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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90/127)

90화.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2022.02.08.

어두운 밤, 격랑 속에서 괴로워하던 카를은 황제궁을 박차고 나왔다. 시종들이 종종거리며 뒤따랐으나, 황제의 거친 걸음을 따라잡지 못했다. 황제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황후궁이었다.

16553301804656.jpg“따라 들어오지 마라.”

황제의 경고에 시종들은 감히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황제는 황후궁의 정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주인 잃은 궁은 하룻밤 사이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등불 하나 없이 달빛에만 의지한 채 궁에 들어서서 성큼성큼 계단을 타고 올라가 그녀가 사용하던 방의 문을 열었다.

16553301804656.jpg“…….”

그러나 거칠게 문을 연 기세와 달리, 그는 쉽사리 그 방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달큼한 봄꽃 향내가 훅 끼쳐 든 탓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 안을 훑었다. 주인 잃은 방이라기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작은 탁상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리며 움직이고, 곳곳의 명품 오브제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 여자만 없다. 카를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침실에 딸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엔 수많은 드레스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각종 장신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를의 두 눈이 벌겋게 타올랐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끝에 실린 힘이 미약해졌다. 마지막으로 침대 옆 탁상까지 확인한 그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뺨으로 눈물이 길을 만들며 떨어졌다.

16553301804656.jpg“……너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어.”

에흐몬트 황후로서 받은 것은, 하다못해 깃펜 하나도 들고 가지 않았다.  

16553301804676.jpg‘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16553301804656.jpg“아……. 안 돼…….”

그녀를 폐위시킨 것은 그였으나, 진실로 그 자리와 그를 버린 것은 그녀였다.

16553301804656.jpg“안 돼, 안 돼…… 돌아와…….”

카를은 멍하니 그 말을 반복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에게 폐위된 굴욕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자신했지만, 모두 오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코 폐위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정말 모두 버리고 가 버렸다. 차라리 황후라는 자리에 그녀를 묶어 두었더라면, 손을 내밀 기회는 더 있었으리라. 황후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존재를 가두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붙잡지? 고트로프로 간 사신단은 그녀의 폐위 소식을 알리지 못할 테니,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네다섯 달쯤은 남았다.

16553301804656.jpg“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 시간 안에,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창문에 깨진 달빛이 유리 조각처럼 그의 살갗을 파고들어 심장에 생채기를 냈다. 그는 창백하고 시퍼런 달빛 아래에서 가슴을 부여잡으며 끝없이 후회했다.

16553301804656.jpg“돌아와, 제발……. 아델라이드.”

  * * *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었던 아델이 깨어났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낯선 천장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아델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따뜻하고 안락한 방. 이곳은, 리오넬의 집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아델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레 커튼을 열었다. 창밖에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델은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커튼을 닫았다. 죽은 듯 잠을 자고 일어나니 다시 현실적인 문제가 그녀를 덮쳐 왔다. 자리에 앉아도, 일어나 서성여도 그녀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슴 구석에 자리 잡은 공허가 끝도 없이 팽창하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세게 물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허를 잊기 위해서는 몰두할 것이 필요했고, 다행히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델은 방 곳곳에 직접 불을 밝힌 다음,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앉았다. 서랍에는 종이와 펜, 잉크가 정갈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하얀 종이 위로 막힘없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적 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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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리오넬이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에게 건넨 서류의 본질은 혁명이자 반역이었다. 작금의 에흐몬트 제국은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와도 같았다.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지금껏 그것을 두려움으로 눌러 억지로 유지해 왔을 뿐. 데스포네 공작은 불씨인 황후를 제거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간 폭발했으리라. 황후가 폐위되고 궁을 떠난 그 짧은 기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족 가문이 리오넬의 계획에 동조하여 증표를 보내왔다. 덕분에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에게 대항할 세력을 구축했지만,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과연 마법사단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최상위 스트라이커인 브룬힐 알렉사가 리오넬이 내민 손을 잡았다. 브룬힐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리오넬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16553301804716.jpg“변수는 데스포네 공작에게 충성하는 마법사들이오. 우리 쪽으로 포섭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가려 줄 수 있겠소?”

