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지옥으로 걸어들어왔구나2021.08.03.
아델은 기분 좋게 일어나 기지개를 쭉쭉 켰다. 간밤에 어찌나 잘 잤는지 몸이 날아오를 것처럼 가뿐했다. 옷을 능숙하게 갈아입고 가볍게 단장을 한 뒤 방을 나서자,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집사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허어. 왔으면 인기척을 내어 왔노라 할 것이지 그냥 기다리고 있었는가?”
“직속 시녀도 붙여 드리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모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황후 폐하. 미흡한 대우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델은 에흐몬트의 이런 문화가 영 익숙하지 않아서 난감하고 어려웠다. 고트로프에서의 시녀란, 일종의 심부름꾼과 같은 개념이어서 황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따라다니지 않았다.
“걱정 말게. 나는 편안했으니.”
“다행입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했는데, 드시겠습니까?”
“물론.”
그거야말로 기다렸던 말이지. * * * 식사는 공작의 개인 응접실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델이 들어오자, 이미 와 있던 형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를 맡으며 아델은 기분 좋게 웃었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객을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소.”
“저희도 막 왔습니다. 앉으시지요.”
아델은 자리에 앉으며 잠시 리오넬을 응시했지만, 피곤해 보이지 않았기에 제 앞의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끈한 수프와 빵, 신선한 과일로 차려진 정갈한 아침 식사였다.
“드시지요, 황후 폐하.”
테세우스의 말을 시작으로 세 사람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아델은 우선 따끈하고 몽글몽글한 빵을 찢어 수프에 푹 담갔다가 먹었다. 짭짤하고 부드러운 수프를 머금은 빵이 혀에 감기자 요동치던 배 속이 만족스럽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집사는 황후의 식기가 비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빵을 더 얹어 주었고 아델은 사양하지 않고 배가 부를 때까지 식사를 이어 했다. 잠시 후, 먼저 식사를 끝낸 테세우스가 적당한 타이밍을 보아 황후에게 질문했다.
“오늘 특별히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델은 물을 한 모금 마셔 입안을 깨끗하게 가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한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오.”
“말씀하시지요.”
아델은 리오넬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질문했다.
“리오넬, 혹시 오늘 시간 돼?”
“?”
“그대가 어려우면 미안하지만 믿을 만하고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기사 한두 사람을 내게 붙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십니까?”
테세우스의 물음에 아델은 그를 돌아보며 답했다.
“오늘은 수도를 좀 돌아보려 하오. 정확히는 지난번 말했던 그 슬럼가 말이오.”
그 대답에 리오넬이 끼어들었다.
“슬럼에 가 보고 싶으시단 말입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슬럼 내부를 보고 싶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겉만 훑어서 뭐 하게. 나는 관광하러 가는 것이 아니야.”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리오넬은 빠르게 답했고, 테세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그런 누추한 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고루한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했던 것은 기우였다. 아델은 이 형제가 마음에 들어서 씩 웃었다.
“고마워.”
* * * 실행은 빠르고 신속하게. 아델과 리오넬은 아침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공저를 나섰다. 마차는 슬럼가에서 너무 눈에 띄니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말에 오르는 아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집사에게 리오넬이 말했다.
“나보다도 빨리 군마를 달리시던 분이네.”
두 사람은 커다란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슬럼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내가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괜한 것을 부탁한 것은 아닌가?”
그녀의 질문에 리오넬은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 시간이 되어 모시게 된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작게 웃는 소리가 스치는 바람처럼 리오넬의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슬럼은 시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다가왔다. 고약한 악취가 스멀스멀 코끝을 맴돌기 시작하더니 곧 엄청난 규모의 슬럼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오물 덩어리로 보였다. 일반 평민들의 주거 지역과 슬럼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강을 가리키며 리오넬이 말했다.
“저 강의 이름은 니아바라입니다. 차고 맑은 물이란 뜻입니다만, 현재는 무엇도 살 수 없게 되어 버렸지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마다 보초를 선 군인들은 슬럼에서 넘어오는 이들만 검문했다. 아델은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더러운 물로 빨래를 하고, 몸을 씻고 있었다.
“수도시설이 열악한 모양이군.”
“거의 없습니다.”
“그럼 화장실은?”
“집 안에서 볼일을 본 뒤, 집 밖으로 내다 버린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슬럼가 전체가 거대한 화장실이란 뜻이었다. 강을 건너자 건조한 가을 기후에도 불구하고 치미는 악취에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매캐한 타는 냄새까지 나자 아델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탄내는 도대체 뭐야?”
“시신을 소각하는 냄새일 겁니다. 산 사람이 누울 장소도 없으니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을 리 없지요.”
아델은 말을 멈춰 세웠다.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거대한 슬럼을 보니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아델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버렸다.
“마스크를 쓰십시오.”
“됐어. 여기서 누가 나를 알아보겠어? 이 사람들에게 황후란 오늘 먹을 빵보다 못한 존재일 텐데.”
“…….”
“이렇게 큰 슬럼이 제국 전역에 퍼져 있다고?”
“이 정도 규모는 대략 열 개 정도로 추산되고, 작은 슬럼은 셀 수 없습니다.”
그 말에 한참 침묵하던 아델은 다시 말을 몰며 중얼거렸다.
“……내가 지옥으로 걸어들어왔구나.”
