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카를의 본심2021.09.18.
“……폐하?”
디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음에도 황제는 답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디안의 배에서 손을 떼어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태도가 어찌나 냉담한지 디안은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임신이라고?”
“…….”
“주치의가 확실하게 진단한 것이냐?”
이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감격하여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 버렸고, 대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 아뇨. 다만 임신 초기 증상에 해당하니…… 몸을 조심하라고…… 일렀어요.”
“언제 제대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고 하던가?”
“한 달 뒤요.”
“그렇군.”
카를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냥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디안은 이대로 멀어질 것 같은 황제를 다급히 붙잡았다.
“폐하!”
다시 몸을 돌려 응시하는 얼굴은 분명 황제였다. 그녀가 사랑하던 황제. 그녀를 사랑하는 황제!
“기쁘지 않으세요?”
그렇게 묻고 난 뒤 디안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흐르고, 황제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기쁘구나.”
“…….”
침묵이 길었던 탓일까, 아니면 무감한 어조의 문제일까.
“몸조심해라.”
황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디안은 황망한 얼굴로 그가 떠난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신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랗게 뜨인 하늘색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심장이 어찌나 세게 뛰어 대는지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괴로워하던 그녀의 뇌리를 뭔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강타했다. 황제의 생모, 베아트리체 부인의 말로는 어떠했는가?
“아…….”
아들, 그것도 후계를 낳았음에도 그녀는 황제의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들을 낳자마자 선대 황후에게 빼앗겨 아이가 6살이 되는 해까지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카를은 늘 그런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그래서 디안에 대한 대우는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은……. 그러다 디안은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카를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생모 베아트리체 부인에 대한 기록을 바로잡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선대 황후의 양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 베아트리체 부인에 대해선 한 줄의 언급조차 없다. 충분히 바꿀 수 있음에도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인가? 디안의 숨이 거칠어지자 로레인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궁주님,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세요. 여기 물을 좀 마시구요.”
어찌나 턱이 떨리는지 로레인이 먹여 주는 물이 입가로 흘러 이불을 적셨다.
“괜찮으세요? 주치의를 다시 부를까요?”
디안은 대답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몸을 말며 들어갔다. 너무 추워서 아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떠올랐다. 카를 울리히는 혹시 나와의 아이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내 아이를 황후에게 주지는 않을까? 선대 황제가 그랬듯이. 더불어 아이의 친모인 나에 대한 기록은 한 줄도 남기지 않으리라. 그가 그랬듯이. 황후, 황후……. 그 여자에게 내 아이를 주고야 말 것이다. 디안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새우처럼 몸을 말며 자신의 배를 감싸 안았다.
“아가. 난 절대 너를 뺏기지 않을 거야, 절대로.”
* * * 무표정하게 디안의 방에서 나온 카를은 곧장 제 담당 주치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시종까지 내보낸 방에 홀로 남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일정하게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미간은 굳어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디안이 전한 소식이 조금도 기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잠시 후, 담당 주치의가 긴장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카를은 여전히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향해 눈만 치켜떴다. 톡톡톡.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주치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황제가 자기를 왜 불러들였는지 이미 예상하고 온 듯 황급히 변명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폐하.”
“…….”
그럴듯하게 변명해 보라는 듯한 황제의 싸늘한 표정에 주치의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안 그래도 황제에게 불려오기 직전, 주치의는 디안을 진찰한 이들에게 제대로 진단한 것이 맞냐며 마구 성을 낸 참이었다.
“정말이지 확률이 낮습니다.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합니다. 제가 그 약을 얼마나 많이 처방했는데…… 한 건의 오류도 없었습니다.”
“그 단 한 건의 오류가 그럼 나인가?”
황제의 불만스러운 말에 주치의는 얼른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하. 진단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초기 진단은 정말이지…….”
카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냉혹한 눈빛으로 주치의의 머리를 노려보다가 짜증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이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두 사람의 입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진단이 정확하다면 몇 달 뒤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될 터였다. 황후가 알게 되면, 그에게 뭐라 말할 것인가? 차갑고 싸늘한 아델의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축하한다고 할지도. 그러나 아델의 입장에선 가뜩이나 약한 입지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릴 일이었다. 순간, 카를의 뇌리에 섬광 같은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의 보라색 눈이 가늘어졌다.
“입지가 흔들릴 일이라…….”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주치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황제를 살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연신 무언가를 생각 중이었지만, 결코 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아비의 표정은 아니었다. * * * 마법사단 관저로 돌아온 레녹스는 데스포네 공작의 부름에 곧장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숨을 골랐으나 입꼬리가 들썩이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레녹스는 데스포네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공작은 뭔가를 생각하는 중인 듯했다.
“공작님. 부르셨습니까?”
데스포네 공작은 들어오는 레녹스를 힐끔 보았다가 소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앉아.”
그의 명령에 레녹스는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데스포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레녹스를 훑었다. 공작이 없었다면 레녹스와 디안은 지금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십수 년 전, 탑을 파괴하기 위해 들른 영지에서 데스포네 공작은 남매를 처음 만났다. 우연히 레녹스의 각성 장면을 목격했고, 공작은 부모 잃은 남매를 거뒀다. 레녹스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지만 영리하지 못했다. 반면 디안은 마력은 전무하지만 영리하고 더불어 외모까지 뛰어났다. 시간이 흘러 장성한 레녹스는 마법사단을 휘어잡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디안은 예민하고 까칠하던 황제를 공작에게 우호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다 효용성이 먼저 떨어진 쪽은 디안이었다. 꽃도 한 철이라고, 디안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최근 옅어진 것이다. 효용이 다한 디안을 궁 밖으로 내보내면 황후를 구슬러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허수아비 황후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어느 날, 공작은 바다 건너 고트로프의 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열넷의 황태녀가 이제 갓 4살 된 남동생에게 후계 자리를 양보했단다. 그게 무슨 양보야? 뺏긴 거지. 그때는 고작 14살짜리 황녀가 모후와 날을 세우고 싸우다가 자리를 빼앗겼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황제를 살살 구슬려서 청혼서를 보냈더니, 고트로프의 태후는 구구절절 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늙은 여우 같으니. 뭐? 궁 밖은 겁이 나서 나가 보지도 못한 딸이라고? 그리 겁많은 딸이 혼자서 탑을 박살 내나? 이런 젠장.’
