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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맞닿은 숨결 (91/127)

91화. 맞닿은 숨결2022.02.12.

이것은 또 꿈인가. 애가 닳아 보는 환상인가. 왜 나를 보고 계신가. 그러나, 리오넬은 이내 깨달았다.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당황한 듯 금안이 잘게 떨리는 모습에, 몽롱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흐린 듯 혼탁하던 검푸른 눈동자가 바짝 조여졌다. 아델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만 리오넬의 강렬한 시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리오넬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델은 코앞까지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숨을 미약하게 내쉬며 얼어붙은 그녀에게 그가 나직이 물었다.

16553301952527.jpg“저를 보고 계셨습니까.”

아델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리오넬은 개의치 않고 속삭였다. 욕망이란 이름의 악마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시뻘건 앞발을 내밀었다.

16553301952527.jpg“왜…… 저를 보고 계셨습니까?”

16553301952539.jpg“……나는, …….”

아델은 뭐라도 변명하려 했지만, 끝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올곧게 그녀를 향하는 찌를 듯 강렬한 시선 사이로 간절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불빛에 일렁이는 그의 눈가가 붉었다. 그는 사나운 짐승처럼 강렬하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우며, 동시에 봄꽃처럼 여렸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델에게 속삭였다.

16553301952527.jpg“저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꽃잎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압도적인 파도처럼 그녀를 덮쳐 왔다. 귓가에서 시작된 전율이 가슴으로 번지자 마치 세상에서 그와 그녀 단둘만 유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53301952527.jpg“당신을 보고 있어도, 당신이 궁금합니다.”

그의 진심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아델을 집어삼켰다. 아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울어졌던 눈높이가 급격히 역전되었다. 그녀는 그를 가두듯 서서 검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깨질 듯 위태로운 침묵에 그가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린 그 순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16553301952539.jpg“어찌하여.”

그녀의 물음에 리오넬은 천천히 입을 벌렸지만, 차마 답하지 못했다. 언어란 너무나 좁다. 범람하여 그를 집어삼키는 이 감정을, 온통 그녀를 중심으로 쏟아지는 그의 세계를 무슨 단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일 새도 없이 담벼락을 넘은 눈물이 뺨을 가로질러,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그가 운다. 하염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툭, 떨어진 그의 눈물이 아델의 가슴에도 스며들었다. 아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가느다랗고 서늘한 손가락이 뺨에 닿자 리오넬은 뻣뻣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온몸의 신경이 그녀와 맞닿은 곳으로 쏠렸다. 폭주하듯 뛰는 심장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신분, 상황, 명예, 체면……. 그와 그녀를 감싸고 있던 모든 껍데기가 벗겨져 나갔다. 모든 것이 사라진 밤. 아델의 손끝이 천천히 눈물의 궤적을 따라 미끄러지다, 젖어 반짝이는 붉은 입술에 닿았다. 리오넬이 그녀의 손끝을 가볍게 물자 그녀의 손끝도 함께 젖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찌릿한 전율과 함께 온몸이 저릿저릿해졌다. 손끝에 뭉개진 입술, 붉게 물든 눈빛. 아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쏟아지는 검은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두 사람 주위를 가렸고, 갇힌 세상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리고 오롯이 둘뿐인 세상에서 아델은 리오넬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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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과 코끝을 파고드는 향긋한 숨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모든 이성이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린 그 자리에 뜨거운 열락과 환희가 용솟음쳤다. 늘 차가운 그녀의 손과는 달리 맞닿은 입술은 뜨거웠다. 영원처럼 맞닿았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 뒤로 밀려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리오넬이 그녀의 어깨를 다급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세가 무너져 그의 품에 안긴 아델의 등허리를 강인한 힘으로 끌어안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부여잡고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지금껏 억눌렀던 욕망을 토해 내듯 달을 삼킨 바다가 거칠게 출렁였다. 겹쳐졌던 그림자가 간신히 떨어졌을 때, 창백한 달빛에 반사된 뺨엔 붉은 홍조가 흐드러지고, 늘 선명하던 금안에도 열기가 가득했다. 죽음을 손에 쥔 순간조차 반듯하던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에 리오넬의 가슴이 끓어올랐다. 달처럼 고운 얼굴을 한번 만져 보고 싶어 저도 모르게 천천히 뻗은 그의 손끝이 아델의 뺨에 닿기 직전. 똑똑똑. 다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금안이 바짝 조여지며, 이성을 찾은 아델이 서둘러 리오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당연한 일임에도 리오넬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무게감과 온기에 허망하여 멍해져 버렸다. 저 작은 노크 소리 하나에도 거리를 벌려야 하는 실낱같은 관계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의 눈이 어둡고 깊게 침잠했다. 표정을 감추며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리오넬을 확인한 아델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으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그녀의 심장은 폭주하듯 뛰고, 온 신경은 등 뒤에 달라붙은 그의 시선에 닿아 있었다. 아델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후작저의 집사였다.

