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2021.10.02.
타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인적 드문 길을 걷던 리오넬은, 멀리서 홀로 걸어오는 황후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허리를 세운 채 고고하게 걷던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온몸의 힘을 빼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햇살 받아 금붉은 빛으로 빛나는 얼굴은 여전히 초연했지만, 채 감추지 못한 답답한 속내가 드러났다. 황후는 아직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황후 폐하.”
불렀으나 듣지 못하셨다. 입속을 맴돌다 흩어질 만큼 작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
다시 한번 불렀으나 듣지 못하셨다. 리오넬은 땅을 바라보며 가만가만 걸어오는 황후의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에 발끝이 닿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얼굴이 어쩐지 웃는 것 같다. 동시에 힘이 빠진 듯 기울어져 있던 어깨가 반듯하게 올라갔다. 리오넬은 누군가 두 발을 땅에 묶어 놓은 듯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 걸음, 그의 그림자 속으로 발을 디뎠다. 휘영청한 금빛 눈을 빛내며 그를 본다.
“리오넬.”
“황후 폐하.”
“퇴궁하는 길인가? 이쪽으로 가나?”
“폐하야말로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산책.”
그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굳자, 아델은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주위를 괜히 둘러보았다.
“그래. 이제 돌아가야지.”
그리고 몸을 돌리며 황후궁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던 길?”
“그렇습니다.”
“그럼 같이 가자.”
웃음 섞인 아델의 목소리에 리오넬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 표정. 좀 전까지 터덜터덜 힘없이 걷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황후는 여유를 걸쳐 입으려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뭐 해? 가자!”
“카인 녹스, 기벨린 루한, 테오도르 시니악.”
별안간 그의 입을 통해 튀어나온 이름에 아델은 숨을 삼켰다.
“말씀하시면 언제든 그들을 부르겠습니다.”
“…….”
“필요하시다면 언제고 제게 말씀하십시오.”
리오넬은 검은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들을 데려오는 일이 그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을 텐데도. 찬 바람이 새어 들던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호의는 따뜻한 칼 같았다. 부드럽게 가슴에 파고들어 단단한 벽을 서슴없이 갈라 내고 가장 여린 살을 드러내게 한다. 그의 큰 체격이 오늘따라 더욱 듬직해 보였다. 약해진 마음이 자꾸만 그의 어깨에 기대라며 그녀를 부추겼다. 아델은 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보좌관을 참 잘 뽑았지.”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오넬이 넓은 보폭으로 단숨에 황후를 따라잡아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걸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나랑 같이 탑 부수고 다니던 사람들.”
“탑 대항본부를 맡은 사람들이겠군요. 고트로프의 녹스 가문이라면 들어 봤습니다.”
“그래? 하긴, 녹스는 유서 깊은 명문가니까. 카인 녹스는 그 가문의 외동아들이야.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탑 부순다고 나를 따라다니는 바람에 가주가 틈만 나면 나한테 와서 사정을 했다니까.”
“탑 대항본부에서 배제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지. 근데 카인이 나만큼 탑을 잘 부숴.”
“곤란하셨겠습니다.”
그러자 아델은 그때를 떠올렸는지 쿡쿡 웃었다.
“그런 말은 댁의 아드님에게 가서 하라고 화를 좀 냈어. 그런데도 제 아들보다 내가 덜 무서웠는지 그 뒤로도 나한테 사정을 하더군. 그럴 줄 알았지.”
고향 이야기를 하자 황후의 표정이 가벼워졌다. 그녀의 얼굴이 등 뒤로 쏟아지는 석양에 파묻혀 어둠에 잠겼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면 강렬한 붉은 빛에 감싸이길 반복했다. 말간 얼굴 위로 속눈썹과 오뚝한 콧대, 그리고 도톰한 입술 산이 그림자를 만들어 내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이 자꾸 보고 싶어서 일부러 고트로프가 궁금한 척 질문하는 리오넬에게 아델은 눈을 빛내며 성실히 답을 해 줬다.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오넬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몽환적인 붉은 빛에 감싸인 두 그림자는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림자 속 두 사람은 황후와 보좌관이 아닌 그저 여자와 남자처럼 보였다.
그때, 아델이 문득 그가 입은 재킷을 가리켰다.
“이 재킷, 어디 거야?”
리오넬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주로 집사가 주문해서.”
“혹시 여자 코트는 안 만드냐고 물어봐 줘. 엄청 따뜻하더라.”
아델은 문득 그 옷에서 나던 좋은 향기를 떠올렸다.
“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아델은 말투를 신경 쓰면서 슬쩍 물었다.
“무슨 향수를 쓰는 거야?”
“네?”
리오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델을 바라봤고, 아델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냥 궁금해서.”
“……저는 향수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 정말?”
이번엔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델이 슬쩍 몸을 기울이며 숨을 크게 들이켜자 리오넬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귀 끝이 달아오르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델은 몸을 바로 하고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군.”
리오넬은 황후를 뒤따르며 괜히 제 옷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향수를 쓰는 쪽은 그가 아닌 듯했는데. * * * 한편, 그 무렵 뷔에타 후작령. 이곳에는 다행히도 슬럼이 생성되지 않았지만, 집집마다 피난을 온 친척들로 북적였다. 어른들이야 불편해도 아이들은 그저 늘어난 또래들과 몰려다니며 놀기 바빴다.
“그럼 찾는다!!!”
숨바꼭질 놀이에서 술래가 된 아이가 커다랗게 외친 뒤 획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친구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쭉 눈으로 훑다가 곧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친구가 숨어 있는 수레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쾅!!!
“꺅!!”
“으악!!”