참으로 아프고 슬픈 말이었다. 리오넬은 앞서 말을 몰아가는 황후를 어둡게 잠긴 눈으로 응시하다 따라갔다. * * * 슬럼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리오넬은 황후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말은 어디다 맡기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내리려 하면 다가올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릴 듯하자 그들을 주시하던 몇몇 남자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에게 말을 맡기고 나니 한쪽에서 기웃거리던 소년이 재빠르게 두 사람 앞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델은 소년을 한 번 힐끗 보고 슬럼 내부를 응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가장 평범한 집으로 안내해라. 집 안까지 보고자 하니 네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이면 더 좋겠지.”
“집 안까지 보시려면 돈을 더 내셔야 하는데요?”
“얼마?”
“한 집당 은화 두 개요.”
“알겠다.”
“헤헤, 따라오십쇼, 마님!”
리오넬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황후를 보았으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슬럼의 내부는 외부에서 볼 때보다 더 처참했다. 전장을 떠돌며 숱한 지옥도를 목격한 리오넬조차 끔찍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치밀 정도였다. 어딜 어떻게 밟아도 똥 밭인 거리 위에서 주저앉아 놀던 아이들이 멋들어진 망토를 입고 지나가는 두 사람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들이 음울한 거리 곳곳에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리오넬은 아델의 옆을 단단히 지켰다. 슬럼가는 인신매매가 수도 없이 일어날 만큼 치안 상태가 최악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력은 탑의 영향권 아래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탑이 없는 이곳에서 아델은 평범한 여성과 다름없을 것이다. 아델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 갔다. 굳이 더 보지 않아도 이곳의 실태가 어떠할지 느껴졌다.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년이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한 소녀의 집이었다.
“네가 이 집 주인이니?”
“네.”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법한 소녀가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이 지난달에 돌아가셨거든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어조가 세파에 찌든 노인 같았다. 아델은 집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딱 두 사람이 누우면 빠듯할 공간엔 창문도 세간살이도 없어서 꼭 토굴이나 석관 같았다. 황후는 그 뒤로도 별다른 말 없이 냉정한 태도로 필요한 만큼 묻고, 살폈다. 그리고 이어서 슬럼가에서 그나마 깨끗하다는 집들과 최악이라는 집을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명령했다.
“돌아가자.”
소년은 과장되게 으스대며 다음에 오면 꼭 자기를 찾아 달라고 인사를 올렸다. 행동거지가 영락없는 양아치였다. 침을 뱉고, 위세를 과시하듯 거만하게 걷고, 강자에겐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는.
“너, 몇 살이니?”
“올해 열다섯입죠!”
이제 열다섯.
“네가 있는 무리에 너보다 어린 애들도 있나?”
“뭐…… 제가 관리하는 애들이 있죠. 여기서 이 짓 안 하면 뭘 하겠습니까? 어릴 때 들어와야 빨리 자리 잡죠.”
아델은 물끄러미 소년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리오넬이 값을 치르고 말을 가져오자 아델은 말에 올라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는 침묵하며 말을 모는 아델을 응시했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
“원하시던 것은 알아내셨습니까?”
황후는 니아바라 강 한가운데서 말을 멈춰 세우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줌의 동정도, 슬픔도 묻어 있지 않은 지극히 이성적인 얼굴로 슬럼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분히 돌아섰다.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앞장서서 가기 시작한 황후는, 너무나 차분하여 도리어 차가워 보였다. 리오넬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께 있어 이 땅의 접점은 황제뿐일 텐데. 저분은 황제의 배우자인 황후이시니, 사실 그 무엇보다 황제와의 관계가 중요한 입장이 아닌가? 보좌관을 들여 발드르 공가와 연을 맺은 것도 황궁에서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황제 폐하께서 반대하시면, 어찌하실 겁니까?”
“반대?”
아델이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리오넬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 슬럼은 아주 오래전에 생겨났습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이곳을 모르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알면서도 그냥 두시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황후 폐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신다면.”
“…….”
“어찌하실 겁니까?”
그 순간, 마주친 금빛 눈동자가 시뻘겋게 끓어올랐다. 황후는 별안간 버럭 화를 냈다.
“빌어먹을, 저 꼴을 보고도 지금껏 눈 감고 있는 게 사람이야?!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뭘 한 거야!!”
다리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 일제히 날아갈 만큼 성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이 나라 귀족들은 다들 머저리야?! 뭐 하는 놈들이야 도대체?! 눈앞에 저렇게 거대한 지옥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나만 아니면 된다고 저따위로 군인들 세워서 길이나 막으면 다야?!!”
아델은 다리 끝에 서 있는 병사들을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
“병원, 학교, 수도시설, 뭐 하나 갖춰진 것이 없어!! 열다섯 어린놈의 자식이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니는데, 더 어린놈들이 있다고 해. 악마를 키워도 유분수지. 저 지옥에서 뭐가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썩고 있는지 모르쇠 눈 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나라가 지옥이면 백성은 악마가 되는 거야! 국방부 장관!! 그대는 도대체 뭘 했어?!!!”
꾹꾹 누르고 있던 시뻘건 화를 터트리는 황후의 노성에 리오넬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쓰고 있던 마스크와 후드를 벗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말과 분노는 지극히 당연했으므로, 리오넬은 오히려 기꺼웠다. 리오넬이 고개를 숙이자 아델은 깊게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미안하다. 괜히 그대에게 화를 냈군.”
“아뇨, 아닙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빠르게 순환하는 거친 맥박에 리오넬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며 마주한 금빛 눈동자를 보며 리오넬은 깨달았다. 제가 황후의 분노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전한 적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