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저 황후, 정상이 아니야2021.12.18.
잠시 후, 테세우스와 엘리자베타가 도착하자 아델은 비밀 응접실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 엘리자베타는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데스포네 공작이 낸 소문을 전해 들은 탓이었다. 다행히도 황후는 무덤덤해 보였다. 이윽고 응접실 소파에 네 사람이 마주 앉자, 아델은 늘 그랬듯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작금의 제국은 개혁되어야 합니다.”
“물론이죠.”
엘리자베타가 맞장구를 치자, 아델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개혁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엘리자베타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데스포네 공이 정치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황제에게도 이 사태의 책임이 있지만, 황제를 직접 건드리는 것은 반역이니 지금 당장은 데스포네 공작을 쳐내야 했다. 아델은 엘리자베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브룬힐이 작성해 준 에흐몬트 전도를 그들 앞에 펼쳤다. 세 쌍의 시선이 일제히 지도 위로 떨어졌다. 아델이 하나하나 탑을 손으로 짚어 가며 데스포네 공작의 목표를 설명할수록 세 사람의 표정은 굳어 갔고, 급기야 엘리자베타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 정신 나간 미친 작자가…….”
아델이 ‘데스포네 공작의 궁극적인 목표는 제국 전역이 탑의 영향권에 들이는 것’이라며 설명을 마치자, 엘리자베타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지도를 훑고 있었다. 엘리자베타를 가까이에서 봐 온 테세우스는 그녀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음을 알아차렸다.
“……이걸…… 황제도 알고 계실까요.”
엘리자베타가 꽉 잠긴 목소리로 묻자 아델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언젠가 황제께서 내게 그러시더군요. 탑은, 자기 힘을 유지 시켜 주는 수단이라고요.”
리오넬은 시선을 돌리며 깊게 탄식했고,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타는 들끓어 오르는 가슴을 꾹꾹 밟아 누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 생각을 정리한 리오넬이 아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을 증빙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까?”
“알렉사 남작이 준비해 주기로 했소. 조만간 내게 가져올 거요.”
침묵하던 테세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국경일 연회가 끝나면 이것을 공론화하여 데스포네 공작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엘리자베타도 동조했다.
“그래야지요. 마법사단의 수장인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실권을 잃고 나면, 황후께서 마법사단을 맡아 주십시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나는 곧장 탑을 파괴하는 작업을 시작할 겁니다.”
그때, 듣고 있던 리오넬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모르니, 알렉사 남작의 주변도 조사해 보겠습니다.”
테세우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지 리오넬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저희 두 사람에게 맡겨 주십시오.”
아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두 분은 그녀 몰래 주변을 조사해 주시고, 저 역시 그녀가 자료를 건네주는 대로 여러분을 다시 부르도록 하죠.”
네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썩어빠진 에흐몬트를 어떻게 재생시킬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 * * 한편, 황제와 같은 의상을 맞춘 디안은 오랜만에 테이블에 앉아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마침내 데스포네 공작도 황후의 권력을 완전히 눌러 버리겠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애초에 고트로프의 황녀를 황후로 등극시킨 것도 그였으니, 그녀를 찍어 낼 수 있는 사람도 그뿐이리라. 그리고 공작은 디안을 찾아와 황제의 파트너 자리를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를 적당히 사용하다가 입맛에 안 맞으면 버릴 얄팍한 작자였지만, 서로의 이득이 맞아떨어지니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디안의 눈이 번득였다. 황제의 사랑을 갈구하며 무구하게 눈을 반짝이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이제 오직 하나였다. 때마침 정기 검진을 위해 의원이 찾아왔다. 디안이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눕자 의원은 그녀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입덧은 좀 어떻습니까?”
“없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지만.”
의원은 신중하게 디안을 살펴보았으나, 워낙 마른 체형인 데다 임시 초기라 그러한지 여전히 디안의 배는 납작했다.
“배는 언제부터 불러 오는가?”
“산모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이맘때쯤부터 불러 오기 시작합니다. 양수가 늘거든요. 한데 워낙 마르셔서 그러한지 이전과 변함이 없군요.”
“나는 태동도 느끼고 있는데.”
“…….”
의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월경, 복부팽만, 심지어 태동까지. 디안이 호소하는 증상은 분명 임신과 매우 닮아 있었다.
‘배가 확실히 불러 오면 그때 진단을 내리게!’
한데 어째서 상급 의원은 그에게 극구 확답을 미루라고 요구하는 걸까?
“제대로 된 진단은 도대체 언제 가능한가?”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한 달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지난달에도 그 말을 했잖은가!”
“죄송합니다.”
디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의원을 쏘아보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진단이 뭐가 필요한가. 어미인 제가 아이를 느끼고 있는데. 디안은 의원이 가고 난 뒤 한참이나 배를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파트너가 되어 연회에 참석하려면, 그녀가 앉을 만한 좌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연회장에 수많은 의자가 있겠지만, 황제의 아이를 가진 그녀가 아무 자리에나 앉을 수는 없는 법.
“한참 준비 중이실 테니 지금 가서 말씀을 드려야겠네.”