데스포네 공작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이를 어찌한다? 데스포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자꾸만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앞에 앉은 레녹스는 연신 그의 표정을 살피며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면도칼처럼 예리한 시선에 레녹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이 언짢은 심기를 보이자 불쑥 조바심이 났다.
‘내가 너희를 거뒀으니, 너흰 그 보답을 반드시 해야 해.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 말에 디안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지만, 레녹스는 이를 가슴에 새겼다. 레녹스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난 데스포네 공작은 구원 그 자체였다. 그런 공작에게 쓸모없다는 말을 들은 날이면 제 부모가 죽던 날보다 두려움에 떨었다. 레녹스는 공작의 짜증스러운 표정이 제게 닿자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환희에 가득 차 웃음을 참지 못했던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공작이 별안간 그를 불렀다.
“레녹스.”
“예! 공작 전하!”
부름이 끝나기 무섭게 레녹스가 대답했다. 데스포네 공작의 보라색 눈동자가 레녹스를 찬찬히 훑었다. 오금 저린 적막이 내려앉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견디지 못한 레녹스가 가까스로 묻자, 공작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황후와 겨루어 이길 수 있겠나?”
레녹스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끗거리던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5급에 가깝기는 해도 4급이었던 탑을 혼자서 박살 냈는데……. 가능하다고?”
“가능합니다! 공작 전하, 저는 레녹스 푸아티에입니다. 대결하라 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응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핏대를 세우며 제 능력을 믿어 달라 외치는 모습에 데스포네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지기라도 하면 어쩔 텐가? 레녹스가 좀 더 똑똑했다면 이럴 때 무작정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칠 것이 아니라 황후의 실력이 어떻든 마법사단을 잘 단속하여 장악하고 있겠다 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영악한 것보다는 다소 멍청한 것이 다루기 편하니 데스포네 공작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녹스의 불안은 이미 덩치를 키워 가슴을 꽉 채운 뒤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갓 잉태된 구원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비밀로 하라 이른 디안의 당부는 거대한 불안 앞에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공작 전하.”
불안하게 들썩이던 레녹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그를 부르자 데스포네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레녹스는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데스포네 공작에게 몸을 기울였다.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놈이 갑작스럽게 눈을 빛내니 공작도 궁금해져서 몸을 기울였다. 레녹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며 기쁜 어조로 말했다.
“디안이 아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뭐?”
“디안이요! 폐하의 아기님을 가졌다고 합니다!”
“……디안이 임신을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레녹스는 긴장한 채로 공작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를 빠르게 계산하던 데스포네 공작이 크게 뜬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다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그으래?”
“예, 예!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분명 아기님이 생겼을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하하, 아주 좋은 소식이로군! 아주 반가운 소식이야!”
이윽고 공작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레녹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공작의 집무실에선 한참이나 웃음이 이어졌다. 몇 번이나 더 반가운 소식이라고 중얼거리던 데스포네 공작은 앞서 레녹스에게 했던 말을 은근한 어조로 취소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자네가 황후 폐하와 겨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자네 실력을 내가 어디 한두 해 보나? 황후 폐하 기분만 상하시지. 그나저나 우리 궁주님, 무슨 선물을 드리면 좋을까?”
흐음, 하며 고민하는 척하던 공작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상아궁을 돌려드릴까?”
“공작 전하!”
레녹스가 감격한 얼굴로 그를 부르자 공작은 껄껄 웃었다.
“자고로 산모는 마음이 편안해야 해. 지내시던 곳이 아무래도 편하지.”
“하지만, 어떻게…….”
“뭘 어떻게야? 돈을 내고 지내면 될 일 아닌가? 내가 은밀히 지원해 주겠네.”
“공작 전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차피 재정청은 내 소관이니 줬다가 다시 받으면 되겠지.’
데스포네 공작은 뒷말을 삼켰다. 레녹스는 정말 감사하다며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자자, 대신 내가 돈을 준다는 소리를 누구에게도 해선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숙부인데, 우리 황후께서 얼마나 서운하시겠어?”
“물론입니다, 공작 전하. 물론입니다.”
“허허허. 그럼 레녹스. 어서 가서 상아궁 전체를 임차하겠다고 알리게.”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환희에 젖은 레녹스가 나간 뒤, 홀로 남게 된 데스포네 공작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임신했다고? 이상한데. 황제가 분명 그 약을 계속 복용하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지. 황후를 들였다고 잠시 중단했나?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카를은 혈통에 대해 대단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때문에 평민 출신인 디안에게서 아이를 볼 마음은 먼지만큼도 없었고, 비밀리에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카를과 담당 주치의, 그리고 데스포네 공작뿐이었다. 물론, 황제는 공작이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흠. 그런 건 상관없지. 애가 생겼든 아니든, 설사 그 애가 황제의 애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디안이 ‘임신’이라는 이벤트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데스포네 공작의 머리가 아주 교활하게 회전했다.
“안 그래도 황후의 기를 좀 눌러 놓을 필요가 있던 참이었는데. 황제의 첩이 저보다 먼저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눈치를 좀 보겠지.”
그는 껄껄 웃으며 시종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은밀하게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