16553301952566.jpg“야심한 시각에 죄송합니다.”

16553301952539.jpg“볼일이 있으니 왔겠지. 무슨 일인가?”

16553301952566.jpg“황녀 전하를 찾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돌려보내려 했으나, 혹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꼭 뵙고 싶다 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문객들은 발드르 공저에서 부집사로 일하며 권세 있는 귀족들을 수없이 대해 온 그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노련한 후작저 집사가 방문객에게 황녀님께서 알아볼 수 있는 증명을 청하자, 둘 중 체격이 작은 이가 둥근 물건을 건넸다. 이국적인 문양이 정교하게 음각된 그 물건에는 정중앙에 한 떨기의 꽃이 새겨져 있었다. 집사는 품에 숨겨 온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공손히 아델에게 내밀었다.

16553301952566.jpg“찾아온 이들이 신분 증명으로 내민 물건입니다.”

단번에 그 물건의 정체를 깨달은 아델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고트로프 녹스 가문 수장의 상징이었다. * * * 한편, 사위에 죽음 같은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던 디안은 무작정 상아궁을 빠져나왔다. 레녹스가 주고 간 복대는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은 채였다. 칠흑 같은 어둠을 홀로 가로질러 디안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황제궁이었다. 궁을 지키던 시종들은 귀신같은 몰골에 안광만 형형한 그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엔 헛것을 본 줄 알았다. 한때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하게 사뿐사뿐 궁을 누비던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6553301976725.jpg“폐하를 뵈러 왔다.”

침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16553301952566.jpg“죄송하지만, 너무 야심한 시각입니다. 내일 다시…….”

16553301976725.jpg“폐하를 지금 봬야겠다지 않느냐!!!”

디안이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주위의 시종 모두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디안은 결코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병약하지만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제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하던 여자다. 심지어 그녀가 왕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한데, 저리 악을 쓰다가 배를 붙잡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시종은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황제는 아직 잠들지 않고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바깥의 소란을 들은 듯, 시종이 입을 열기도 전에 거칠게 미간을 문지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3301976739.jpg“들여보내라.”

시종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서둘러 문을 열자 디안이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들어섰다. 시종이 얼른 문을 닫고 나가 버린 뒤 넓은 침실에 두 사람만이 남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16553301976739.jpg“웬 소란이냐.”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하긴, 언제는 다정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그의 냉대에 바보 같은 가슴은 한없이 술렁였다.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언제나 정성껏 머리를 손질했다. 발그레한 뺨을 좋아하시기에 분홍빛으로 뺨을 물들였고, 우는 모습을 싫어하시니 되도록 늘 웃었다. 두 번 말씀하시는 것을 성가셔하시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했고, 늘 그녀의 기분보다는 그의 기분을 우선적으로 살폈다. 황제와의 관계에서 그녀는 없었다. 타인의 취향에 자기를 맞출 생각 없다던 아델라이드 황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는 참으로 오만한 말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가만히 되돌이켜 보니 틀린 것은 디안 자신이었다. 디안은 황제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

16553301976739.jpg“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고 가거라.”

이제야 보인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이 남자의 민낯이 보였다. 그는 감출 생각조차 없었건만, 그녀 스스로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대가를 이제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16553301976725.jpg“이 아이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순간 황제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경멸마저 섞인 차가운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폐가 쪼그라들어 숨쉬기도 어려웠으나, 디안은 끝내 웃었다.

16553301976725.jpg“궁금하지 않으세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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