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밀려드는 보좌관 후보2021.06.19.
미련이 묻은 진득한 시선에 카를은 입매를 굳히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가라는데 왜 가지 않는가? 황제에게 디안은 편한 사람이었다. 에둘러 말해도, 혹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마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알아들었다. 두세 번 말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아예 그가 좋아하지 않을 행동은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저러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려는데 디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후께서 보좌관 공고를 내셨다 들었어요.”
황후라는 말을 황제가 들으면 그날에 대해 묻지 않으실까, 에둘러 운을 띄운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디안은 난감해졌다.
“……걱정되어서요. 역대 황후들께서는 아무리 빨라도 결혼 후 일 년은 지나서 보좌관을 들이셨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보좌관을 들이려 하시니 혹 폐하께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이 길게 늘어지자 카를은 매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네가 할 걱정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예?”
“…….”
“아, 네, 폐하.”
카를은 아예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 태도가 어찌나 냉정한지 디안은 눈물이 치밀었다. 하지만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누르며 몸을 돌리는데 황제가 미처 못 했다는 투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마무리 짓겠다고 했던 일은 더 이상 말 나오지 않도록 해.”
“…….”
놀란 디안이 몸을 돌렸으나, 황제는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시종에게 문서를 가져오라 명하며 다음 서류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뿐. 더는 묻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냉정한 태도에 디안은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내팽개쳐진 것처럼 몸을 떨었다. 마무리 짓겠다고 했던 일은 황후궁 추경 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말 나오지 않도록 하란 말씀은…….
“궁주님…….”
로레인도 불안한지 조심스럽게 디안을 채근했다. 비척비척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으로 몸을 돌리자 억눌렀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서운하고 서럽다. 카를 울리히. 그는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지금 이 순간, 디안은 카를의 눈빛, 말투, 태도, 말 한마디에 지옥으로 처박혔다. 그는 너무나 쉽게 그녀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었다가 지옥으로 바꾸곤 했다. 너무나도 쉽게. * * * 달칵, 문이 닫히자 카를은 힐끗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디안에 대한 그의 감정은 높은 파도와 같았다. 그 파고가 어찌나 높은지 때때로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 곧 죽을 것처럼 헐떡이는 숨. 어떤 날엔 그 모습에 가슴이 술렁여 온몸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다독이지만, 또 어떤 날엔 그 모습이 끔찍하게 보기가 싫었다. 가슴 속을 긁어 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칠 때면 카를은 미칠 것만 같았다. 오늘은 끔찍하게 보기 싫은 날이었다. 카를은 흐트러진 금발을 거칠게 밀어 올리며 차가운 물을 마셨다. 디안을 마주한 뒤에 언제나 따라붙는 감정의 이름은 죄책감이었다.
“……상아궁에 의원을 보내라. 몸에 이로운 약을 처방하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명하고 나자 진득하게 따라붙던 죄책감이 조금 가벼워졌다. 지끈거리던 머리도 거짓말처럼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디안을 빨리 내보낸 것은 사실 지금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의 보좌관 모집 공고에 대한 현 상황을 보고해라.”
시종은 즉시 종이를 넘겨 가며 현재 공고에 응한 귀족의 명단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아르망디 남작가 차남, ……삼남, ……사남, ……차남, ……입니다.”
고작 오늘 오전에 공고를 냈음에도 온갖 가문의 자제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것 같았다. 카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마법사라 하니 이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하며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보낸 모양이었다.
“발드르 공가와 관련한 사람들은?”
“아직은 없습니다. 소식이 있으면 곧장 보고할까요?”
“그래. 보고해라. 발드르 공작이나 공제가 직접 나설 리는 없을 테니 관련 가문 사람을 보낼 것이다.”
“예, 폐하.”
카를은 시종이 들고 있는 종이를 노려보듯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애 좀 먹겠군.”
* * * 한나 긱스는 과연 선대 황후의 총애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방대한 인명사전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녀를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느냐이지만, 아델의 입장에선 달리 대안이 없었다. 보좌관 모집 공고 후 면접을 보기 전, 아델은 긱스 부인으로부터 에흐몬트 정계의 핵심 인사와 주요 사건들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발드르 공가를 포섭하는 것이 최선이네.”
발드르 공작은 현재 황제와 반목하는 대표 세력의 수장이었다. 발드르 공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데스포네 공작을 수장으로 하는 집단인데, 푸아티에 백작가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이 시점에 아델이 데스포네 공가 쪽 인물을 보좌관으로 택한다면 꼴이 아주 우스워질 것이다. 하지만 고작 황후의 보좌관 자리에 발드르 공가의 직계가 나설 리는 없으니, 아델은 그들이 보낼 만한 인물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최소한 발드르 공가 쪽에서 내미는 신호는 알아들어야 하니 말이다. * *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드디어 보좌관 면접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면접자를 받겠다며 황후궁 문을 개방하자 면접자가 줄을 이었다.
“황후 폐하. 뵙는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천사가 있다면 바로 이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 천사? 내 별명이 고트로프의 마녀였는데?
