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델과 데스포네 공작의 기 싸움2021.09.11.
아델은 늘 루시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무엇이 미안하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면서. 그녀는 제 동생이 그 일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이제야 사죄의 편지를 남겼지만, 루시오는 이미 몇 년 전에 그 사건을 알아냈다. 아델라이드가 10살이 되던 해에 루시오가 태어났다. 당시 아델라이드는 황태녀였고, 루시오는 황자의 직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열넷이 되던 무렵. 아델라이드는 모후의 반대를 무릅쓰고 탑 대항본부를 만들었다. 현 태후이자 당시 황후는 탑 대항본부를 인정함과 동시에 이렇게 주장했다.
‘한 나라의 후계는 본인의 안위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법. 탑 대항본부를 만들어 기어이 스스로 사선을 넘나들겠다 선언한 황태녀는 자신의 직위를 루시오 고트로프에게 위임하라. 위임하고, 탑을 제거하러 떠나라.’
황제는 아델라이드를 지지했으나, 그 싸움의 승자는 황후였다. 아델라이드는 황태녀의 직위를 반납하였으나,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늘 황태녀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 직위를 반납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명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탑 대항본부의 창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따르던 몇몇 이들이 아델에게 아주 잔인한 제안을 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충정이었으나, 동시에 해서는 안 될 제안이었다.
‘루시오 황자를 제거하십시오.’
평소의 아델이었다면, 이런 비인간적인 제안을 가차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아델은 찰나의 순간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끝내 제안을 거절했으나 관록의 신료들도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제 미래를 걸고 황녀를 지지했던 이들에게도 아델의 황태녀 직위 반납은 뼈아픈 일이었다.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는 꼴을 어떻게 두고본단 말인가? 아델의 추종자 중 극단적인 일부가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네 살배기 황태자의 간식에 은밀히 극약을 섞어 둔 것이다. 이를 눈치챈 녹스의 선대 가주가 황녀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날 루시오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으리라. 아델은 정신없이 달려가 독이 든 간식을 손에 든 루시오를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나약한 마음이, 사랑하는 동생에게 독으로 돌아갔다. 선대 황제는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지만, 그들이 아델라이드의 추종자였다는 기록은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한때 아델의 등 뒤를 든든히 받쳐 주던 이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신을 태우는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어둡게 뒤덮어 태양을 가렸다. 이를 지켜보며 아델은 깨달았다. 그녀가 고트로프에 계속 남아 있는 이상, 이런 일이 언제고 반복되리란 것을.
[……미안했다, 루시오. 잠시나마 흔들렸던 나를 용서해 다오.]
그리고 아델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편지로 그 모든 것을 루시오에게 직접 알리고 사죄했다. 에흐몬트로 간 것은 어쩌면 그녀가 스스로에게 내린 벌이자 동생을 위한 마지막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유배와도 다름없는 혼사를 순순히 받아들였겠지.
“누님을 협박하셨습니까, 어머니?”
황제가 으르렁대며 묻자 태후는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델이 고작 그 정도의 협박에 순응해 쫓겨 갔다 생각하세요? 내 딸이 누군데?”
태후의 신랄한 말에 루시오는 멈칫했다. 자애롭던 미소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아들을 바라보는 태후의 얼굴은 어느새 냉정한 정치가로 돌아가 있었다.
“제 발로 간 거랍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루시오에게 태후는 조곤조곤 설명했다.
“황제. 하늘의 태양은 두 개일 수 없어요. 오직 하나여야 하죠. 비록 실패했지만, 아델의 추종자들이 그날 그대를 왜 죽이려 했겠습니까? 아델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대의 목 아래 겨누어진 칼과 같아요.”
“누님의 존재가 제 목을 베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비단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델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보다 연장자일 것이며, 그것은 그대의 후계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에요. 십 년만 지나 보세요. 이 어미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모녀는 다른 듯 닮았다. 아델도 그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두말없이 떠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듣던 황제가 별안간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아델과 닮았는지 태후는 제 아들이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이윽고 비소를 갈무리한 루시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언제 저만큼 컸는지 태후가 한참이나 목을 꺾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는지, 한번 두고 보죠.”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몸을 돌려 태후의 방을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태후는 불안하게 술렁이는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 * * 자신의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뒤따라온 카인 녹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믿을 만한 사람 몇을 데리고 에흐몬트에 다녀오시오. 가서,”
황제의 황금빛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델라이드 황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알아 와 주시오. 만약 내 누님께서 그곳에서 불행하시다면……. 그리하여 누님께서 더는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황제가 몸을 돌려 카인을 응시했다.
