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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황후는 돌아갈 곳이 없다 (76/127)

76화. 황후는 돌아갈 곳이 없다20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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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무를 보고 있던 카를은 갑작스러운 엘리자베타의 방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도 이복누이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카를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심한 듯 건성으로 손을 휘저어 그녀의 알현을 허락했다.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엘리자베타가 들어오자, 집무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카를은 싸늘한 표정으로 엘리자베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복누이를 보면, 그 사람이 떠올라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16553299088602.jpg“무슨 일이오.”

적개심이 가득한 황제의 눈빛에 엘리자베타는 숨을 억누르며 정중히 묵례했다. 황제는 명색이 그랜드 공작인 그녀에게 자리조차 권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타는 견고한 벽을 느끼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배에 힘을 주었다. 마주치는 시선에 살갗이 베일 것만 같다.

16553299088606.jpg“……폐하.”

16553299088602.jpg“말하시오.”

16553299088606.jpg“탑이 없어져도 폐하의 황좌는 공고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카를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엘리자베타는 진심을 담아 간곡히 말했다.

16553299088606.jpg“폐하의 권력은 탑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건재합니다.”

16553299088602.jpg“……거짓말.”

16553299088606.jpg“거짓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가 건드린 것은 황제의 역린이었다. 가슴 속 검은 바다가 거세게 출렁이자, 카를의 두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16553299088602.jpg“거짓말이야.”

16553299088606.jpg“…….”

16553299088602.jpg“누이도 듣지 않았소. 그대의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 그 누구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했었지. 기억나지 않으시오?”

카를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으르렁거리자, 엘리자베타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고해하듯 말했다.

16553299088606.jpg“선대 황후가 틀렸습니다.”

16553299088602.jpg“…….”

16553299088606.jpg“내 어머니가 잘못된 말을 한 겁니다.”

16553299088602.jpg“…….”

황제의 눈에서 기어이 악에 받친 눈물이 쏟아졌다. 카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난 맹수처럼 엘리자베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은 채 이글거리는 분노를 표출했다.

16553299088602.jpg“그 모든 순간을 방관해 놓고 인제 와서?”

16553299088606.jpg“…….”

16553299088602.jpg“늘 말했지만, 난 탑을 순차적으로 파괴하고 있소.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오. 알겠소, 누이?”

황제의 얼굴에는 그저 집착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타는 이를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데스포네 공작을 끊어 내고 나면 카를이 어떻게 변할지,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 * * 엘리자베타가 돌아간 뒤, 카를은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찬 바람이 밀려들었지만 추운 줄도 몰랐다. 황후는 리오넬 발드르를 파트너로 대동하여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라 했다. 리오넬의 손을 잡고 연회를 누빌 그녀를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카를은 황후에게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먼저 시작한 쪽은 누가 뭐래도 그였기 때문이다. 황후에 대한 마음과는 별개로, 황후가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그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카를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먼 곳에 있는 황후궁을 노려보았다. 데스포네 공작은 매일같이 황제를 찾아와 황후의 암살을 종용했다. 이 이상 지체하면 황후를 필두로 한 저들의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국경일이 끝나자마자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델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황후를 부추기는 발드르 공가 세력만 어떻게든 밀어 버리면 될 것 같은데, 현재로선 불가능했다.

16553299088602.jpg“황후를 어떻게…… 어떻게 해야 연결을 끊어 놓을 수 있을까…….”

황제는 며칠 내내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의 고민을 돕기 위함이었을까? 몇 달 전 고트로프로 보냈던 비밀요원이 두툼한 보고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카를은 고트로프 황녀 시절의 아델을 조사한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황궁 내부의 내밀한 사정까지는 알아내기 어려워 대부분이 공식적인 행적에 대한 기록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삶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윽고 긴 보고서를 다 읽은 황제가 고개를 들자, 요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3299103979.jpg“더 필요하신 자료가 있습니까?”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황제의 입만 바라보던 찰나, 황제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16553299088602.jpg“네가 보기에 말이다.”

16553299103979.jpg“예, 황제 폐하.”

16553299088602.jpg“황후가 다시 고트로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요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이자 황제는 설명을 덧붙였다.

16553299088602.jpg“그러니까, 고트로프에 황후가 돌아갈 자리가 있겠느냐 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원은 고개를 숙였다.