브룬힐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16553301821024.jpg“현재 수도에서는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도 인근에 탑이 세워져서 마법사들이 마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될 겁니다.”

마법사들이 마음껏 마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기사와 마법사의 무력 차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16553301821024.jpg“데스포네 공작은 수도에 탑이 세워지기를 바라서 뷔에타의 탑을 파괴한 겁니다. 조만간 수도에 대형 탑이 들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이 계획은 신속하게 이뤄져야만 승산이 있습니다.”

황궁으로 내려왔던 하급 탑을 파괴한 까닭도, 더 강력한 대형 탑이 내려오길 바라서였다. 물론 탑의 위치도 문제였지만. 리오넬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룬힐은 리오넬의 부탁대로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을 구분한 다음 명단이 적힌 서류를 건넸다. 이 일에 동참할 귀족 가문 포섭은 테세우스가 도맡았지만, 기사들을 포섭하는 것은 당연히 그들의 수장인 리오넬이 맡았다. 사실, 따로 포섭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간 마법사들의 등쌀에 부당하게 시달려 온 기사들은 굶주릴 대로 굶주린 맹수였으므로. 리오넬이 이 일을 앙리 자칼에게 말했을 때, 그는 당장 이렇게 답했다.  

16553301821024.jpg‘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괴로움에 젖어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데스포네 공작이 밀려드는 귀족들의 항의에 정신이 없는 사이, 리오넬은 모든 것을 하나씩 준비해 갔다. 아델라이드는 고트로프로 돌아갈 수 없다 하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카를 울리히가 황제로 군림하는 에흐몬트에서 살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분께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후작저의 집사가 리오넬에게 소식을 전해 왔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 * * * 리오넬은 한달음에 후작저로 향했다.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몸은 무거웠으나 정신은 맑았다. 본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길이 한곳으로 향했다. 아델이 머무는 방의 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 불빛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람들을 만나며 움직이는 동안에도, 리오넬의 마음은 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가슴 속에 사는 악마는 그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잔뜩 들떠 있었다. 리오넬은 차가운 정원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는 동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윽고 그가 아델의 방이 있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녀를 살피고 나오던 긱스 부인과 마주쳤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리오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부인이 그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16553301821036.jpg“강인한 척하시지만, 사실 참 여린 분이십니다.”

눈앞의 남자가 아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차린 긱스 부인은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16553301821036.jpg“지금도 괜찮은 척하고 계시지만,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16553301804716.jpg“…….”

16553301821036.jpg“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아도 삶에는 늘 물러날 곳이 있음을, 저분께 말씀해 주십시오. 저보단……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 감히 청을 드립니다.”

리오넬은 어금니를 세게 물며 고개를 끄덕였고, 긱스 부인은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옆으로 물러났다. 리오넬은 아델이 머무는 방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길고 가늘게 숨을 몰아쉬다가 이윽고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16553301804716.jpg“…….”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바로 그때, 문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3301804676.jpg“들어오게.”

리오넬은 축축해진 손을 옷에 문질러 닦은 다음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둑한 방은 금붉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고, 그 빛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던 중이었는지, 그녀 주위로 종이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바깥과는 다른 따뜻한 공기에 그녀의 향이 묻어 있는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리오넬이란 사실에 놀란 듯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리오넬은 문가에 서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16553301804716.jpg“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델은 홀연히 나타난 그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3301804676.jpg“들어오시오.”

그는 외출했다가 이제야 돌아온 듯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가 책상맡에서 멈춰 서자 아델은 들고 있던 펜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리오넬이 책상 위의 종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16553301804716.jpg“주무시지 않고요.”

16553301804676.jpg“한참 자다 일어났더니 잠이 오지 않았소.”

16553301804716.jpg“이게 다 무엇입니까?”

16553301804676.jpg“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던 중이었소.”

16553301804716.jpg“…….”

리오넬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한참이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에 남자의 콧대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아델은 숨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괜히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16553301804676.jpg“어딜 다녀오는 길이오?”

16553301804716.jpg“……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박자 늦게 나온 그의 목소리에 아델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16553301804716.jpg“저는, 책임을 물을 생각입니다.”

