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에흐몬트로 향하는 카인과 기벨린2021.09.28.
황후의 말에 리오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했다.
‘슬럼을 없애려면 탑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더운 여름이면 슬럼의 악취가 황궁까지 스며들었다. 이를 참다못한 카를이 그 거대한 오물 덩어리를 밀어 버리고자 수차례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발드르 공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럼 슬럼의 그 많은 사람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카를이 아델에게 공격적으로 되물었다.
“리오넬 발드르, 그자가 그리 말하라고 부탁을 하던가?”
“아뇨. 슬럼 또한 제가 가겠다 했습니다. 병원이나 학교는 고사하고 수도시설조차 없어 열악하더군요. 그런 슬럼이 제국 전역에 만연하다 들었습니다. 폐하, 탑을 없애셔야 합니다.”
황후의 말은 황제에게 닿지 않았다. 리오넬 발드르가 그녀 위로 겹쳐지는 순간,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린 탓이다. 리오넬 발드르. 아주 예전부터 그자는 카를에게 존재만으로도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리오넬 발드르는 아직 소년인데도 어쩜 그리 근사한지. 혈통도 완벽하고 능력도 출중하지. 내게 딸이 하나 더 있었다 해도 틀림없이 리오넬 발드르와 약혼을 시켰을 게야.’
선대 황후는 유난히 발드르 형제를 총애했다. 카를에겐 손톱만큼의 애정도 주지 않으면서, 늘 그들을 아꼈다. 엘리자베타와 테세우스의 약혼을 추진한 것도 바로 선대 황후였다. 오래 묵어 질척하고 시꺼메진 분노가 시시각각 몸집을 불렸다. 황제는 기어코 버럭 화를 냈다.
“탑은!! 나의 권력 기반이오!! 그것이 없었다면, 귀족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리라 생각하나?!!”
데스포네 공작의 속삭임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출신이 미천한 폐하께, 귀족들이 그 고고한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탑으로 목줄을 단단히 쥐고 계셔야지요.’
거의 발작에 가까운 황제의 아집에 아델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탑이 없다면 귀족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겠냐니? 지금 이것이 정녕 황제가 할 말인가?! 너무나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화가 치밀었다.
“어찌 재앙을 권력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슬럼의 주민들은 생활 기반이 무너져 세금도 낼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낼 백성이 줄어드는 것만큼 폐하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어디 있답니까?”
“거기까지. 이제 그만하지.”
황제가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려 버리자, 아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난 걸음으로 집무실 한 편으로 가더니 둘둘 말린 지도를 가져왔다. 그리고 찻잔을 옆으로 치운 뒤 지도를 테이블에 쫙 펼쳤다. 지도에는 붉은 잉크 자국이 가득했다. 카를이 사나운 눈으로 아델을 노려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이게 다 뭔지 아십니까?”
아델은 형형한 시선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탑의 영향권을 표시해 둔 지도입니다. 탑과 마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안전한 지대가 몇 군데나 되는지 보십시오! 지옥이 별것입니까?”
아델을 노려보던 카를의 시선이 천천히 지도로 내려갔다.
“상황이 이런데 수도의 슬럼은 어찌 없애시렵니까? 없애면, 그곳에 살던 이들은 어디로 갑니까?! 죽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아델은 지도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황제를 향해 간곡히 호소했다.
“적극적으로 탑을 없애십시오. 백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권력을 휘두르신다면, 그 칼날이 반드시 폐하께 돌아올 것입니다.”
아델은 간절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것은 단순히 에흐몬트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에흐몬트의 황후가 된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델은 황후로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황제를 혐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어쩌다 고트로프 황태녀의 직위까지 내려놓고 이곳까지 유배 보내지듯 오게 되었는가. 아델은 카를에게 다시 한번 간절하게 말했다.
“부디, 탑을 없애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묵묵히 지도를 응시하던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발 알겠다고 말해.’
그 찰나의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아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마침내 황제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아델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 눈에 어린 결심은,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말하지 않았소? 탑은 내 권력의 기반이라고. 그게 없어지면 그대는 무사할 것 같소? 그때에도 발드르 공가가 그대와 손을 잡겠다고 약조라도 했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가 무감한 시선으로 지도와 아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 왜 스스로를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는지 말이야. 그저 내가 내민 손을 잡기만 하면 편안할 것인데. 지금은 그래야 할 때 아닌가? 지도에 저런 표시나 할 것이 아니라.”
그 비아냥에 발끈한 아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를 마주 보며 경고했다.
“탑을 이대로 두면, 오래지 않아 분명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저는 에흐몬트의 황후입니다.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이를 살핀단 말입니까?”
“이보시오, 황후.”
“…….”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마시오. 나쁜 것도 보지 말고.”
“…….”
황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테이블을 돌아 아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는 꽃이 어울리니.”
아델은 황제의 말을 대놓고 비웃었다.
