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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1/127)

제1화.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2021.04.03.

아델은 황후의 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천천히, 작은 미련이라도 남은 것이 있는지.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없었다.

16553283831678.jpg‘아, 정말 별것 아니네.’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놀랄 만큼 가벼워졌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저렇게 그녀의 방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달려왔는지 반짝이는 금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날카롭고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보라색 눈동자로, 남자는 아델을 노려보았다. 그는 에흐몬트 제국의 황제이자, 아델의 전남편인 카를 울리히였다. 카를은 언뜻 하얗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델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더니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16553283831685.jpg“어딜 가려고?”

이글거리는 눈빛은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듯했다. 아델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황제는 자신을 피해 문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의 앞길을 막고 바짝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16553283831685.jpg“묻잖소? 어딜 가느냐고.”

도전적으로 날아드는 아델의 황금빛 눈동자. 아무리 해도 쥘 수 없는, 이 강렬한 눈. 황제는 이대로 그녀를 가두고 싶었다. 가두고 속박하여서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가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16553283831678.jpg“…….”

그녀는 그 물음에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다시 문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황제는 기어이 그녀의 어깨를 세게 잡아 돌려세웠다. 이런 행동을 그녀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만, 이것 외의 방법을 모르겠다. 역시 아델은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두 사람은 핏발 선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한 걸음, 또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황제 카를은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에 몸서리치다가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을 툭, 털어냈다.

16553283831685.jpg“기어이 그놈한테 가는 건가?”

16553283831678.jpg“…….”

16553283831685.jpg“리오넬 발드르에게 기어이 가는 것인가?!!!”

황제는 절망하며 소리쳤지만, 아델의 표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는, 끝까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16553283831678.jpg“어딜 가는 것이 중요한가요?”

16553283831685.jpg“…….”

16553283831678.jpg“아니. 난 그게 중요하지 않아. 더는 당신의 곁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지.”

16553283831685.jpg“내 황후가, 내 곁에 못 있겠다면 어디에 있겠다는 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물음에 아델은 황당한 웃음이 터져버렸다.

16553283831678.jpg“황후? 날 폐위시켜 놓고?”

카를은 그녀의 비난에 말문이 막혔다. 아델은 웃음기를 지우고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16553283831678.jpg“차라리 잘됐어.”

마치 무언가를 탈탈 털어 낸 것 같은 모습에 카를의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만. 더 말하지 마. 카를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만 말하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델은 그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16553283831678.jpg“폐위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이 말을 했겠지.”

16553283831685.jpg“……그만.”

그녀는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초승달처럼 매혹적인 웃음을 지금에야 보여 주었다.

16553283831678.jpg“당신 옆자리, 내가 버리겠다고.”

그 말에 황제는 무너질 듯한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델은 한 줌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도 끝끝내 제 방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16553283831685.jpg“아니!! 넌 그럴 수 없어. 네가 있을 곳은 오직 내 옆자리뿐이야.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다시 내 옆에 앉히고야 말 거다. 너는 나의 황후야!!!”

감히 제게 황후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그에게, 아델은 단단한 어조로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16553283831678.jpg“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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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드넓은 광야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각종 진귀한 물건을 실은 커다란 수레가 줄을 지었고, 행렬을 호위하는 병사들만 어림잡아도 수백에 이르는 듯했다. 이 엄청난 행렬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 한 대와 마차에 나란하게 걸린 두 개의 국기일 것이다. 마차 양옆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거대한 두 제국의 깃발이 나란하게 걸려 펄럭이고 있었다. 화려한 마차에 타고 있는 여자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시야를 가리자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눈동자는, 찬란한 햇빛을 담은 듯한 보기 드문 금색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델라이드 고트로프. 단독으로 탑의 핵을 제거할 수 있는 최상위 스트라이커이자 제국 고트로프의 황녀, 아니 황태녀였던 자. 마차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요요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이국의 황녀를 열린 창문 너머로 자꾸 힐끔거렸다. 절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16553283831678.jpg“아델라이드 고트로프.”

냉소적으로 제 이름을 되뇌어 본 아델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16553283878784.jpg‘에흐몬트 황제가 보낸 청혼서다. 가서 에흐몬트의 황후가 되렴.’

16553283831678.jpg‘……도저히 불안해서 저를 이곳에 두실 수가 없으셨나 보죠, 어머니?’

16553283878784.jpg‘나는 네가 흔쾌히 응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니?’

떠보는 듯한 태후의 물음에 아델은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태후는 침묵하는 제 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16553283878784.jpg‘힘든 순간마다 그날이 후회되지 않으냐? 그날, 루시오를 죽게 뒀더라면…… 네가 고트로프의 황제가 되었을 텐데.’

16553283831678.jpg‘그만하시지요.’

아델은 핏발 선 눈으로 제 어머니를 밀어냈으나, 태후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16553283878784.jpg‘아델. 하나뿐인 동생에게 빚이 있지 않니? 너는 물론 루시오에게 충성하겠지만, 미래의 네 아이들은? 네 측근들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일까? 너 또한 마음이 흔들렸잖아.’

16553283831678.jpg‘…….’

16553283878784.jpg‘네 존재는 고트로프 제국에게 있어 턱 아래 칼과 같아. 제국을 위해, 네 동생을 위해 떠나거라.’

