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황후를 찾아온 재판관2022.01.01.
카를이 테라스를 떠난 뒤, 아델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황족이라는 신분의 무게는 늘 무거웠다. 타성에 젖어 잊을 법도 하건만, 아델은 단 한 순간도 그 무게를 잊어 본 적이 없다. 한데 오늘따라 어깨를 짓누르는 그것이 유난히 버겁고 지쳐서,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그때, 단정한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황후 폐하.”
고개를 들자, 늘 그랬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한편, 리오넬은 아델의 얼굴을 보며 등 뒤로 감춘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말씀을 들으셨기에 표정이 이러하신지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리오넬은 들끓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말간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보았다. 저 담담한 가면 너머, 무너지고 흐트러져 울음을 삼키던 진짜 모습을. 리오넬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따뜻한 음성에 아델은 눈을 깜빡였다. 참 이상하지. 늘 어리광이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던 것이 약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는데……. 어쩌자고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자꾸 눈물이 나고, 등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것일까.
“……무거워서.”
한참 만에야 나온 나직한 대답에 리오넬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함께 들어 드릴까요.”
“…….”
아델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빛에 잠긴 호의를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반듯한 눈빛, 곧은 콧날을 따라 미끄러진 그녀의 시선이 그의 움푹한 인중에 고였다가 붉은 입술로 흘러내렸다. 아델은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숨을 참았다. 그의 시선이 얼굴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후 폐하.”
하지만 귓가에 달라붙는 나직한 음성에 아델은 속절없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자, 마찬가지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동시에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델. 황족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품위를 지키거라.’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신분은 마치 한 몸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려놓을 방법도, 누구와 나눌 방법도 모른다.
“그건 나눠 들 수가 없어, 리오넬.”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난.’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자, 탄생부터 죽음까지 지고 갈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울지 마십시오…….”
“안 울어.”
“…….”
고집스럽게 울지 않는다고 우기는 그녀에게 리오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툭툭 떨어지는 목련 꽃잎처럼 눈물이 낙하했다. 리오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쓸어 냈다. 손끝에 꽃물이 든다. 달에서 미끄러진 꽃물이 툭툭, 밤을 적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델라이드 울리히 에흐몬트라는 이름에 붙어 있던 그녀의 영혼이 이름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아델, 그녀 자신조차 모르게. * * * 한편, 대신관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심지어 의아한 기색조차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미 황제로부터 이 일에 대해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데스포네 공작은 대신관과 황제를 번갈아 휙휙 바라보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크흠흠. 저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주십시오.”
대신관을 쳐다보던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데스포네 공작을 바라보았다. 데스포네 공작은 눈을 반짝이며 황제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찌하시려고요?”
카를은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했다. 데스포네 공작은 눈앞에 먹이를 둔 굶주린 짐승 같아서, 그 앞에 먹이를 내려놓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입속에서 굴리는 이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되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몇 번을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황후를 폐위시킬 것이오.”
황제의 말이 떨어진 순간, 데스포네 공작이 전율하며 얼어붙었다. 그는 방금 들었던 말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황후를 폐위시킨다? 황후를…… 폐위?!’
머리부터 시작된 짜릿한 환희가 온몸을 내달려 발끝까지 전해졌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누르느라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대신관의 시선이 느껴지자 공작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흐, 크흠흠.”
그리고 놀랍도록 빠르게 표정을 관리한 다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황후 폐하를 폐위시키다니요……. 합당한 사유가 아니라면,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대신관, 혹시 사유가 뭔지 아시오?”
“……자격 박탈이 가능한 사유입니다.”
“그게 뭐기에?”
빈틈없이 따라붙는 물음에 대신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 그게 뭐요 도대체?”
대신관이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 어렵다는 듯 난감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자 데스포네 공작도 그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초야 거부.”
멍하니 황제가 내뱉은 단어를 입으로 굴려 보던 데스포네 공작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야수의 그것처럼 거칠게 쾅쾅 뛰었다.
“초야 거부라……. 후사를 생산할 의무가 있는 황후가 황제와의 초야를 거부하고, 보좌관부터 들였다?”
“…….”
두 눈을 흉흉히 빛내던 데스포네 공작이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울리히 황가의 원로로서, 이 제국을 떠받치는 데스포네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폐위 사유가 초야 거부라면, 고트로프에서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폐하, 지금 당장 긴급으로 재판을 여셔야 합니다! 오늘 밤이 가기 전에 말입니다!!”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굴을 스치던 황후의 차가운 표정, 리오넬 헤르베르트와 맞잡은 하얗고 가는 손끝을 떠올렸다.
‘그래.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아델라이드.’
황제는 결심한 듯 눈을 뜨며 데스포네 공작을 향해 명했다.
“재판은 황후의 명예를 생각하여 비공식으로 치르겠소. 증인으로는 황후궁에 상주하고 있는 한나 긱스 백작 부인을 소환할 것이며, 울리히 황가 내부 재판이므로 결혼 증인을 섰던 데스포네 공과 그랜드 공을 공식 소환하는 바이오.”
“예,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신이 난 데스포네 공작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황제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묵묵히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대신관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일전, 내가 알아보라 한 것 말이오.”
“폐위된 황후의 복위 말씀이시지요? 선례가 없는 일이기에 관련 법령과 율법을 모두 뒤졌습니다.”
