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후작저로 모시겠습니다2022.01.25.
아델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를 마주 보았다. 금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목숨을 달라니? 그게 무슨 의미지? 아델의 시선이 리오넬의 얼굴에서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지다가 꿇고 있는 무릎에 닿았다. 에흐몬트의 국방부 장관, 헤르베르트 후작 가문의 수장, 근위대 단장. 그를 수식하는 빛나는 이름들을 떠올린 아델은 리오넬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일어나시오.”
“…….”
“내 목숨을 그대에게 달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고 그대 역시 내 보좌관이 아니오. 그만 일어나 돌아가시오.”
그러나 리오넬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델은 그를 외면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이 이후로, 나를 더는 찾아오지 마시오.”
“저를 좀 보십시오.”
“그대의 명예가 깎일 터이니.”
그까짓 명예! 냉정하기 짝이 없는 아델의 말에 리오넬은 목소리를 높였다.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좀 보십시오.”
끝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아델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그의 눈가가 여린 속살처럼 무방비해 보였다.
“그럼 어찌하시렵니까?”
“…….”
“고트로프로 돌아가실 것도, 그렇다고 복권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하시겠단 말입니까? 이곳에서 멍하니 죽음을 맞이하실 생각이십니까?”
쏟아지는 냉정한 물음에 아델은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머리가 다시 깨질 듯 아팠다. 그녀는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그만.”
아델의 명이라면 무엇도 해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번만큼은 리오넬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가장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입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아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
“명예, 신념, 의무같이 전하의 어깨를 짓누르던 많은 것이 쓸려 나가 버렸으니,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말하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죽음을 원한다고 말하면, 그것 또한 들어줄 텐가?”
잠시 말랐던 리오넬의 눈에서 소리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턱 끝을 적시고 툭, 떨어져 손등 위로 번졌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가장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욱한 안개에 먹먹한 어둠까지 사방에 드리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간, 맨몸으로 어둠을 견디던 그녀에게 내민 손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결국, 아델은 태어나 처음으로 무책임한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나, 도저히 이곳에서 못 있겠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리오넬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한편, 그 시각 카를은 황후궁을 향해 성난 맹수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후작이 입궁했다고 합니다.’
입궁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리오넬 헤르베르트가 기어이 궁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어디로 갔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황후궁 어귀에 다다랐을 무렵, 리오넬 헤르베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단정한 사내를 찢어발길 듯 노려보며 멈춰 섰다. 두 남자는 외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황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던 리오넬이 먼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오기 시작했다. 황제를 직시하는 검푸른 눈동자가 끓어오르듯 일렁이고, 움켜쥔 주먹에 힘이 실렸다. 황제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데, 그는 어떤 의무도 행하려 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리오넬은, 저 무책임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자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감히 입궁 금지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황궁에 들어와?”
황제가 으르렁거리며 추궁했으나, 리오넬은 차가운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처 전달받지 못해 명을 따르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하나, 연유가 무엇입니까?”
“뭐라? 연유?”
카를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화난 듯 되물었다.
“모든 명령엔 합당한 연유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폐하.”
리오넬의 당돌한 직언에 카를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앞의 남자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모두 폐하를 무시해서 그런 겁니다.’
데스포네 공작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리오넬을 향해 사납게 다가간 황제는 한 걸음의 예의마저 무너뜨린 채 코끝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흉포한 목소리로 짓씹었다.
“내 황후에게서 눈 떼.”
리오넬은 치미는 욕을 간신히 억눌렀다. 뭐? ‘내 황후’?! 그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나락으로 처박은 자의 입에 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호칭이었다.
“그 여자는 내 거야. 다신 네 눈에 담지 마라.”
황제의 윽박에 리오넬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제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황후를 폐위시킨 것일까.
‘나, 도저히 이곳에 못 있겠어.’
아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리오넬은 마음 깊이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황제의 손아귀에 그녀를 두지 않겠노라고. 리오넬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이제 고트로프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를이 리오넬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폐하!”
곁을 지키던 시종들이 놀라 만류했으나, 광분한 황제를 막을 수 없었다. 황제는 리오넬의 목을 조를 듯 손에 힘을 주었다.
