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48)
임원영 2004-08-20 00:09:15, 조회 :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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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여나 되는 거대한 붉은 괴물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채 무림맹의 고수들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흐어억!"
갑자기 허파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해동역사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방금 전에 죽은 묵강시에서 흘러나온 피가 화악 퍼져 오르더니 최후의 일격을 가한 철두파의 고수에게 덮쳐가고 있었다.
죽은 강시에서 붉은 괴물이 유령처럼 튀어 나오다니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옆에 있던 다른 철두파 고수가 몸을 날렸다.
핏물로 된 유체라는 생각에 튕겨 오르면서 몸에 회전을 주었는지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철푸덕!
그러나 원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붉은 유체는 그의 공격을 흩어버리고 철판교의 초식에 연이은 만회전륜(萬回轉輪)의 괴초로 위험에서 간신히 벗어난 자를 여전히 덮쳐가고 있었다.
"무에야? 타탁!"
공격에 실패한 철두파의 고수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후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빡을 소리 내어 두드렸다.
회륜겁(回輪迲)이라는 절초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을 보니 유체는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 아닌 물방울처럼 낱개가 모여들어 형성된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붉은 괴물 같은 것이 감히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이었다.
방금 전에 붉은 괴물은 공격에 실패한 자신을 역공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텐데 무시하고 계속해서 동료를 공격했던 것이다.
뇌가 없으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이런 씹탱구리가!"
동료를 구해주어야겠다는 진한 동료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 무식하여 사소한 일에도 확 돌아버리는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이마빡을 두드린 고수가 또다시 땅을 박찼다.
무작정 몸을 날린 것은 아니었다.
고수인 만큼 나름대로 상대할 전략을 구사해 놓고 있었다.
회륜겁에 이은 만회전륜의 초식을 펼쳐 똘똘 말아버릴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 내공을 폭사하여 산산조각 내버릴 심산이었다.
붉은 핏물의 위력을 얕잡아 보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용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취리리리릿'
해동역사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붉은 유체가 철두파의 고수와 근접하여 붙어 있었기 때문에 천붕추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유성추는 사용할 수 있었다.
이따위 괴물에게 유성추를 창으로 찌르듯 일수유에 백여 번을 폭사시키는 천밀밀(千密密)의 수법을 사용할 줄 몰랐던지 허탈한 심정이었다.
손목의 떨림과 내공의 진동을 조합하여 펼치는 비장의 수법인데.....
퓨퓨퓨퓨퓨슝!
그러나 천의 무봉으로 완벽하리라 자신한 수법조차 붉은 괴물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화산석처럼 구멍이 슝슝슝 뚫려 버리기가 무섭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멍이 메꾸어져 버렸다.
격중되어도 타격이 없는 허깨비란 말인가?
유성추를 거둔 후 주먹에 내력을 가득 싣고 짧게 내리치고 나서야 해동역사는 붉은 괴물이 진실로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꿰뚫기 위해 밀어치기 식으로 내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붉은 유체 전반에 내기가 폭사되도록 권력을 집중하여 끊어 쳤는데 허무하게도 권력이 허공중으로 분산되어 흩어져 나간 것이다.
이어지거나 조합되지 않은 채 각개가 분리된 유체들이 하나인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하던 철두파의 고수가 몇 장 나아가지도 못하고 덧씌워질 빠른 속도로 말이다.
"이런 강시 똥구녁같은 놈아! 팬놈만 계속 패냐? 나도 너 죽이는데 일조했다 이 씁새야!"
회심의 일격인 만회전륜의 초식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또다시 무시를 당한 철두파의 고수가 악에 받친 듯 동료를 말아버린 붉은 괴물에게 맨손으로 달려들며 외쳤다.
"커어억! 컥!"
숨통이 막혀오는지 비명을 질러대는 철두파의 고수를 도와주기 위해 몸을 날리던 해동역사가 갑자기 신형을 세웠다.
죽인놈만 계속 패냐는 철두파 고수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쿠쿵!
갑자기 심장이 멈추어지는 것 같았다.
"사형!"
허리를 트는 동시에 몸이 뒤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저 멀리 사형과 자신이 합세하여 물리쳤던 강시 옆에 핏빛 애벌레인양 꿈틀거리고 있는 붉은 형체.
고치처럼 똘똘 말린 붉은 유체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콰자자자작!
먼 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백리는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붉은 꼬치가 놓인 곳과 사이에 놓여있던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 나가고 애매한 바위도 뿌리채 뽑혀 옆으로 밀려나갔다.
최단 거리를 반 호홉도 안돼 도착했지만 마땅히 손쓸 방도는 없었다.
붉은 피막 안쪽에 든 사형의 안위 때문이었다.
'이잇'
그래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방금 전 붉은 유체에 덮이자마자 숨통이 막혀와 비명을 지르던 철두파의 고수가 생각났다.