디안은 당당히 제 자리를 요구하기 위해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다시 업무를 보고 있던 아델은 갑작스러운 디안의 방문 소식에 눈을 가늘게 떴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 방문에 긱스 부인은 얼굴을 굳히며 이렇게 말했다.
“굳이 만나실 것 없습니다.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아델은 펜을 이리저리 매만지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됐소. 임산부 아닌가. 괜한 말이 나올 수 있으니 들여보내시오.”
“황후 폐하…….”
반박하던 긱스 부인도 황후의 단호한 표정에 말끝을 흐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델은 시선을 내리고 처리하던 업무를 이어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델은 펜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디안을 바라보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만난 디안이 몰라볼 정도로 바싹 말라 두 눈만 형형했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도 말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한편, 디안은 아델의 표정을 달리 해석했다.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내가 부럽겠지.’
디안은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아델은 그녀의 배를 힐끔 보며 책상 앞에 마련된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디안은 가볍게 묵례한 뒤 황후가 가리킨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기님을 품은 몸인지라, 황후 폐하께서 처음 국경일 준비를 하심에도 도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은근히 이죽대는 말이었으나, 아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당장 더 크고 중요한 문제들이 머리를 휘젓고 있으니, 사실 디안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편이 옳았다.
“괜찮네. 산모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는가? 용건만 간단히 말하게.”
황후의 깔끔한 표정에 디안은 묘한 반발심이 치솟았다.
‘끝까지 내 존재를 무시하고 싶은 모양이지?!’
디안은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당돌하게 요구했다.
“황제 폐하께서 저와 함께 연회에 입장하시는 것은 아시지요? 한데 제가 홑몸이 아니다 보니 연회 내내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디안은 눈을 치떠 황후를 바라보았다. 분명 잔뜩 화가 났으리라 예상했는데, 황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디안은 그제야 뭔가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황후는 디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것을 확인한 디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델은 차가운 표정으로 디안을 바라보며 물을 마셨다.
“안 그래도 그쯤에 자리를 마련해 둘 생각이었네.”
“…….”
디안은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그녀가 원하는 대로 얻었음에도 뭔가 크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델은 여상한 표정으로 디안의 앞의 종이를 회수해 서류 사이에 끼워 넣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용건이 끝났으면 가 보게.”
기세 좋게 달려왔던 것과는 달리, 디안은 위엄있는 황후의 명령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를 보는 황후의 등 뒤로 한낮의 가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뜨는데, 무슨 연유인지 황후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졌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말랐군. 입덧이 심한가?”
“…….”
디안은 멍하니 눈을 뜨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견디기 힘든 음식 냄새가 있다면 가기 전 긱스 부인에게 말해 두게.”
“…….”
“왜 그러고 섰는가. 가 보게.”
“……예.”
디안은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듯 황후궁을 벗어났다. 정신없이 황후궁을 빠져나온 그녀는 방향도 없이 걷다가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궁주님?”
로레인의 물음에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디안은 저도 모르게 제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손가락으로 목덜미, 어깨를 천천히 만져 보다가, 몸을 돌려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미쳤나 봐.”
“예?”
“저 황후…… 정상이 아니야.”
“궁주님!!”
로레인이 질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디안은 황망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저 여자는 정상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움푹 마른 뺨 위로 이유 모를 눈물이 길을 만들었다. * * * 그 시각, 엘리자베타는 수없이 고민하던 끝에 황제를 찾아갔다. 그녀는 위엄 넘치는 황제궁 입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주 오랜 과거가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어머니.’
바스라질 것같이 작고 여린 목소리에 어린 엘리자베타의 미간이 굳었다. ‘혼나겠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인 선대 황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디찬 목소리였다.
‘황후 폐하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니!’
‘……예.’
작은 사내아이는 풀이 죽어 어깨를 옹송그렸다.
‘……피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지. 이까짓 것이 황제가 될 수 있을지, 원…….’
어머니는 카를이 잡았던 옷자락을 탁탁 털며 엘리자베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가자, 리즈.’
왜인지 코끝이 시큰해진 엘리자베타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작디작은 소년은 악에 받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린 것이 집착이 얼마나 심한지, 소름이 끼치는구나. 제 어미가 누군지 알았으면, 생모에게나 갈 것이지 아직도 내게 어머니라니.’
‘…….’
엘리자베타는 어머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를이 어머니에게 구박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늘 침묵했다. 이유 모를 죄책감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날이면, 그가 좋아하는 인형이나 물건을 카를의 방 앞에 던져 주듯 두고 오는 것으로 감정을 해소했다. 그리고 엘리자베타가 찾아갈 때마다, 카를의 방엔 숙부가 있었다. 상심한 소년을 붙들고 꿀처럼 달콤한 말을 늘어놓던 숙부의 간교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나서야, 엘리자베타는 그때의 자신이 방관자였음을 깨달았다. 그간 그녀가 황제에게만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던 것은, 사실 그 시절의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타는 눈을 꾹 눌러 감은 채 깊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 황제궁 입구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