“감히, 네놈이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보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 사태의 원흉은 바로 네놈이야.”
아, 이 얼마나 치졸하고 비열한가. 리오넬은 황제에게 깊은 환멸을 느꼈다. 고작 이런 자 때문에 그 고귀한 분이 그리도 모진 수모를 당하셔야 했다니. 대답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진 리오넬이 침묵하자 카를은 손을 탁 털어 냈다.
“리오넬 헤르베르트. 그대는 이 시간부터 황후궁에 한 발자국도 들일 수 없다. 입궁과는 다른 문제이니, 처신을 잘하도록.”
그리고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등 뒤의 리오넬이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카를의 다짐은 더욱 깊어졌다. 저 빌어먹을 새끼를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고. 그리고 황제가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리오넬의 다짐도 더욱 단단해졌다. 어떠한 의무도 다하지 않은 그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두 번 다시 그녀의 마음 한 가닥도 아프게 할 수 없도록. * * *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에흐몬트 전역을 탑의 영향권에 넣어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탑을 방치하고 있다.’
‘황후가 폐위된 진짜 이유는 이 년 안에 에흐몬트의 탑을 모두 파괴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발드르 공가가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작정하고 퍼뜨린 소문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황후가 폐위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지만, 심지어 폐황후는 앞으로 2년 안에 에흐몬트의 모든 탑을 없애겠다 공언했을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다. 여기에 탑에 관한 의혹이 더해지니 소문은 말 그대로 마른 들판에 붙은 불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빌어먹을. 내 가족들이 마수한테 몰살당한 게,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의 욕심 때문이랍디다.”
“국경일이라고 백성들을 먼저 챙기실 만큼 어진 황후 폐하께서 도대체 왜 그런 수모를 겪으셔야 한단 말이오!”
“정말로 에흐몬트 전역이 탑의 영향 아래 들면 마수들이 더욱 활개를 칠 텐데, 그럼 우리는 다 죽으라는 말인가!”
탑이라는 거대한 재앙에 고통받는 것은 평민이나 귀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소문은 분노를 연료 삼아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수도 전역이 들끓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 * * 리오넬은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우선 브룬힐 알렉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지금쯤 불안에 떨고 있을 동료들과 함께 몸을 사리며 상황을 지켜보라 당부하였고, 수도에 소문이 도는 추이를 예민하게 주시하며 민심을 파악했으며, 수도 밖으로 소문을 퍼트릴 사람들을 골고루 파견했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도래할 것을 알고 있던 이처럼 막힘 없이 일을 처리한 후, 그가 곧장 향한 곳은 발드르 공저였다. 집무실에서 한창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리오넬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출정을 앞둔 군인처럼 온몸에서 야성이 넘실거리는 리오넬의 기세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결심을 한 것인지, 굳은 눈매와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빛이 마치 금강석처럼 견고했다. 리오넬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묵례를 올린 다음 곧바로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보고했다.
“……예상대로 소문이 무섭게 번지고 있습니다. 수도 밖으로도 사람들을 파견하였으니, 곧 에흐몬트 전역에서 이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거침없는 리오넬의 추진력에 엘리자베타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과연 이대로 소문이 에흐몬트를 집어삼킨다면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도 한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아델라이드가 갑작스레 폐위된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으나, 기울어진 판도를 뒤집을 희망은 아직 살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리오넬의 용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제가 가져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이것이 있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소.’
그날. 황후궁에서 가녀린 손에 든 죽음을 가져가겠다 청하는 그를, 아델은 기어코 거절하였다. 작은 병에 찰랑이던 검푸른 액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리오넬의 심장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 선득해졌다.
‘나, 도저히 이곳에서 못 있겠어.’
금방이라도 저물어 버릴 것처럼 아득하게 낙담한 하얀 얼굴이 망막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다시는, 다시는 그 무엇도 그분을 아프게 두지 않으리라. 그것이 설령 황제라 할지라도.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델라이드 황녀 전하를 잠시 헤르베르트 후작저로 모실 생각입니다.”
단단한 목소리로 전한 내용은 보고가 아닌 ‘통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