“처음 듣는 소리네요.”
카를도 피식 웃으며 황금빛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손 내밀면 닿을 듯 지척에 있는 강렬한 금빛, 먹먹한 어둠을 찢고 나타난 한 줄기 존귀한 빛. 막연히 인정받고 싶던 아이는 자라 성인이 되었고, 이제는 그 빛을 다른 방법으로 손에 쥐고 싶어졌다.
“탑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제대로 바로잡으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이 고운 얼굴로 생지옥을 헤매어 보겠다고? 아무리 홀로 탑을 파괴했다지만 고작 중급 탑 아닌가? 고트로프에서도 온갖 대우를 받아 가며 순회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 한번 해 보라지.
“그래. 그러면 말이오, 황후. 다음번에 탑이 내려오면, 그대가 나서 보시오. 내 그대를 선봉에 세워 보내 드리리다.”
도전적인 금빛 눈동자는 그럼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황제도 입매를 비틀었다. 바라던 바라? 좋아. 가장 가혹한 곳에 밀어 넣어 주지. 이 예쁜 입에서 다신 하겠다는 말을 나오지 못하도록. * * * 한편, 그 무렵 고트로프의 태후궁.
“누가 간다고?”
누워서 마사지를 받던 태후가 몸을 일으키며 묻자, 말을 전한 시녀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태후의 분위기를 파악한 시녀장이 얼른 웃옷을 가져왔다. 시녀들이 종종거리며 물러나자 태후가 말을 전한 이를 손짓하여 불렀다. 그리고 웃옷을 걸쳐 입으며 다시 물었다.
“누가 간다고?”
“카인 녹스, 기벨린 루한이 은밀하게 항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 둘은 아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이들이자 고트로프 탑 대항본부의 핵심 인물로, 황녀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으로?”
“그런 듯합니다.”
“더 알아 온 것은?”
“황제 폐하께서 그들에게 편지를 전하신 것 같은데, 그 내용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나가 봐.”
시녀가 잰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태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는 사이, 태후가 입을 열었다.
“보나 마나 뻔하지. 황제는 제 누이를 끔찍이도 생각하시니 힘들면 돌아오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겠느냐?”
“예, 태후 폐하.”
태후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딸을 그리 보내 놓고 나라고 속이 편하겠느냐?”
그녀의 눈이 깊고 어둡게 침잠했다.
“아델은 나를 닮았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갈려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만약 그 애가 나와 뜻이 같았다면……. 나는 아델의 아주 재미있는 동맹자이자 가장 든든한 힘이 되었을 거야.”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만약 아델이 태후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리하여 아델이 고트로프의 황제가 되었다면 모녀는 화통하게 웃으며 천하를 함께 누렸으리라.
“아델, 그 아이는 말이지. 누구보다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어울리지 않아. 너무 맑은 물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거든. 제 신념을 위해 과감히 목숨까지 내놓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해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어.”
태풍이 몰아치면 갈대는 살아남지만, 나무는 꺾이는 법.
“그 아이는 가장 이상적인 황제이나, 역설적으로 오직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황제다.”
마침 태후의 머리 단장을 끝낸 시녀장이 한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저들이 만약 황녀님을 고트로프로 모시고 온다면 어찌합니까?”
그 물음에 태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태후의 눈이 점점 붉게 변하더니 눈물이 고였다.
“떠나기 전, 아델이 황실 의원에게 은밀히 극약 두 병을 받아 갔다 하더구나.”
“극약 말입니까?”
고인 눈물이 툭툭 턱을 타고 떨어져 붉은 치마를 적셨다.
“그래. 그 애답지 않으냐? 그건 말이다,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다.”
아델은 후퇴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할 아이였다. * * * 에흐몬트로 향하는 커다란 상선이 닻을 편 채 부는 바람을 타고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푸른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길을 열었다. 뱃머리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해풍에 흩날리는 긴 은발과 짙은 녹음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의 이름은 카인 녹스.
에흐몬트가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의 눈이 깊은 바다처럼 가라앉았다. 그때, 한 사람이 불쑥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난간을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벨린, 위험하다.”
그 말에 곰처럼 덩치가 큰 사내가 화통하게 웃었다.
“하하하! 가녀린 너는 바람에 휙 날려 빠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냐!”
“…….”
카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벨린이 투박한 손으로 카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게, 떠나시기 전에 솔직하게 마음이라도 내보이며 가지 마시라고 빌어 보기라도 하지.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시끄럽다.”
카인의 차가운 대꾸에 기벨린은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적였다. 하긴. 그랬다 한들 상황이 달라졌을까? 실제로 무수히 많은 이가 이렇게 가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그분의 발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얼마나 가차 없이 털어 내고 가셨나? 추종자가 많은 황족은 어쩔 수 없이 분란의 씨앗이 된다. 쥐똥만큼의 계승권도 없는 방계여도 위험한데, 하물며 한때 후계였던 분이시니.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존재가 고트로프에 위해가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토록 가차 없이 버리고 가신 것이다. 기벨린이 한숨 쉬듯 말했다.
