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황후가 지금 합궁이 가능한 날인가2021.06.29.
긱스 부인의 이야기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자신의 시녀였던 이가 황제의 아들을 낳으면서 선대 황후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황제는 시녀의 아이를 황후의 양자로 만들어 후계로 삼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 선대 황후도, 아이의 생모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생모와 분리된 아이는 선대 황후의 의사와 상관없이 황후궁에서 자라게 되었다. 친모인 줄 알았던 어머니가 실은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계모라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된 건 여섯 살 때였다. 아이가 일곱 살의 나이에 찾아간 친모는, 이미 반쯤 실성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이를 구성하는 큰 축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긱스 부인이 아델에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황제와 황후의 관계 개선 때문이었다. 사람 간의 관계란 본디 상대를 알아야 잘 맺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최소한 아델라이드 황후가 황제에 대한 한 줄기 연민을 가지길 바랐지만, 부인은 황후를 잘 몰랐다. 황후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황제가 처음 만난 나를 적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나와 선대 황후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 때문이라, 이 뜻이오?”
“황후 폐하.”
“나는 말이오. 이곳에 오자마자 고민했소. 도대체 내가 어느 틈에 에흐몬트 황제와 만나 적의를 쌓았을까? 나는 그의 초상화조차 이곳으로 오는 길에 처음 보았소. 그러니 그의 적의에 내가 얼마나 황당했겠소?”
“…….”
“그런데 그것이 황후란 자리 자체에 대한 진득한 미련과 원망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소. 나와 선대 황후 어디가 똑같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본능처럼 올라오는 것일 뿐,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실 겁니다.”
“지존의 자리에 앉은 황제가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아델은 버럭 화를 냈고, 긱스 부인은 낭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씀하셨듯 그분이 지존이십니다.”
“…….”
“황후 폐하, 그분이 지존이시고 폐하의 배우자십니다.”
“그래서?”
“…….”
“그래서 몸을 낮추고 황제의 비위를 맞춰, 황후로서의 권위를 받아 내라? 그럼 보좌관을 들인다고 할 때 말하지, 왜 이제 와 말하는 것이오? 그때는 황제의 비위를 거스를 발드르 공제가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해서요?”
긱스 부인은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다. 아델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을 발로 꾹꾹 밟아 누르며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디안 푸아티에가 찾아와 내게 폐하의 취향에 대해 알려 주겠다 하더군.”
그 말에 긱스 부인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감히!”
“그래, 감히. 감히 내게 찾아와 그리 말했소. 내 외모를 폐하의 취향에 맞추라 일러주더군.”
그 말에 긱스 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부인이 죄송할 이유가 없지. 그러나 지금 그대가 내게 한 말과 그날 디안 푸아티에가 했던 말이 무엇이 다르오?”
“황후 폐하…….”
“내가 그녀에게 무어라 답했는지 아시오? 다른 사람의 취향에 날 맞출 생각은 태어나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했소.”
“…….”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인 존재.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편안한 상대.”
어디 그뿐이랴? 지금 들어 보니 얼굴도 모르는 선대 황후의 그늘까지 뒤집어쓰고 욕받이가 되라는 뜻 아닌가?
“한데 미안해서 어쩌오? 나는 본디 불편한 사람인데. 고트로프에서도 날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나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지. 날 편하고 쉽게 생각하여 날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딱 질색이거든. 난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오.”
“…….”
“내 잘못도 아닌 허물을 내게 뒤집어씌워서 온갖 분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난 그걸 받아 줄 생각 조금도 없소.”
“그러나 이곳에서 편안하시려면, 황후 폐하…….”
그러나 이글거리는 금빛 눈동자 앞에서 긱스 부인은 말끝을 흐리고야 말았다. 솜털 하나하나가 일어나는 듯 소름이 돋았다.
“편안? 편안의 기준을 내게 물어봤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아델은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황제의 가슴 깊숙한 곳에 울분을 풀지 못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내 가슴 깊은 곳에도 아마 그런 아이 하나쯤은 있을 거요. 등 두드려 주고 안아 주어야 할 아이 말이오. 유감스럽게도 나는 부당하게 내가 얻어맞아 가면서까지 황제의 깊은 곳에 있다는 아이를 안아 줄 아량은 되지 못하오.”
“…….”
“그리고 잘 생각해 보시오. 제 마음도 제대로 인식 못 하는 아이의 비위를 때마다 맞춰 가며 몸을 숙이면, 정녕 나아지는 것이오? 그것은 방임 아닌가?!”
황후의 속사포 같은 비난에 긱스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주제넘었습니다.”
“주제넘었소.”
“죄송합니다.”
긱스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나이 지긋한 노부인의 사죄에 아델도 더는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그녀의 충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고트로프의 황태녀였소. 남들이 말하는 ‘편안’이 내 기준과 같았다면, 난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오.”
황제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그녀의 전부였다면, 황태녀의 직위를 내려놓던 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그래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말이오, 긱스 부인.”
아델라이드는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바로 나요.”