“그래서?”
“초야 거부는 틀림없이 폐위 사유가 되나, 그렇다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에흐몬트에서의 모든 지위가 사라지는 것뿐이지요. 본분을 다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그녀가 다시 모든 본분을 다하겠다 약조하면…….”
“예, 복위되실 수 있습니다.”
카를은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함구하시오. 나 이외의 누구에게든.”
“물론입니다.”
카를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재킷을 벗고 황제의 예복을 걸쳐 입었다. 평생 황족으로 살아온 그녀에게서 그 이름을 거둬 버릴 것이다. 돌아갈 곳 없는 그녀가 이 땅에서 황후로 살려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카를의 눈이 어둡게 넘실거렸다. * * * 테세우스는 리오넬과 아델이 있는 테라스를 어두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리오넬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그때였다.
“……저, 발드르 공작님.”
연약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테세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게 치장한 여성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디스 베오웬이라고 해요. 늘 말씀을 나누고 싶던 터라, 무례를 무릅쓰고 인사를 드려요.”
안경 너머 테세우스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엘리자베타를 바라보았다. 그녀 주위에도 수많은 귀족 청년이 진을 치고 있었다. 테세우스가 잠시 그녀에게서 떨어진 사이,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몰려든 것이다. 한때 부부였던 그녀와 정말 남남이 되었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 팠다. 테세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이디스를 바라보았다.
“레이디 이디스.”
그러자 이디스는 청초한 꽃망울처럼 웃으며 그에게 만남을 청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다면, 잠시 저와 대화를 나눠 보시겠어요?”
먼 곳에서 베오웬 후작이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재혼이면 어떠한가? 발드르 공가의 수장인데?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테세우스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레이디 이디스. 미안하지만, 사적인 만남을 원치 않습니다.”
구구절절한 변명 없이 어찌나 깔끔한 거절인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디스 베오웬이 잔뜩 실망하여 돌아서자, 테세우스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엘리자베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엘리자베타가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붉은 기가 도는 자색 눈동자, 위압감이 느껴지는 태도, 굳게 다문 입술. 소리 없이 젖은 마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마르지 않았다. 그것을 이미 겪었기에, 테세우스는 누구보다 리오넬이 걱정스러웠다. 사람들을 가로질러 다가온 엘리자베타가 그의 앞에 멈춰 서더니 작게 속삭였다.
“잠시 쉬어야겠어. 도저히 입이 아파서 더는 못 있겠소.”
어둡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둥둥 떠오른다. 테세우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녀를 한쪽에 마련된 소파로 이끌었다.
“잠시 쉬시지요.”
싸늘하고 냉철한 테세우스 발드르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디스 베오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고 하시더냐?”
다가온 베오웬 후작이 목소리를 낮춰 묻자 이디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화를 냈다.
“아버지, 지금 공작님 얼굴 좀 보세요! 사적인 만남은 원치 않으신대요.”
한편, 엘리자베타는 테세우스가 건네주는 샴페인 잔을 잡으며 속삭였다.
“황후께서 내일 보여 주실 것이라면, 아마도 일전 말씀하셨던 그 ‘지도’에 관한 것 아니겠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브룬힐 알렉사에 대한 뒷조사를 끝냈는데,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더군요.”
엘리자베타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귀족들을 쭉 살폈다.
“록펠러 가문에…… 작센까지 남았어?”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이 빠져나가자 푸아티에 남매도 곧 연회장을 떠났다. 평소대로라면 황제파 귀족들도 눈치를 보다가 뒤따라 자리를 뜨기 마련이었다. 한데 오늘은 중도파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황제파 귀족 일부마저 남아 있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테라스의 문이 열리며 황후가 다시 연회장에 나타났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거대한 권력의 물결을 지켜보며 엘리자베타가 중얼거렸다.
“내일 공식적으로 데스포네 공작을 압박하고 나면 완전히 판도가 달라지겠군.”
테세우스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화려하게 웃으며 제게 몰려드는 귀족들을 다시 상대하기 시작했다. 리오넬 역시 여전히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도 가 보자고.”
엘리자베타가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황후와 리오넬을 향해 막 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사람들 머리 위로 끼얹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검은 제복을 입은 네 사람이 들어왔다. 새카만 제복의 어깨에는 붉은 견장이 달려 있고, 오른쪽 가슴에는 황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특수한 제복을 본 귀족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살피던 그들이 황후를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하자, 아델의 뒤에 서 있던 리오넬이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저자들은 누군가?”
“황궁의 재판관들입니다.”
행여 불똥이 튈까 봐 서둘러 옆으로 물러나는 귀족들 사이로 재판관들이 위압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도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황후를 향해 달려갔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노려보는 리오넬의 기세에 재판관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리오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잘 벼린 한 자루의 명검 같은 위압감에 재판관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요란한 발소리도 급격히 작아졌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선 재판관들은 작게 목을 가다듬으며 배에 힘을 단단히 준 뒤, 리오넬이 아닌 황후를 바라보았다. 국방부 장관이 아닌 황후라면 좀 덜 무서울 것 같았는데, 요요한 금빛 눈동자를 보자 선득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같았다. 재판관 하나가 서둘러 눈을 내리깔며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에 대한 긴급 재판을 청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