쳐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일단 수도를 빠져나가야 다음 일을 도모할 수 있다. 카를 울리히도, 카를 울리히의 씨를 뱄다는 디안 푸아티에도 챙기지 못했지만, 아직 데스포네 공작의 품에는 황제의 인장이 있었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엘리자베타와 협상을 벌여야 했다. 공작은 이를 악물며 더러운 물에 몸을 담갔다.
“으으윽!!”
뼛속까지 시린 추위는 둘째치고, 발에서 느껴지는 미끄덩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썩어 가는 듯한 감촉과 숨쉬기조차 어려운 악취에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어졌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하수도를 거슬러 올라가던 공작은 심지어 발이 미끄러져 구정물 속에 빠지고야 말았다.
“우욱, 퉤퉤!”
“괜찮으십니까?!”
데스포네 공작은 똥물을 뒤집어쓴 채 구역질을 하며 죽을 것처럼 헐떡였지만, 이곳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하수도 끝에 다다르자 좁아지는 통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어가듯 움직여야 했다. 데스포네 공작의 멋들어진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망가져 얼굴에 달라붙었고, 값비싼 지팡이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비틀거리며 하수도를 빠져나왔지만, 어찌나 정신이 없고 눈앞이 캄캄한지 거친 비탈을 내려오다 또다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악착같이 손을 휘둘러 아무것이나 잡아챘는데, 하필이면 뒤따라오던 레녹스의 발이었다.
“으아악!”
둘은 급경사 구간을 한데 엉켜 엉망이 되도록 굴러 니아바라 강으로 떨어졌다.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이 선택한 경로는 슬럼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한순간 정신을 잃은 두 사람은 니아바라 강을 둥둥 떠내려갔고, 그 모습을 슬럼의 일부 주민들이 발견했다. 강에 빠진 두 사람을 뭍으로 끌어낸 주민들은 오물로 뒤덮인 두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다가 품에 달린 배지를 발견했다.
“……이거, 데스포네 공작 아니야?!”
슬럼가 주민들은 대부분 탑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나락으로 처박힌 이들이었다. 그런데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탑을 방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모여든 사람들의 눈이 흉흉해졌다. 오물을 뒤집어쓴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 위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쳤다. * * *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사라졌으니 공성전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황궁에 남아 있던 귀족들과 병사들은 투항 의사를 밝혀 왔다. 리오넬에게도 공작과 레녹스가 하수도로 사라졌다는 보고가 도착했다. 그는 침착하게 황궁과 수도의 연결고리를 되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문 하수도라면, 슬럼의 니아바라 강과 이어진다.”
리오넬은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난 주민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데스포네 공작은 모두 제 욕심으로 말미암았음에도 불구하고 슬럼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기는커녕 몹시 혐오했다. 그토록 질색하던 곳으로 흘러든 데스포네 공작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슬럼을 통과할지, 잔인한 의문이 밀려들었다. 리오넬은 서서히 열리는 황궁의 정문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명령했다.
“곧장 하수도와 연결된 니아바라 강 인근을 수색해라. 필요하다면 슬럼 내부까지 수색하고, 수도 외곽의 모든 문을 지켜라. 살아 있다면 생포하고, 죽었다면 시신을 수습하여 데려오라.”
그리고 그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황궁의 문이 완전히 입을 벌렸다.
* * * 잠시 정신을 잃었던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가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슬럼가 주민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꼬질꼬질하고 볼품없으며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하나같이 눈에는 흉흉한 살기를 띤 채였다. 데스포네 공작과 레녹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공작은 품을 더듬거리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를 살폈으나, 더러운 하수도에서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불한당 같은 놈들이 이미 가져간 것인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 패나 다름없던 황제의 인장까지도. 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와 버렸나. 슬럼가 주민들이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먹잇감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육식동물처럼 두 사람을 압박했다. 데스포네 공작은 떨리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네 이놈들! 나는, 울리히 황가의 원로이자 남부 평야의 주인인 아우구스 울리히 데스포네다!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그러나 그의 우렁찬 외침은 거센 빗줄기에 한 번, 주민들의 눈빛에 두 번 짓밟혔다.
“아, 예. 그러십니까?”
조롱이 가득 묻은 비아냥에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레녹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화를 냈다.
“천한 것들이 감히 공작 전하의 앞을 가로막은 대가를 어떻게 치르려 하는 것이냐! 당장 비켜!!”
“아, 글쎄 그럴까요? 포박해서 그랜드 공작 전하께 가져가면 상을 주시지 않을까?”
한 남자의 말에 다른 이들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을 회유할 금전도, 저들에게 맞서 그들을 지켜 줄 병사 한 명 없는 상황에서 신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등 뒤는 니아바라 강에 막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슬럼가 주민들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니아바라 강물처럼 차갑고 끈적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까? 한 사람이 나직하게 짓씹었다.
“한데, 그러고 싶지 않아. 네놈 말대로 우리는 천것들이라, 그렇게 신사적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다고.”
“뭐, 뭐?”
데스포네 공작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늘 버러지라고 경멸했던 이들이 마치 거인처럼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목이 졸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꺽꺽대기만 했다.
“그 빌어먹을 탑, 네놈들이 그걸 내버려 두는 바람에, 난 내 딸을 잃었어.”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걸 지켜봐야만 했지. 고향을 잃고 이 무덤 같은 곳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어.”
