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랑을 어떻게 얻어 내었더라2021.11.06.
까마득한 심연을 헤매던 의식이 불쑥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저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리오넬!’
색이 참 오묘하게 예뻐서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왜 안 보이나? 아델은 두리번거리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리오넬!’
기대했던 나직한 목소리 대신 공허가 돌아오자 아델은 덜컥 겁이 났다. 검은 재앙 앞에서도 담대하던 심장이, 고작 이런 일로 조여들었다. 어디 갔길래 내가 부르는데 답이 없는 거야? 내가 여기에서 이름으로 부를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그래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는데, 어디 간 거야.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아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리오넬!!!’
아델은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가 있었다. 리오넬은 고개를 젖힌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나른하여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아델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곳곳에 채 지우지 못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좀 쉬긴 했을까? 단정한 턱선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가 별안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휙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아델은 왠지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를 불렀다.
“리오넬.”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힘없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그가 들었는지 걸음을 멈춘다. 몸을 돌리고 시선을 제게 맞춰 오자, 아델은 그제야 이정표를 찾은 사람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리오넬은 몸을 돌려 그녀를 볼 뿐이었다. 왜인지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절절해 보였다. 그래서 아델은 남은 힘을 쥐어짜 말했다.
“이리 와.”
그 한마디에, 그가 온다. 가슴이 뛴다. * * * 아델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뒤, 미지근한 물로 바싹 마른 입을 적셨다.
“괜찮으십니까?”
리오넬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묻자, 아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장관과 독대하고자 하니, 모두 물러가거라.”
방 안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과 기사들이 소리 없이 문밖으로 나가자 아델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
되묻는 말투가 어찌나 무신경하게 느껴지는지 리오넬은 미간을 굳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자, 아델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무구한 목소리에 리오넬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내상을 입을 정도로 마력을 사용하시다니요.”
“각오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것 같은데.”
“…….”
“아무튼, 사망자는 몇 명인가? 피해 규모는 어때?”
미간을 찌푸리며 아델을 타박하려던 리오넬은 말간 얼굴로 묻는 그녀 앞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껏 이 정도 누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그대라면 안 그랬겠나? 보아하니 장관이라는 자가 늘 선봉에 섰던 모양이던데.”
“…….”
“말해 줘. 피해 규모는 어떤가?”
“……사망자 열 명, 부상자 스물세 명입니다. 뷔에타 기사들의 피해는 집계하지 못했습니다.”
리오넬은 창백한 아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연민과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좀 더 일찍 나설 것을 그랬다.”
“황후 폐하 덕분에 많은 기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좀 더 일찍 움직일 것을 그랬어. 그럼 한 사람이라도 덜 죽었을 텐데.”
리오넬은 문득 마차 안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말고 구조하라. 인간에 대한 양심을 지켜 예의를 다하라.’
‘카인 녹스, 기벨린 루한, 테오도르 시니악. 그자들은 이 사람을 보내 놓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겠구나.’
얼굴 모를 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리오넬의 가슴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던 간악한 짐승이 시뻘건 발을 슬쩍 내밀었다.
‘그래도 나는 이분과 함께 있다.’
이성을 비집고 튀어나온 음험한 본심에, 리오넬은 누군가 제 마음을 읽을까 두려워 얼른 생각을 밀어 버렸다. 창백하던 새벽 공기에 금빛 햇살이 부옇게 섞여들기 시작했다. 아델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의 햇살을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획 고개를 돌려 리오넬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날을 샌 모양이군. 혹시?”
아델의 물음에 리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간밤,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리오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델의 금빛 눈동자에 날이 섰다.
“막사에서의 일은 레녹스의 소행일 것이라 말씀드렸지만, 이번엔 데스포네 공작이 배후라 추측됩니다. 수법이 정교하고 계획적이었습니다.”
“암살자는 생포했어?”
그녀의 물음에 리오넬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자결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데스포네 공작이 배후라면, 확실한 물증을 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잠시도 쉰 적이 없는 듯 피로한 얼굴로 사과하는 그에게 아델은 가볍게 웃어 주었다.
“암살을 막은 것만으로도 수고 많았어. 고마워.”
투명한 햇살을 머금은 아델의 얼굴이 맑게 빛났다. 리오넬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델은 붉어진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 * 한편, 그 무렵 카를은 어둠 속에 몸을 묻은 채, 홀로 시간을 되새기고 있었다. 홧김에 황후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출전하는 이들을 배웅하러 나갔다. 평상시엔 없던 일이었다. 오직 황후,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틀림없이 꽁꽁 얼어붙어 긴장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귀하게 자란 황녀가 아니던가? 한데 멀리서 바라본 황후의 얼굴은 두려움은커녕 생기로 반짝였다. 발 받침도 없이 거대한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을 땐 말문이 막혔다. 군마에 위풍당당하게 앉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를은, 그녀에게 향하는 또 다른 시선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리오넬 발드르. 그자 역시 황후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카를과 똑같은 눈빛으로. 황후와 리오넬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마치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시녀는커녕 시중인 한 명 없는 그곳에서, 황후는 누구에게 제 시중을 맡길 것인가? 황후 성격에 생전 처음 보는 여성 마법사들을 부릴까? 아니. 그럴 것 같지 않다. 틀림없이 리오넬 발드르, 그자를 곁에 둘 테지. 그리고 그는 보좌관이란 이름 아래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시중을 들 것이다. 바로 저 눈빛으로 황후를 바라보면서.