“아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걸어가시는 걸음걸음 도저히 뵐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폐하의 발끝만 보았는데…… 너무나 떨립니다.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습니다.”
나도 꿈만 같단다.
“저는!! 힘이 아주 좋습니다!! 보십시오, 이 사과도, 이렇게 쪼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
“이렇게에!!!”
“…….”
“특산품 사과인 모양입니다. 과육이 단단한 사과가 맛이 좋지요. ……크흠흠.”
……그래. 사과나 많이 먹어라.
“황후 폐하, 제 특기는 노래이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니, 제발 그만해!!
“황후 폐하!! 눈동자가 꼭 금광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신다면 금이 떨어지는 것입니까?”
이런 비유 생전 처음이야. 참신해, 놀라워. 네 이놈, 네 눈에 내가 금광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 너는 탄광도 못 되는구나. 면접을 통해 뽑겠다고 했던 것이 패착이었나? 서류전형이 이래서 필요한 것인가? 금광이 어쩌고 하며 찬양을 하던 놈―이름도 모르겠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델은 소파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눈치 빠른 긱스 부인이 밖으로 나가 황후 폐하께서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며 시간을 벌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긱스 부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아델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보시오, 부인. 에흐몬트 사람들은 호전적이라 그러한가? 무슨 공고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리 몰려드는 것이오?”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긴 하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보좌관이라는 허울 좋은 직함이 있다 해도 결국 ‘황후의 정부’라는 조롱을 면치 못할 자리인데, 이렇게 득달같이 몰려온단 말이오?”
아델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솔직히 기껏 해 봐야 서넛, 많아 봐야 10명 정도가 오겠거니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도 기억 못 할 만큼 몰려올 줄이야.
“이러나저러나 황후 폐하의 보좌관이 되면 한미한 가문의 차남이라도 황궁 출입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즉, 얻는 것이 많다?”
“그렇습니다.”
“정부를 뽑는 면접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하나같이 힘 자랑, 돈 자랑, 얼굴 자랑에 내 외모 칭찬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나와 유희나 즐기자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당장에 엉덩이를 차 내쫓고 싶던 작자들을 떠올린 아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다음 사람을 들일까요?”
조심스러운 제안에 황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하시오. 황후는 말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간결하게 핵심만 간추려 소개하는 이를 선호한다고 말이오.”
진저리를 치며 하는 말에 긱스 부인은 드물게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슬쩍 이르겠습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아델은 서늘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낸 공고의 목적을 이해하는 놈이 하나도 없군.”
* * * 아델라이드의 인내심은 면접을 본 지 이틀이 되는 날부터 말라붙기 시작하더니 공고한 면접의 마지막 날,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어젯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일어났음에도 개운하지 않았다. 정오쯤에 무슨 벽돌 같은 것을 가져와서 이걸 깨부숴 보겠다며 주먹으로 내리치다가 실려 나가는 놈까지 나오자 아델라이드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괜한 짓을 했다. 벌써 마지막 날인데도 이따위라니.’
하도 보다 보니 딱 들어왔을 때 눈빛만 봐도 알 것 같아서 얼굴을 보자마자 내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발드르 공가 쪽에서 보낸 듯한 인물은 전무했다. 지친 얼굴로 다음 지원자의 서류를 내려다보는 아델에게 긱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피곤하시면 다 돌려보낼까요?”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아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의 마지막 아니오?”
“예, 그렇기는 합니다.”
“들여보내시오. 빨리 끝내야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긱스 부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역대 황후들의 경우, 권세 있는 친정에서 지원자를 한 번 걸러 주는 데다 대부분 보좌관으로 내정된 자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황후가 지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긱스 부인은 돋보기를 걸치며 다음 면접자의 신상을 눈으로 훑었다.
“자, 그럼 다음 지원자는…….”
그때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가 밀려와 세상을 뒤흔들 듯, 한순간 대기실이 어수선해졌다. 호명하려던 긱스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대기실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긱스 부인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어어…….”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긱스 부인마저도 눈을 가늘게 뜨며 쓰고 있던 돋보기를 손으로 잡아 뺐다.
몸에 딱 맞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대기실 입구에 서 있었다. 문을 열어 준 시녀도 딱딱하게 굳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뜻 검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밝은 햇살 아래에선 푸르게 보일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잘생긴 남자의 가슴엔 그 외모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과 이를 드러낸 검은 표범. 긱스 부인은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리오넬 발드르 경.”
리오넬은 품에서 빳빳한 봉투를 꺼내 긱스 부인에게 내밀었다.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관록의 노부인은 ‘지원을 하시려고요?’ 따위의 질문 없이 침착하게 그의 지원서류를 받아 들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대기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리오넬이 안내에 따라 대기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자, 긱스 부인은 사무적인 태도로 다음 대기자를 호명하여 황후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자꾸만 그를 훔쳐보기 바빴다.
‘리오넬 발드르가 지원한다고?’
‘진짜 지원한 거야?’
‘혹시 저자가 리오넬 발드르를 닮은 사람 아냐?’
하지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저 얼굴, 분위기, 가슴에 달린 발드르 공가의 배지. 틀림없었다!
‘진짜 리오넬 발드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