“그게 다 네놈과 황제의 욕심 때문이라지?”
사람들이 각자 손에 쥔 날붙이를 꺼내 들며 다가오자 데스포네 공작은 거칠게 고개를 휘저으며 더듬거렸다.
“아니, 나, 난, 난…….”
레녹스는 결국 두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살려 주, 주세요. 제발 목숨만이라도…….”
그러나 데스포네 공작만큼은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 시퍼런 날붙이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어윽, 크억.”
데스포네 공작의 뒷덜미를 낚아챈 남자가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비통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 다른 사람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도 네놈이 편히 죽길 바랐느냐고?!!”
“어흐흑, 살려, 줘…….”
“이렇게 죽는 걸 감사히 생각해. 우린 이딴 고통보다 더한 지옥을 겪었으니까. 그리고 너도 다음 생엔 꼭 버러지로 태어나라. 그래서 너처럼 쓰레기 같은 놈에게 자식과 부모를 잃어 봐.”
공작과 레녹스는 강물에 처박힌 채 어린아이 발목 정도 오는 얕은 물가에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어느 순간 축 늘어졌다. 슬럼의 수많은 주민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저주를 읊었다.
“죽어서도 편안하지 말고,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
이윽고 도착한 근위대가 오물과 진흙투성이가 된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의 시신을 발견했다. 앙리 자칼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데스포네 공작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명령했다.
“시신을 수습해라.”
딱 이자에게 어울리는 말로라 생각하면서. * * * 거센 빗줄기가 이어진 어둑한 밤.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 그리고 리오넬을 필두로 한 혁명 세력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황궁을 장악했다. 엘리자베타를 맞이한 것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죽은 웅크린 카를이었다. 리오넬의 지시로 병사들이 황제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엘리자베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황제의 시신이 지하실로 옮겨지고, 시종들이 침실과 집무실에서 그의 흔적을 빠르게 지워 냈다. 깨끗해진 집무실 책상에 엘리자베타가 앉았을 무렵에도 빗줄기는 여전했다. 첨탑에서 디안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뒤이어 레녹스와 데스포네 공작의 죽음도 전해졌다. 데스포네 공작이 훔친 황제의 인장 역시 하수구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슬럼가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참혹하게 죽었다…….”
“예.”
“그렇게 경멸하던 곳에서, 한 줌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죽었구나.”
엘리자베타는 싸늘하게 조소하며 죽은 네 사람에 대한 처분을 결정했다. 푸아티에 남매와 데스포네 공작은 모든 재산과 작위를 몰수하고 신분마저 강등시켰다. 더불어 황제 카를 울리히에 대한 모든 죄를 기록으로 후대에 남겼으며, 백성과 제국을 저버린 그의 시신은 황실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도록 했다. 테세우스가 명령장을 받아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때마침 리오넬이 들어왔다. 테세우스의 시선이 동생을 따라 움직였고, 엘리자베타도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한밤의 추격으로 야성이 채 가라앉지 않은 남자의 두 눈엔, 해소되지 못한 갈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후작. 근위대들이 제 위치로 복귀했소?”
“그렇습니다.”
빠르고 간결한 대답에 엘리자베타가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사실 근위대장인 그가 아직 어수선한 황궁에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애달픈 연인의 해후를 막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타는 망설임 없이 리오넬이 간절히 바라던 명령을 내렸다.
“그럼 퇴궁해도 좋소.”
리오넬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천천히 내쉬며 정중히 예를 갖췄다.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일별한 엘리자베타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발드르 공.”
“예. 말씀하시지요.”
테세우스를 불러 놓고도 한참 말이 없던 엘리자베타는 이윽고 결심한 듯 편지지를 꺼내 무언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책상맡으로 다가와 그녀의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엘리자베타는 꽤 긴 장문의 편지를 마무리한 뒤, 편지를 봉투에 넣어 인장을 찍어 테세우스에게 내밀었다.
“정예병들을 파견하여 카를 울리히가 고트로프로 보낸 사신단을 데려오시오. 그리고 이 서신을 지금 당장 고트로프의 황제에게 전하시오.”
* * * 황궁을 벗어난 리오넬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후작저에 도착해서도 계단을 두세 칸씩 날듯이 뛰어올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빠르게 복도를 달렸다. 아델이 있는 방 앞에서 멈춰 서서야 그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옷매무새를 만졌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델을 후작저에 두고 공성전을 준비하면서도 시간이 끔찍할 만큼 더디게 갔지만, 이 찰나의 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잠이 드신 것일까? 그럼, 이 밤을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마지못한 미련에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오넬은 문가에 바짝 붙어 서서 말했다.
“리오넬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문을 열자 방 안의 따뜻한 공기에 향기로운 체취가 섞여 뺨에 닿아 왔다. 그녀는 침대에 기대앉아 나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오넬은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어쩐지 신성을 침범한 듯한 배덕한 마음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다본 소년처럼 심장이 마구 뛰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새어 드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옅은 잠옷을 투과하여 희미한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가녀린 굴곡을 마주한 리오넬은 목부터 열이 올라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다급히 말했다.
“주무시던 것을 제가 방해했군요. 물러가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그러나 아델은 그 말을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
황금빛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차오르며 붉은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오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