나의 이상. 나의 신념.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나의 모든 것.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아델라이드 그 자체요. 그것은 황제란 자리보다 앞서는 것이지. 그러니 숨만 쉬며 남이 하고 싶은 대로 휘둘리라는 명령엔 죽으면 죽었지 절대 응할 수 없는 것이오. 아시겠소?”
긱스 부인은 눈을 감고 두 손을 꽉 모아 쥐었다.
“용서하십시오.”
“이런 나를 황후로 모시기 힘들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아델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허리를 세운 채 꼿꼿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먹먹한 어둠이 찰랑찰랑 목 끝을 적셨다. 그녀는 그 어둠에 몸을 묻고 한참이나 숨을 죽였다. * * * 한편, 황후궁을 박차고 나간 황제는 예고도 없이 디안을 찾아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디안은 황제가 왔다는 소식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지옥을 헤매던 마음이 황제가 왔다는 소식 하나에 천국의 문 앞까지 날아갔다. 황제는 어둑한 밤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폐하.”
디안이 여린 목소리로 부르자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
“폐하?”
“이리 와.”
독이 있는 꽃이 아름답고 화려하듯, 황제는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으나 위험해 보였다. 그 어둡고 두려운 기운에 대기하던 서둘러 문밖으로 줄행랑치는 시녀들과는 달리 디안은 황제의 명령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다가갔다. 카를은 디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굽이치는 금발, 만지면 부러질 것처럼 가녀린 팔다리, 사슴처럼 길고 곧은 목, 아름다운 얼굴. 그녀는 한 떨기 백합 같았다. 디안은 조심스럽게 카를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분명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을까?
“혹시 폐하……. 황후께서 언짢게 하셨어요?”
가까이 다가온 디안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카를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분이 또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했군요. 보좌관 문제 때문에 그러세요?”
“…….”
“어떻게 폐하를 두고 보좌관을 들일 수 있단 말이에요……. 전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디안이 여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황제는 침묵한 채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폐하?”
디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와 시선을 맞추려던 순간이었다. 카를이 디안의 목덜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깜짝 놀란 디안이 일순 움직임을 정지한 사이, 황제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치 냄새를 맡듯.
“폐하?”
디안은 당황한 얼굴로 황제를 불렀다.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드는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의문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눈 감아. 키스할 것이다.”
그의 연인이 된 지 벌써 몇 년. 이런 말을 들은 것은 또 처음이라 의아했으나, 디안은 그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았다. 카를은 온순히 닫힌 눈꺼풀과 나붓한 금빛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녀에게 눈을 감아 보라고 했는지, 목덜미의 냄새를 맡아 보았는지 잘 모르겠다. 무엇을 비교하려 했는지, 비교하여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한편, 키스할 것이라던 황제가 다가오지 않으니 눈을 감고 있던 디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떴다.
“폐하?”
“깃펜에 달린 깃털처럼, 화병에 담긴 꽃처럼.”
“?”
“그렇게 살아라.”
맥락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편안한 삶이겠네요, 그건.”
“…….”
“제가 깃펜에 달린 깃털이 되면, 그 깃펜을 써 주실 거죠, 폐하? 화병에 담긴 꽃이 되면 그 화병을 옆에 두실 거죠?”
디안은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기울인 채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꼭 선물을 받아 기뻐하는 소녀처럼. 그리고 조심스럽게 카를의 눈치를 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전 좋아요. 폐하 곁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요. 저는 폐하만 있으면 되거든요.”
그 말에 카를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 넌 그렇지.”
그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디안은 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짐승의 아가리에 목덜미를 가져다 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디안이 카를을 도발적인 눈으로 올려보며 손으로 그의 뺨을 쓸어내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를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마치 목줄 채우듯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붉은 입술이 손가락 끝에서 뭉개졌다. 꽃잎을 뭉개는 것처럼 도톰한 입술을 몇 번이나 엄지로 지분거리며, 그는 다른 상상을 했다. 그때, 디안이 천천히 입을 벌려 그의 엄지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눈이 이제 흐려질 거야. 붉게 물들어 혼탁해지겠지.’
그러나 이어진 황제의 행동은 그녀의 상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불현듯 황제가 홱, 손을 빼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디안의 눈이 황망하게 커졌다.
젖어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가처럼 그의 손끝도 분명 젖었는데.
“폐하?”
아쉬움과 의문이 섞인 가녀린 목소리를 매몰차게 외면한 채 황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방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은, 오히려 뭔가 다급한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심장이 별안간 불길하게 일렁였다.
‘나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지금, 이거 뭐야?!’
그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 * *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황후궁을 박차고 나간 황제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들이닥쳤다. 놀란 얼굴로 달려 나온 긱스 부인 앞에서 멈춰선 황제의 얼굴엔, 어두운 불처럼 위험한 빛이 넘실거렸다.
“황후가 지금 합궁이 가능한 날인가?”
다짜고짜 날아온 직설적인 물음에 긱스 부인은 흠칫 놀라며 답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가능한 모양이군.”
그러고는 당황한 긱스 부인을 뒤로하고 황후의 침실로 성큼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