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디안의 감격2021.09.07.
“오라버니.”
디안의 부름에 레녹스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누이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감싸고 있던 디안이 다가오는 레녹스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엔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누이의 모습에 레녹스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머리끝에서 시작된 강렬한 전율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온몸을 스쳐 발바닥까지 이르렀다. 레녹스는 다급히 몸을 기울이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임신한 거야?”
그 말에 디안이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 끝에 투명한 것이 어룽지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 툭툭 떨어졌다. 디안은 울면서 웃었다. 그녀의 눈물에 레녹스의 두 눈도 붉게 물들었다. 그는 서둘러 주치의들을 바라보며 추궁하는 듯 물었다.
“아기님을 가지신 것이 맞다고?”
“일단 증상으로 미루어 보아 임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말에 레녹스의 눈이 매서워졌다.
“아니, 임신이면 임신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임신일 가능성은 뭐야?!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격 없이 튀어나오는 하대에 주치의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급 주치의가 시선을 돌리며 사무적으로 답했다.
“현재의 의술로는 초기 임산부의 임신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증상으로 미루어 진단하지요.”
“아, 그러니까 지금 임신이라고 아니라고?”
막무가내로 주치의들을 몰아붙이는 오라비의 모습에 보다 못한 디안이 나섰다.
“임신일 가능성이 높대요. 주치의들이 종종 들러 몸의 변화를 확인한다고 해요. 지금은 한 달도 되지 않은 것 같대요.”
잔뜩 성난 표정이던 레녹스가 그 말에 반색하며 디안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주치의들은 남매의 모습을 번갈아 응시하다가 디안에게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물러갔다. 그들이 나가자 레녹스는 감격한 얼굴로 디안의 손을 와락 그러쥐었다.
“잘했어, 잘했어. 정말 잘했다, 디안.”
디안도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울었다. 헛구역질하며 쓰러진 그녀를 진찰하던 의원 중 한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신 가능성을 이야기했을 때, 디안은 혹시 이것이 꿈인가 했다. 근래 들어 입맛이 없어진 것도, 이번 달 월경을 거른 것도, 계속 속이 메스껍던 것도, 기분이 오르내린 것도 모두 임신 초기 증상에 해당한다고 하자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한 것같이 느껴졌다. 레녹스는 디안의 배를 응시했다. 아직은 납작한 이 배 안에 그들의 구원자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이러려고, 이런 중요한 때에 구원처럼 나타나려고 지금까지 기다리셨습니까?”
구원! 이 아기는 구원이다. 레녹스는 하늘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디안을 응시했다.
“궁주님. 이제 궁주님께서는 이 아이가 부디 사내아이기를 바라며 편안하게, 몸 조심히 지내십시오.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건, 어떤 일이 벌어지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요. 주치의들은 임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 임신이라고 확정 짓지는 않았어요.”
“응, 알았어.”
지옥의 문인 줄 알았는데 열고 보니 극락이 있었다. 레녹스는 아주 진하게 웃었다. * * * 갑작스럽게 외출을 다녀오겠다는 황후를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던 긱스 부인이 이내 엄격한 얼굴로 만류했다. 며칠 내리 굶은 상태인데다가, 오늘은 가을치고 제법 쌀쌀한 날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정말 잠시면 된다며 긱스 부인의 만류를 뒤로하고 드레스룸에서 직접 옷을 꺼내 갈아입기 시작했다. 긱스 부인은 끊임없이 잔소리하며 황후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델은 이 잔소리를 피할 방법은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밖에 없다고 습관적으로 생각하며 더 빨리 손을 움직였다. 긱스 부인은 앓다 일어난 사람이 맞는지 의심될 만큼 재빠른 황후의 곁을 뛰듯이 따라와 매달렸다.
“내일 가십시오, 폐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지금 당장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일 간다고 하늘이 무너집니까? 무너지나요?”
“몸이 우선인 겁니다! 이 날씨를 좀 보십시오!”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당장 그들을 불러들이겠습니다!”
그러나 황후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긱스 부인의 만류를 못 들은 척했다.
“황후 폐하!”
배에 힘을 단단히 준 노부인이 기어이 호통치듯 부르고 나서야 걸음을 멈춘 황후가 슬그머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노부인의 눈빛은 엄격하고 완고했다. 말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다시 한번 확신한 황후가 노부인을 향해 눈을 접어 웃어 주며 말했다.
“아주 잠시면 되오.”
“황후 폐하! 그 잠시를 왜 지금!”
“아아, 큰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소.”
황후가 과장되게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앓는 소리를 하자, 뭐라고 더 잔소리하려던 긱스 부인이 얼른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델은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뜨며 시린 설원 같은 노부인을 향해 황금빛 눈을 초승달처럼 휘었다.
“…….”
그리고 말문이 막힌 긱스 부인에게 다시 한번 진하게 웃어 주며 속삭였다.
“다녀오겠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황후가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를 지목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 아, 네!!”