온몸의 내력을 가득 모아 양손으로 퍼트리자 옆구리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부러진 갈비뼈가 생살을 눌렀는지 인상을 찌푸린 해동역사가 한발 한발 앞으로 나섰다.
붉은 유체를 끌어안고 내력을 발산해 내기 위함이었다.
사형의 안위를 위해서는 내기를 정밀하게 발휘하여야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온몸의 내력을 양손과 피부 쪽으로 운용하여서인지 눈동자마저 핏발이 선 해동역사가 무릎을 구부리려 할 때였다.
'퍼펑!'
울룩불룩 꿈틀거리다 돼지 오줌보처럼 부풀어 오른 붉은 꼬치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엌!"
주르르르륵.
불시에 터져 나온 붉은 유체 쪼가리에 맞은 살갗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폭풍같은 기세에 뒤쪽으로 밀려났던 해동역사가 무슨 일인지 앞으로 쏠 듯이 나아갔다.
온몸에 내력을 동원한 상태라서 중상은 면했지만 이정도 충격이면 운신조차 자유롭지 못할 터인데 왠일인지 미친 듯이 달려 나간 것이다.
"사형!"
사지를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입에서 붉은 피를 덩어리째 게워내는 백광필살을 들쳐 업은 해동역사가 곰만한 덩치로 급히 자리를 피했다.
터져나가 이리 저리 널려진 붉은 조각들이 뭉쳐지는 것을 보았는지 눈가에는 아련한 공포심도 담겨 있었다.
죽인자만 쫒는 괴물이라면 또다시 사형을 쫒아올 것인데 사형의 상태를 보니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붉은 괴물이 아니라 삼류고수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금룡각의 비전 내공에 남다른 성취가 있는 사형이라서 이만큼 버틴 것 같았다.
자신이라면...
게다가 옆구리가 터지고 갈비뼈가 분지러지는 중상을 당한 자신이라면 반각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도와줄 자가 있는지 사방을 살피며 급하게 몸을 날리던 해동역사가 금색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포달랍궁의 궁주인 달뢰대라마가 있는 곳이었다.
다급한 순간이었지만 달뢰대라마가 날린 금빛 장인에 붉은 괴물이 스르르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생명력이 강한 불사의 붉은 괴물이 금빛 장인에 당한 후 더 이상 소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던져 버리고 해동역사가 법왕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한번 해 보겠는데 저건 귀신도 아니고 유령...
그러고 보니 말로만 듣던 유령인 것도 같았다.
형체가 있는 붉은 유령...
오한이 든 듯 해동역사의 몸이 쭈삣 거려졌다.
해동역사가 덩치 값도 못하고 몸을 숨겼지만 법왕은 전혀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등에 업힌 자의 숨소리가 매우 미약함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의 용기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친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내팽개칠 수 있음은 진실로 용기 있는 장부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미타불!"
짧은 불호성을 외운 후 득달같이 달려오는 붉은 유령을 향해 법왕의 한손이 고요히 나아갔다.
금빛 광채가 어린 손바닥이 찰나지간에 두배 열배 백배로 확대되어졌다.
'콰스스스슷.'
순간 금빛 장인 속으로 뛰어든 붉은 유령이 녹아들 듯 사라졌다.
아니, 녹아든 것이 아니었다.
붉은 유체 속에 담긴 생령의 기가 천지도태의 경지에 이른 법왕의 금황천령기(金皇天靈氣)에 분해 되어 버린 것이다.
생령의 기가 사라진 유체는 증발되어 버리고 말이다.
또 한 구의 붉은 유령을 처치한 법왕의 시선이 돌아간 곳은 옆에서 입을 떠억 벌리고 있는 해동역사도 그렇다고 여전히 패악적으로 날뛰고 있는 묵강시와 붉은 유령들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저 멀리 천천히 걸어오는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불사의 괴물이라 생각되던 붉은 유령들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처치한 고수가 긴장된 눈빛을 발하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해동역사가 사방을 훑어보았다.
법왕의 눈길이 향한 곳에 이르자 해동역사가 흠찟 몸을 떨었다.
몸에서 이상한 빛이 번뜩이는 놈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제일 앞쪽에 걸어오고 있는 놈은 등 뒤에 수십여 자루의 무기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자의 좌측에는 널찍한 장포에 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가린 칙칙하게 생긴 놈이 따르고 우측에는 몸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두 놈이 따랐다.
바로 뒤쪽에 온몸에서 녹색 광채를 뿜어내는 놈들도 따랐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들의 십 장여 뒤쪽에, 생긴 것만 보아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살스런 별의별 요괴들이 일백여구나 따르고 있었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요괴들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으니 더욱더 흉맹스러워 보였다.
요란스러운 괴음은 없었지만 요괴들의 흉흉한 눈빛은 벌써부터 계곡을 살기로 치절치렁 옭아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