“제길…….”
카를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놈의 반반하고 고상한 낯짝을 황후의 주변에서 영원히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디안?”
“예. 만남을 청하시는데, 어찌할까요.”
안 그래도 황후와 리오넬 생각에 머리가 아프던 차였다. 카를은 억눌린 숨을 내쉬었다. 디안……. 디안 푸아티에.
“들여보내라.”
“예, 폐하.”
잠시 후, 얇은 겉옷을 걸친 디안이 사뿐사뿐 들어왔다. 그리고 순한 눈빛으로 카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폐하.”
“무슨 일이냐.”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녀는 황제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어둑한 침실, 일렁이는 불빛에 여인의 눈이 사슴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디안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애교 있게 물었다.
“오늘, 폐하 곁에서 잠들면 안 될까요?”
황제가 직접 황후의 출전을 명했다는 소식에 디안의 가슴은 벅차게 뜀뛰었다.
‘그래. 그는 황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는 디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서 직접 그를 찾아왔다. 그녀를 아무리 지옥에 처박아도, 아무리 비참하게 만들어도 디안은 쉽사리 카를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구불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 사랑을 원하는 눈빛. 한 떨기 백합 같은 모습을 보며, 카를은 선대 황제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생모가 죽던 날, 선황의 얼굴이 아직 생생했다. 그는 아주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를의 생모는 늘 선대 황제에게 저를 버리지 말라 애원했다. 카를은 그런 생모의 모습이 못 견디게 가련하고 불쌍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제 생모를 거론할 만큼.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날, 선대 황제는 왜 그렇게 속 시원해 보였을까. 참 지독하게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 그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일까. 적선은, 내 형편이 넉넉할 때나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은, 내 감정이 충만할 때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 형편없이 바닥을 치자, 동정과 적선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힘에 부쳤다. 연민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란, 그토록 가벼운 것이었다. 카를은 제 어깨에 조심스럽게 기대어 오는 디안의 몸을 천천히 밀어냈다.
“……폐하.”
“혼자 있고 싶으니 돌아가라.”
커다란 눈이 일렁이더니 결국 눈물이 툭툭 흘러넘쳤다. 하지만 카를은 그 눈물에도 동요하지 않고 다시 한번 차갑게 명령했다.
“돌아가.”
* * * 추적추적 걸음을 옮기며 디안은 하염없이 생각했다. 사랑을 어떻게 얻어 내었더라. 그와 처음 사랑하였을 때, 어떻게 하였더라.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은 식어. 식는 거다.’
문득 오라비의 말이 떠올랐다. 디안은 베아트리체 부인의 로켓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녀와 꼭 닮은 백합 같은 여인이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아닌가?’
디안은 입술을 깨물며 로켓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날처럼, 우주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단단하게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고, 머리 위로 드리워진 하늘이 쏟아져 부유하는 먼지처럼 허공을 떠도는 기분이다. 손에 쥔 이것이 답이 아니라면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무엇이 정답이지? 혼탁해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고 있던 디안의 눈앞에, 환영처럼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하늘색 눈동자가 천천히 커지면서, 스쳐 가는 인영을 따라 움직였다.
“아…….”
살랑살랑 흔들리는 금빛 머리카락, 가벼운 발걸음, 가느다란 몸.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느다랗게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스물아홉보다 어린 여성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긱스 부인의 저주가 디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베아트리체 부인은 스물아홉에 죽었다. 딱 지금 디안의 나이에.
‘그래서, 이제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는 거예요?’
고통만이 가득하던 눈동자에 서서히 분노가 차올랐다.
‘아니! 당신은 그럴 수 없어. 난 스물아홉에 죽지 않을 테니까.’
디안은 제 배를 감싸 안았다. 이 아기를 위해서라도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몸을 돌리는 디안의 얼굴은 마치 전투를 앞둔 투사처럼 살기등등했다. 상아궁으로 돌아온 디안은 로레인에게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아까 황제궁에서 본 그 시녀. 아무도 모르게 몰래 데려와. 아무도 모르게.”
“황제궁의 시녀를요?”
“그래.”
“……하지만 궁주님. 자칫…….”
디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난처해하는 로레인에게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입막음할 비용은 될 거야. 가서, 몰래 데려와.”
당장 오늘 그 시녀를 족쳐 놓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 * * 이슥한 밤, 로레인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몰래 황제궁에 숨어들었다.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시종에게 돈을 주며 금발의 시녀를 불러냈다. 그리고 시종에게 웃돈을 주어 입막음을 한 뒤, 디안의 지시대로 시녀를 몰래 상아궁으로 데려왔다. 영문도 모르고 로레인을 따라 걷던 시녀가 이상함을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녀는 상아궁 지하실로 끌려와 의자에 묶였다. 두려움으로 거칠어진 시녀의 숨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왜, 왜 이러세요?”
로레인은 시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잘못한 것을 말씀해 주시면 고칠게요…….”
“고칠 수 있겠어?”
“……예?”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온 디안이 의자에 묶인 시녀에게 다가왔다.
“푸, 푸아티에 영애…….”
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시녀의 머리가 한쪽으로 쏠렸다. 별안간 뺨을 얻어맞은 시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이 시녀의 턱을 세게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궁주님’.”
“…….”
“‘궁주님’이라고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