몸을 숨기고 있던 아이들도, 친구들을 찾으려던 아이도, 길을 걷던 어른들도 모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콰콰쾅!!!
“엄마아!!!”
“꺄아아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아이들이 놀라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후작성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뷔에타 후작과 가신들도 엄청난 굉음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집무실 테라스로 달려 나가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따라 나온 가신들도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누군가가 기도하듯 읊조렸다. 그러나.
“안 돼…….”
뷔에타 후작은 침음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힘이 들어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붉게 물든 하늘 중앙에 검은 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후작은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며 달려오는 재앙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재앙을 모면했던 것은 운에 불과했을 뿐, 언제고 저것이 후작령을 덮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하고 있었다. 탑이 떨어지는 위치를 파악한 후작이 몸을 돌리며 빠르게 지시했다.
“남부 일대의 모든 마을에 피난령을 내리고 후작 성문을 개방해라! 후작성에 진을 치고 쏟아져 나올 마수에 지금부터 대비하라!”
“예, 각하!”
“그대는 지금 당장 봉화를 올리고 전서구를 띄워라! 수도에 파병을 요청해!”
“예, 각하!”
“우리는 부디 수도에서 파병이 오기를 기도하며……. 최대한 버틴다.”
끝내 마법사를 지원받지 못해 괴멸 중이라던 칼뱅 백작령의 일을 떠올린 후작의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뷔에타 후작령도 그렇게 될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오직 황제와 데스포네 공작만이 알 것이다.
“제발…….”
후작의 간절한 중얼거림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에 묻혔다. 뷔에타 후작령의 주민들은 붉게 변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 그들의 어깨는 너무나 가련해 보였다. * * * 상아궁 임차 건에 관한 승인이 떨어졌다. 시녀들이 짐을 챙기는 사이. 디안은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상아궁에 먼저 가 있어도 되지만, 디안은 가지 않고 기다렸다. 황제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디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도 디안이 부른 것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그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 하지만 디안은 결국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오늘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상아궁에서 쫓겨나던 날도 찾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다를까? 며칠 밤낮, 모래알을 헤아리듯 시간을 세며 디안은 생각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잔인한 것이었다. 디안은 배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눈이 슬프게 일렁였다. 쿡쿡, 태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주치의는 지금 시기에 태동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디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불안할 때마다 아이는 쿡쿡, 그녀의 배를 두드렸다.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라니.
‘……그럼 나는 어떡해.’
디안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렇게 주저앉아 가슴앓이하며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대략 아홉 달. 그사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이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을 것. 둘째, 반드시 그녀 자신이 아이의 어머니로 인정을 받을 것. 디안 푸아티에의 눈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매섭게 빛났다. * * * 집무를 보고 있던 카를은 문을 열고 나타난 디안을 힐끗 보았다가,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무슨 일이냐.”
“…….”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자,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디안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졌다. 카를은 늘 그녀의 웃는 얼굴만 보아 왔다. 때때로 눈물을 흘렸지만, 그때조차 디안은 카를을 향해 웃었다. 그랬기에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디안?”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부르자, 디안이 천천히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폐하.”
“말해.”
“저 오늘 상아궁으로 돌아가요.”
그 말에도 황제는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막대한 임차금액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도, 잘되었다는 가벼운 축하도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디안은 제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태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 아이는 분명 아주 쾌활한 성격을 가졌을 거예요.”
“…….”
“찾아오셔서 종종 아기에게 말을 걸어 주시면 안 될까요?”
디안은 카를의 얼굴을 예민하게 살폈다.
“아이는, 친부모의 사랑이 필요하잖아요?”
“…….”
“저는 지킬 힘이 없어요. 황후께서 이 아이를…… 인정해 주실까요? 저와 폐하의 아이를요?”
“그만.”
“저와 이 아이를 버리지 마세요, 폐하.”
씨근덕거리던 카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늘 약한 줄만 알았는데, 디안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카를이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는 늘 내게 버리지 말라 이야기하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무수히 말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어요.”
“난 너에게 늘 말했어. 내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여기라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안이 되물었다.
“요즘 저에게 사랑을 주셨어요?”
“…….”
“제가 상아궁에서 쫓겨 오던 날, 폐하는 어디 계셨어요? 제가 이곳에 있는 내내 한 번이라도 저를 찾아 주셨어요?”
디안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울며 매달릴 작정으로 온 것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의 둑이 터져 버렸다.
“왜 갑자기 저에게 이러시는 거예요…….”
그녀는 카를의 팔을 붙잡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그때, 울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카를이 천천히 뒤로 밀었다.
“……!!”
그녀가 놀란 얼굴로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 줌의 애정, 혹은 동정도 없는 시선으로 디안을 보았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재킷에 눈물이 묻어 얼룩이 졌다. 그것을 확인한 그가 단추를 툭툭 풀고 재킷을 벗었다.
“아…….”
디안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가슴에서 시작된 싸늘한 것이 순식간에 복부를 스쳐 지나가자 별안간 배가 아픈 것 같았다. 디안이 황급히 몸을 돌려 그의 집무실을 나올 때였다. 새로 온 서류 시녀인 듯, 품에 서류를 한 아름 든 여자가 사뿐히 집무실 문을 넘었다.
“……너, 나를 봐라.”
디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시녀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조심스럽게 디안을 마주 보았다. 윤기 흐르는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 봄의 싱그러움을 닮은……. 절정의 봄도 한철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디안, 그녀에게만큼은 다르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뭣 하느냐, 들어오지 않고?”
집무실에서 황제를 돕던 시종이 시녀를 부르자, 그녀는 디안에게 인사를 올린 뒤 집무실로 들어갔다. 디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나왔다. 슬픔의 눈물이 가득했던 두 눈에 천천히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