“반드시 누님을 다시 고트로프로 모셔오시오. 나는 이를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오.”
* * * 한편, 긱스 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후가 향한 곳은 황궁 내 마법사단 관저였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방문에 입구에서 업무를 보던 마법사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넘어질 뻔하였다. 황후께서 쓰러지셨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은 넋을 잃은 듯한 그의 모습을 모른 척 넘기고 관저 내부를 응시하며 말했다.
“마법사단장을 좀 뵀으면 하는데. 연락 없이 온 길이라 계실지 모르겠군.”
“어, 어서 오십시오, 황후 폐하! 단장님은 관저에 계십니다.”
마법사가 얼른 앞장서며 그녀를 안내했다. 주위를 지나던 이들이 황급히 멈춰 서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아델은 여상한 태도로 응대하며 걸음을 옮겼다. 깔끔한 외관과 달리 관저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샹들리에와 화려한 천장화는 흡사 연회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아델은 감흥 없는 표정을 고수하면서도 관저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길을 가다 멈춰서 인사하는 이들의 얼굴도 되도록 기억하려 애쓰며 유심히 보았다. 황후가 지나가자 마법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중에는 브룬힐 알렉사도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황후께서 공인을 받으시겠지요? 그런데 그러고 나면…… 직급을 받으실까요?”
“글쎄.”
브룬힐은 동료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하며 머릿속으로 ‘그날’을 떠올렸다. 레녹스 푸아티에는 그날도 미적거렸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들의 시체와 피로 흥건하리라 생각했던 장미정원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허공에 멈춰 서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서지는 탑을 뒤로하고 작은 인영이 땅으로 강림했다.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심지어 홀로 탑을 파괴하셨는데……. 직급이 의미가 있을까?”
브룬힐은 냉소적으로 덧붙인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중요한 것은 탑에 대한 마음가짐이지.’
* * * 마법사단 단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데스포네 공작은 황후가 왔다는 소식에 크게 반색하며 직접 복도로 달려 나왔다. 만면에 가득 머금은 미소가 어찌나 친근한지 마치 몇 년 만에 보는 가족을 반기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연락도 드리지 않고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무례라니요! 그런 말 마세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자자, 이리로 오시지요. 너는 수고했다. 가 봐.”
황후를 모시고 온 마법사에게 손짓한 공작이 황후를 자신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이 아이에게도 잠시 쉴 공간을 마련해 주게.”
황후가 함께 온 시녀를 가리키며 말하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너는 잠시 쉬다가 내가 부르거든 오너라.”
“네, 황후 폐하!”
아델은 데스포네 공작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호화로운 관저 내부는 공작의 취향을 반영한 듯싶었다. 그저 놓여 있는 작은 장식품 하나도 장인이 만든 듯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집무실이 참으로 아름답군요.”
“하하하, 저는 본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요. 자, 앉으십시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예, 괜찮습니다.”
공작은 아델에게 자리를 안내한 뒤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차를 내어오라 일렀다.
“급한 마음에 빈손으로 왔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 마세요. 황후 폐하께서 오신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랍니다.”
곧 시종이 차를 내왔고, 아델은 가볍게 한 모금 음미했다. 그리고 의례적으로 몇 모금을 더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시작은 이만하면 됐다. 공작도 그리 생각했는지 시종을 내보낸 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전 제가 말씀드렸던 그 일로 오셨습니까? 탑의 주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탑의 주인이라……. 내가 본디 무언가의 주인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황후는 권력자의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그럼요. 폐하께선 소유하는 분이시지요. 이곳에서는 휘어잡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스포네 공작은 아직 황후에 대한 뒷조사를 끝내지 못했지만, 혈혈단신 바다를 건너온 모습만으로도 고트로프에서의 상황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이번엔, 좀 달랐으면 해요.”
“저와 함께하신다면. 네, 폐하. 그럴 것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친근한 얼굴로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웃음으로 때운 찰나의 침묵 끝에 데스포네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공인을 받으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어떻게 공인을 받으면 되는지요?”
데스포네 공작은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 한 부를 들고 왔다. 마법사들의 인적 정보가 적힌 문서인 듯했다.
“에흐몬트의 공인은 마법사들 간의 대결로 치러집니다. 공인과 동시에 랭킹이 정해지지요. 홀로 탑을 파괴하신 황후 폐하의 실력이라면…….”
말꼬리를 늘인 공작이 서류를 훑던 눈을 슥 들어 아델을 응시했다.