그 말이 내재한 뜻은 대담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검푸른 눈동자가 끝을 모를 정도로 깊이 가라앉았다.

16553301804716.jpg“그리고 어그러졌던 것들을 바로잡아,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16553301804716.jpg‘그리고 그 세상에서,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보고 싶습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삼키며 리오넬은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16553301804716.jpg“그래서 할 일이 많았습니다. 탑에 대한 소문을 뿌렸더니 귀족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영지가 언제 쑥대밭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결국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16553301804676.jpg“아, 그 소문…… 예상은 했지만 역시 후작이 뿌린 것이었군.”

16553301804716.jpg“소문이라기보단 진실 아닙니까. 아, 그리고 오늘 브룬힐 알렉사를 만났습니다.”

그 말에 아델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16553301804716.jpg“일단 하시던 일을 마저 하십시오.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리오넬은 아델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까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아델은 그가 소파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는 피곤해 보이니 그만 돌아가 쉬라는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으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긴 걸음을 걷는 시간, 적막한 공간에 홀로 남아 있자니 너무나 먹먹했다. 쓰는 일에 몰두하여도 시간이란 놈은 잔인할 만큼 느리게 걸었다. 그런데 그가 이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펜에 잉크를 묻히고 종이를 내려보았다.

16553301804676.jpg‘어디까지 썼더라…….’

지금껏 몰두하여 잘만 써 왔건만, 아델은 결국 써 놓았던 부분을 다시 되짚어 읽은 다음에야 뒷부분을 작성할 수 있었다. 리오넬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아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걸린 귓바퀴는 동그랗고, 다문 입술은 미려했다. 그가 택한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무엇 하나 예상할 수 없는 막막하고 위태로운 길이었다. 그는 그 길에서 허상을 좇는 몽상가처럼 실낱같이 막연한 한 줄기 희망만을 바라보고 달리고 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날, 곁에 서 주시면 안 되겠느냐 손을 내밀면…… 저분이 잡아 주실까? 고트로프 제국의 황녀가, 에흐몬트의, 그것도 고작 후작에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리오넬은 긴 숨을 몰아쉬며 뻑뻑한 눈을 감았다.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 위로 장작 타는 소리, 사각이며 글씨를 쓰는 소리,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을 하나씩 헤아리던 리오넬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 * * 깃펜 끝에 매달려 있던 검은 잉크가 종이 위로 떨어져 동그란 자국을 만들어 냈다. 아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깃펜을 펜꽂이에 꽂아 넣고 수건으로 얼룩진 종이를 꾹꾹 눌러 닦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신경은 한곳을 향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쓰던 내용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도통 이어 쓸 수가 없었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16553301804676.jpg“…….”

바짝 조여져 있던 그녀의 눈매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경직되어 있던 어깨와 허리도 느슨하게 힘이 빠졌다.

16553301804676.jpg“헤르베르트 후작.”

아델은 아주 작게 그를 불러 보았다.

16553301804716.jpg“…….”

16553301804676.jpg“……리오넬.”

16553301804716.jpg“…….”

그러나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곤히 잠든 남자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눈에 담았다.

16553301804676.jpg“리오넬.”

단어가 영혼을 품으니 그것은 마법이라.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서인가. 손 내밀 사람 없는 가혹한 곳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부른 사람이 그뿐이어서인가. 읊조리던 이름이 가슴에 각인처럼 남아 어느새 그는 존재만으로 그녀에게 위안이 되어 버렸다. 아델은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리오넬의 발끝을 적시더니, 어깨, 목, 입술, 코끝, 이마, 그의 전부를 차례차례 삼켰다. 서로의 무릎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 아델은 천천히 무릎을 구부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그를 잠식한 듯 보였으나, 젖은 것은 그가 아닌 그녀였다. 수려한 미간, 날카로운 코끝, 인중, 입술, 턱…… 아델은 그의 얼굴을 각인이라도 하듯 천천히 되짚었다.  

16553301804716.jpg‘아델.’

  꿈속에서 들은 환청이 또 귓가에서 맴돌았다. 아델은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비로소 폐위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 마음을 완전히 인정했다.

16553301804676.jpg‘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바로 그때, 굳게 감겨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예고도 없이 열리며, 검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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