“우리가 간다고 좋아하실지나 모르겠다. 불행하다면 모시고 오라고?”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신의 불행과 행복을 염두하고 가신 길이 아니시지 않나. 불행하니 고트로프로 데려가 달라고 하실 분이 아니지. 우리가 그분을 고트로프에 모셔온다면, 내 보기에 딱 하나밖에 없다.”
먼바다를 응시하던 카인이 고개를 돌려 기벨린을 바라보았다. 기벨린은 녹음의 시선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폐위를 당하셨을 때. 오직 그 경우밖에 없어. 근데 생각만으로도 열 받네? 만일 그렇다면 내 반드시 에흐몬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아무튼 모시고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이지. 기벨린의 중얼거림은 거센 해풍에 밀려 사라졌다. 카인은 흐트러진 은발을 쓸어넘기며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뭐 하러 따라왔나? 테오도르 대신 남아 있지.”
그 말에 기벨린은 다시 씩 웃으며 난간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투박한 눈빛에 그리움이 섞여들었다.
“우리 황녀님이 잘 계신지 궁금해서 그러지. 두고 봐라! 우리 황녀님을 언짢게 만든 놈들이 있으면 몰래 가서 두들겨 패 놓을 테니.”
“퍽이나 좋아하시겠군.”
“시끄러워. 이건 테오도르가 부탁한 거거든?”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는 대신 테오도르 시니악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투덜거림이 귓가에 들리는 듯해서 기벨린은 귀를 후벼팠다.
“으…… 배를 한 달이나 타야 한다니. 벌써 지겹다, 지겨워!”
카인은 기벨린이 객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남아서 가없는 수평선 너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에흐몬트로 향하는 이 길의 끝에, 그분이 계신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 * * *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다. 피곤함이 눅눅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아델은 복잡한 기분을 밀어 두기 위해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답답함이 해소되진 않았다. 사실 해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인,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소.”
방을 서성이던 아델이 우뚝 멈추며 말하자 대기 중이던 긱스 부인이 얼른 황후의 겉옷을 챙겨 왔다. 황후를 따라갈 셈으로 이미 본인도 겉옷을 챙겨 입은 채였다. 아델은 부인이 내미는 겉옷을 걸쳐 입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홀로 다녀오겠소.”
“안 됩니다, 황후 폐하. 곧 해가 질 것입니다.”
“멀리 안 갈 거요. 어둡기 전에 돌아오겠소.”
“그래도 안 됩니다.”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도록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내가 좀 예민해서.”
“…….”
아델은 예의 웃음으로 긱스 부인의 입을 막은 뒤, 붙잡힐세라 얼른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남들의 이목을 의식하여 정문이 아닌 쪽문으로 빠져나가는 치밀함마저 보였다. 긱스 부인은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긴 한숨을 내쉬며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에 근심과 걱정이 어렸다. 참 묘하게도 황후는 엘리자베타 황녀와 닮아서 더 마음이 쓰였다. 엘리자베타가 결국 어찌 되었나? 테세우스 발드르 공작과 이혼하고, 결국 쫓겨나듯 영지로 내려가게 되지 않았던가? 비록 정략결혼이었으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그들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긱스 부인은 속이 상해 며칠 밤낮을 지새웠다.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혼했는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데스포네 공작과 황제가 황녀의 배우자에게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는 법안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발 앞서 이를 알아낸 엘리자베타는 과감히 발드르 공작과의 이혼을 추진했고, 수도를 떠났다. 긱스 부인은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돌아오시거든 목욕을 하겠다고 하실지 모르니 물이라도 데워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 * * 해가 저물 무렵이 되자 바람이 더욱 매서워졌다. 꼭꼭 여민 품으로 찬 바람이 파고들었으나, 아델은 추운 줄도 몰랐다. 낮에 리오넬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아델은 온몸에 힘을 빼고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속이 끓는 이유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밀어 버린 채로. 서쪽 하늘에 간신히 걸린 해가 투명하게 붉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마도 서쪽을 향해 걷고 있던 모양인지 눈이 멀듯 강렬한 빛이 정면에서 쏟아졌다. 아델은 시선을 바닥에 두고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짝 드러난 발끝이 흔들리는 치맛자락에 사라지고, 또 드러나는 발끝이 사라지는 장면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면서. 그렇게 정처 없이 다시 한 걸음을 옮기는데, 검은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다. 아델은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발끝에 닿았던 그림자가 한 걸음에 발목을 적시고, 또 한 걸음에 무릎을 적셨다. 수면 아래로 걸어 들어가듯 아델은 그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완전히 그의 그림자에 잠겼을 때, 그녀가 그를 불렀다.
“리오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