긱스 부인에게 잡힐세라 번개 같은 속도로 정문을 벗어나는 황후의 뒤를 시녀가 따라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긱스 부인이 깊고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작게 저었다.
“하아…….”
잔소리하는 이를 떨쳐 내는 기술이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보통이 아니다. 긱스 부인은 고트로프에서 황후를 키워 냈을 이름 모를 유모를 작게 위로했다. * * * 한편, 그 무렵 고트로프 황궁. 관례에 따라 선황제의 장례를 치르러 장기간 궁을 비웠던 고트로프의 황제가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황제는 올해 14살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어른들보다 키가 큰 데다가,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소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샛노란 금빛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의 이름은 루시오 고트로프. 아델라이드의 동생이자 현 고트로프 제국의 황제였다.
황궁에 도착하기 직전, 황제가 전해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누님!!!!”
옷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며 걸어 들어온 황제는 아델라이드 황녀가 사용했던 궁의 정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포효하듯 소리쳤다.
“아델 누님!!!!”
그럴 리가 없어. 황제는 성큼성큼 걷다가 결국은 달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아델이 사용하던 방의 문을 벌컥 열려다 말고 눈을 꽉 감은 채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눈을 뜬 그가 떨리는 손으로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지요.’
서늘한 목소리를 기대했으나,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황제는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천천히 방문을 열고 한 걸음 한 걸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에는 사람이 머무른 온기가 없었다. 어차피 이 방은 주인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았던 곳이다. 그럼에도 느낌이 다르다.
“누님께서 언제 가셨다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물음에 황제에게 다가온 유모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선황제 폐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떠나시고 한 달 뒤였습니다.”
“그럼 내가 떠나기 전, 누님은 이미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것이겠군.”
“……예.”
“그걸 알고도 내게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어?!!”
“……예.”
“유모!!! 그대도 알고 있었을 터!! 알았으면 내게 이야기를 했어야지!!!”
황제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황녀님께서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고트로프에서 결혼은 부모가 주관하는 것이었다. 루시오가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아델라이드 황녀의 결혼은 부모인 태후의 소관이기에 참견하기 어렵다. 더불어 지금은 태후가 섭정 중인 시기였다. 그러나 마음만 먹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것을 누이가 막았다고 한다. 힘이 빠진 듯 황제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언뜻 배신감마저 내비치는 황제에게 유모가 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황녀님께서 폐하 앞으로 남긴 편지입니다.”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황제가 벼락같이 그 편지를 가져왔다. 그리고 유모를 제외한 모두를 방 밖으로 내보낸 뒤 성급한 손길로 봉투를 뜯어내었다. 편지는 한 장이었다. 딱딱 끊어지는 글씨체와 미련이 남지 않은 듯한 간결한 문장이 그녀다웠다. 황금빛 눈동자가 빠르게 글씨를 읽어 내리고, 편지를 든 손가락이 어느 순간부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황제는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폐하.”
“…….”
“폐하.”
“……누님은 참으로 바보다.”
황제는 누이의 편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누님은, 참으로 바보야.”
그것은 사죄의 편지였다. * * * 아델의 궁을 나선 황제 루시오는 곧장 태후궁으로 향했다. 태후는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이미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황제.”
태후는 아름다운 얼굴로 모정이 물씬 묻은 듯 자애롭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과거 그녀가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델 황녀가 만든 탑 대항본부는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된단다. 훗날 네가 황제가 되면, 그 고약한 것의 힘을 눌러 두어야 해. 알겠느냐?’
어린 마음에도 루시오는 그 말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화려한 옷을 입고 황궁에 앉아 있는 어머니보다 로브를 입고 산야를 누비는 누이가 더 대단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성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보던 누이는, 마치 거대한 산 같았다. 그 근사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노라면 루시오는 누이를 닮은 제 눈동자 색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누님, 원정은 다른 사람들을 보내고 누님은 궁에서 머무시면 안 되나요?’
철없이 투정을 부리는 그에게 누이는 늘 다정하게 웃었다. 그렇게 대단하고 훌륭한 누이를 황태녀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이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원하는 권력은 정말이지 잔인한 것을 먹이로 요구했다. 기어이 제 딸을 유배 보내듯 타국으로 보내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독대를 청합니다, 태후 폐하.”
황제의 날 선 어조에도 태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시지요. 다들 나가거라.”
태후의 명령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가고, 드넓은 태후의 방엔 황제와 그녀 둘만이 남았다.
“왜 제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누님을 에흐몬트로 보내셨습니까?”
태후도 익히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준비해 둔 답을 해 주었다.
“아델은 한낱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될 아이가 아니에요. 그럴 바엔 에흐몬트의 황후가 되는 것이 낫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아델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에 루시오는 피식 웃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비웃음에 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혀 눈을 치켜뜨고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억눌린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태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머니.”
치켜뜬 금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아델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해서 태후는 숨을 죽였다. 황제가 음산한 어조로 속삭였다.
“어머니께서 누님을 무엇으로 협박하고 계셨는지, 제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