아델은 고개를 흔들어 어머니의 말을 밀어내며 마차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작은 함을 꺼냈다. 함 안의 붉은 봉투 속에는 초상화 한 장과 한 통의 문서가 들어있었다. 아델은 무심한 손길로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에흐몬트식 황제 의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단정한 금발과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의 이름은 카를 울리히 에흐몬트. 현 에흐몬트의 황제이자, 그녀와 결혼하게 될 사람이었다. 정신없이 쫓겨 오느라 배우자의 얼굴도, 그에 대한 정보도 이제야 꺼내 보는 참이었다. 아델은 초상화를 옆으로 밀어 두고 문서를 꺼내 들었다. 에흐몬트에 관한 아주 간략하고 적은 정보를 긴 한숨과 함께 읽어 내리던 아델의 무릎에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아델은 미간을 찌푸리며 쪽지를 펼쳤다. [카를 울리히 황제의 정부. 이름: 디안 푸아티에 나이: 29세] 아마도 그것은 정보원이 휘갈겨 온 수첩의 일부인 듯했다. 문서에 동봉하지 않으려다가 혹시 모르니 마지막에 끼워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종이에 대한 감상은 없었다. 그때,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아델은 함에서 꺼냈던 종이들과 초상화를 도로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 길은 과연 평탄할 것인가? 믿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이들을 모두 두고 왔다. 버리듯이 냉정하게 떨쳐 내고 왔다. 고개를 돌리면 늘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니 참으로 헛헛했다. 조국을 떠나, 깊고 거친 바다를 지나 도착한 대륙.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델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16553283831678.jpg“……아, 빌어먹을. 오지게 머네.”

* * * 한편 그 시각 에흐몬트 제국의 황제 카를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예비 황후와 관련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고트로프 황녀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항구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봉화를 통해 전해진 참이었다. 고트로프에서 보낸 지참금 내역을 보고한 시종은, 마지막으로 밀봉된 서류 한 부를 황제에게 올리고 물러났다.

16553283878784.jpg“지참금 내역과 관련한 서류입니다.”

시종은 황제의 얼굴을 힐끗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황제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묘한 소름을 일으켰다. 황제 카를은 무심한 손길로 봉투의 실링을 뜯어 냈다. 봉투 안에는 한 부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가 문서를 꺼내는데, 뭔가가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16553283831685.jpg“…….”

그것은 예비 황후의 초상화였다.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그림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림인데도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 만큼 눈빛이 강렬했다. 그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그림을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그림을 유심히 보던 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보통 예비 남편에게 보내는 초상화는 다소곳하게 앉아 순하게 웃고 있는 얼굴로 그리지 않나? 그러나 그림 속 여인은 붉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강단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오만함이 여자의 표정에 묻어 있었다. 카를의 붉디붉은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치솟았다.

16553283831685.jpg“……여인으로서가 아니라, 황후로서 오겠다는 의미군. 그림인데도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일렁였다. 여인으로서 오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황후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후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점의 권력도 황후궁에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굳이 바다 건너 고트로프의 황녀에게 청혼장을 보냈다. 에흐몬트에 연고가 없는 이를 고른 것이다. 카를은 차가운 손길로 초상화를 도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런 다음 다시 문서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방문객의 이름을 듣자마자 카를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16553283831685.jpg“디안의 시녀?”

16553283878784.jpg“예, 폐하.”

카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종은 재빨리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를 들여보냈다.

16553283831685.jpg“무슨 일이냐.”

카를은 그녀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물었고, 시녀는 재빨리 용건을 꺼냈다.

16553283878784.jpg“궁주님께서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폐하.”

* * * 에흐몬트 황궁 한편에는 벌써 몇 시간째 고민에 고민을 더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이였다. 그녀 앞에는 몇 세트에 이르는 티아라와 장신구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역대 황후들이 소유했던 황가의 보물이었다. 화려한 궁에서 진귀한 보물을 눈앞에 뒀음에도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얼마나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밖이 소란한 듯싶더니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재 이 황궁에서 그녀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도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여인, 디안 푸아티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16553283906393.jpg“어서 오세요, 그랜드 공작 전하.”

디안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그랜드 공작 엘리자베타의 냉랭한 시선이 그녀를 지나 황실의 보물에 닿았다. 황제의 누이인 엘리자베타는 다시 시선을 들어 디안을 응시했다. 디안은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어 엘리자베타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치에 주위에 서 있던 시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뒤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자 엘리자베타가 움직였다.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걸어가 디안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황가의 보물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 보던 엘리자베타가 디안에게 말했다.

16553283906397.jpg“보물은, 황제 폐하께서 꺼내 주셨나?”

16553283906393.jpg“…….”

16553283906397.jpg“아, 그런 것도 없었나? 누구의 허락조차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로군.”

엘리자베타의 비아냥에 디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응수했다.

16553283906393.jpg“불법적으로 가져오지 않았사오니, 공작 전하께서는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16553283906397.jpg“황후의 예식용 관을 직접 정해 주는 첩이라…….”

16553283906393.jpg“…….”

16553283906397.jpg“제국 고트로프에서 이 사실을 알면 항의성 외교문서가 날아올까 염려가 되는군.”

디안의 시선이 그제야 엘리자베타에게 향했다. 엘리자베타는 싱긋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16553283906397.jpg“첩이 골라 준 대례관보다는 시누이가 고른 대례관이 낫지 않겠나?”

엘리자베타의 말에 디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깜빡였다. 그리고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16553283906397.jpg“…….”

싸늘한 엘리자베타의 시선에 디안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빠르게 답했다.

16553283906393.jpg“아, 죄송해요. 하오나 제국 유일의 이혼 여성이시니 자격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화가 난 엘리자베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문이 거칠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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