16553299103979.jpg“황후 폐하께서 고트로프로 가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로 다가갔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서슴없이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일렁이는 불꽃이 보고서를 삼키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16553299088602.jpg“더 궁금한 것은 없다. 수고했다. 가 봐라.”

16553299103979.jpg“예, 폐하.”

카를은 보고서가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벽난로 앞을 지켰다. 불길이 스며든 그의 두 눈이 위험한 빛으로 일렁였다.

16553299088602.jpg“스스로 떠날 준비를 했다……. 국혼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응하고, 그 누구도 데려오지 않았다…….”

카를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16553299088602.jpg“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떠나왔구나. 돌아갈 곳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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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델라이드는 고트로프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높은 자존심에 죽었으면 죽었지, 이곳을 떠나 되돌아가지는 못하리라. 그렇다면 여기, 에흐몬트에서 그녀의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

16553299088602.jpg“그대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건, 황후이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연결고리가 끈끈해 중간에서 끊을 수 없다면, 둘 중 한쪽의 힘을 빼 버리면 그만이다. 카를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시종을 불러 은밀히 명을 내렸다.

16553299088602.jpg“대신관을 데려와라.”

  * * * 황후는 국경일 예산의 일부를 백성들의 구휼에 사용했다. 쓸데없는 연회장 치장을 대폭 삭감하고, 이를 구휼 자금으로 돌린 것이다. 덕분에 국경일을 앞두고 황후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가장 시급한 것은 슬럼의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아델은 사비까지 동원하여 상하수도 공사를 지시했다. 일전 황제가 보낸 상인에게서 샀던 금 대부분이 수도 공사 비용으로 쓰였다. 이를 전해 들은 데스포네 공작은 국가 예산을 엉뚱한 데 쓴다며 성을 내었으나, 국경일의 준비는 황후궁 주관인지라 참견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국경일 전날, 수도 곳곳에는 커다란 제국 깃발이 걸리고 상하수도 공사가 한창인 니아바라 강 너머의 슬럼에 생필품이 잔뜩 배달되었다. 슬럼으로 향하는 리오넬에게 아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16553299143408.jpg“집마다 들러 나눠 주고 와. 혹 그날 봤던 소년을 만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 나쁜 어른이 되지 말라고 전해 줘.”

황후의 당부에 따라 병사들은 좁은 골목을 드나들며 모두에게 필요한 물품을 나눠 주었다. 슬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곳곳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황후가 보낸 물품이 지급되었다. 국경일 행사는 매년 열렸으나, 이렇게 대규모 구휼이 이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16553299103979.jpg“황후 폐하께서 나눠 주시는 거랍니다!”

16553299103979.jpg“아이고, 그래? 우리 황후 폐하께선 탑도 혼자서 파괴하셨다고 하던데?”

16553299103979.jpg“그래! 지난번 수도에 내려왔던 탑! 그것도 황후 폐하께서 파괴하신 거라더군!”

16553299103979.jpg“아, 그리고 슬럼에 상하수도 공사도 해 주신다고 하던데?”

백성들은 모이기만 하면 황후를 칭송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 * 한편 데스포네 공작은 오늘도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와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16553299143432.jpg“금쪽같은 국가 예산을!! 그렇게 쓸모없는 곳에다 퍼부었답니다! 방금 연회장에 다녀오는 길인데 말입니다! 어찌나 허접하던지. 연회를 왜 성대하게 합니까? 모두 폐하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닙니까?! 한데 그렇게 초라하게 꾸며 놓아서야, 폐하의 위신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기묘한 이질감에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다가 불쑥 물었다.

16553299143432.jpg“무슨 묘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황제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16553299088602.jpg“데스포네 공. 평생을 황족으로 사셨지요.”

16553299143432.jpg“……그렇지요?”

16553299088602.jpg“어느 날 갑자기 황족도 귀족도 아니게 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그러자 데스포네 공작은 얼굴을 팍 찌푸렸다.

16553299143432.jpg“작은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집에 살 수 있어도, 큰 집에 살던 사람은 작은 집에서 못 삽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가 황족도 귀족도 아니게 된다면…… 글쎄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다시 제 신분을 되찾으려 하겠지요.”

16553299088602.jpg“그렇지요?”

16553299143432.jpg“……그걸 왜 묻습니까?”

공작의 물음에 황제는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보았다. 황제의 눈빛을 본 순간, 공작의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자색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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