“우리 부단장과 한 번 겨뤄 보셔야 할는지요? 아, 물론 지금 수도에선 마력을 운용할 수 없으니 가까운 마력 범위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하셔야겠지만요.”
인자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한순간도 느슨하게 풀린 적이 없었다. 과연 저자가 지금껏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푸아티에 남매를 쉽게 버리려 할까? 아델은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이기면, 마법사단에서 내 직급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데스포네 공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게 어떤 직급을 주시렵니까? 말씀드렸듯 나는 소유하는 것과 더불어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빽빽하게 맞물렸다. 잠시 후 공작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당장 직급을 손대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공인만 받아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렇지!’
결국, 공작은 아직 확인이 다 되지 않은 황후보다는 그간 봐 왔던 레녹스 푸아티에의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아델이 바라던 바였다.
“직급을 주시기는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마법사로 공인만 받으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가요?”
날이 선 듯한 황후의 목소리에 데스포네 공작은 굉장히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자자, 노여워하지 마시지요. 생각해 보니 황후께서 공인을 받으신다 해도 마법사단 내에서 직급을 받으시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있습니다. 누가 감히 황후 폐하께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가 차지하고 앉은 단장직은 절대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당장 직급이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 노여워하지 마시고 에흐몬트에서 정식 마법사로 등록을 하신다, 이 정도로 생각하세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인정을 받든 받지 않든 나는 이미 마법사입니다. 굳이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공인을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그것으로 중신회의 정도에 참석할 수 있다면 모를까.”
아델은 새침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데스포네 공작은 그런 황후를 날카롭게 재어 보았다. 발드르와 손을 잡고 있는 황후가 중신회의에 참여해서 허튼소리를 하면 아주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탑을 혼자서도 박살 낼 만큼 강력하고 유능한 인재를 포섭하지 않고 그냥 두자니 영 꺼림칙했다. 본디 송곳은 주머니에 넣을 것이 아니라 손에 잘 들고 있어야 하는 법. 그때, 찻잔을 내려놓은 아델이 마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리오넬 발드르를 보좌관으로 들인 나를 중신회의에 참여시키기가 저어되시는군요?”
“…….”
“데스포네 공.”
“…….”
“공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제 가족이 아닙니까?
황후는 친근한 얼굴로 데스포네 공작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공작은 바다 건너 태후에게 이를 갈았다.
‘순진하고 조신한 황녀라더니. 고트로프 태후가 아주 대단한 맹수를 보내왔군.’
빠르게 계산을 끝낸 공작은 마찬가지로 아주 친근한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예, 누가 뭐래도 우리는 이제 가족이지요. 중신회의라……. 제가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단…….”
“단?”
공작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황제와 놀라울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공인을 받으신 뒤엔, 칼뱅 백작에게 금괴를 주셨던…… 그런 일은 되도록 삼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탑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작은 얼마든지 그녀의 힘을 꺾어 놓을 것이다. 그에겐 그만한 힘이 있으니. 데스포네 공작은 일단 황후라는 패를 고려해 보기로 결정했다. 아델이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답했다.
“그러지요. 그런데 듣자 하니 탑이 세워진 영지가 무수히 많다던데, 뒷감당을 어찌하시려 그럽니까?”
“아, 고트로프는 탑을 내려오는 족족 부순다 들었습니다. 탑을 부수는 방법은 에흐몬트보다 낫겠지만, 탑의 속성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겠군요.”
아델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데스포네 공작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마치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 탑은 탑을 부르고, 탑은 탑을 흡수한답니다.”
그것은 묘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제가 계획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마법사들은 비로소 온전히 힘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마법사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날이 오면, 마법사가 아닌 자들은 이등 인류가 될 거랍니다.”
무덤 속 관 같던 슬럼의 집들이 떠올랐다. 아델은 테이블 아래 숨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데스포네 공작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대단히 위험한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 * * 레녹스가 돌아가고, 디안은 멍하니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배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가 눈을 감았다. 고요한 가운데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그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깊숙한 곳의 내면이 속삭였다.
‘살았다.’
기쁨이 넘실거렸다.
“로레인.”
시녀를 부르는 목소리도 오랜만에 따스했다. 한쪽에서 방을 정리 중이던 로레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네, 부르셨어요?”
디안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서 폐하께 지금 오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모시고 와. 무슨 이유냐 물으시거든, 내가 직접 말씀드린다고 전해.”
“네, 알겠어요.”
로레인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어놓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