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46)
임원영 2004-08-15 23:51:11, 조회 :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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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외곽의 작은 도시 아패(阿?)
도시는 갑자기 들이닥친 무인들로 북적거렸다.
행색이 꾀죄죄하고 피곤에 절은 듯한 정파 무림의 군협들이었다.
풍족한 식사와 목욕 그리고 푹신한 침상.....
모두가 바라는 바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작은 도시라 일천여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숙소가 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짧은 휴식을 끝으로 피곤이 덜 풀린 몸을 일으켜야만 하였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식사도 거른 채 일행들을 위해 동분서주한 청무대의 얼굴을 보아서였다.
청무대원들이 끌고 온 일백여 마리의 말위에는 갈아입을 옷가지와 며칠분의 음식 그리고 노숙에 필요한 물품들이 실려 있었다.
피곤과 허기에 지친 듯한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짧은 시간동안에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녔는지 짐작할 만 하였다.
아패(阿?)를 벗어나 경공을 전개하면서 금룡각의 해동역사는 숨을 헐떡이었다.
보무당의 무인들 중 자신의 경공 실력이 제일 뒤떨어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보무당의 선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고 있음은 앞에 있는 은성 때문이었다.
검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달리고 있는 은성의 두 발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느라 날이 저물어 가는 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은성은 매우 특이한 경신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두 발만을 움직이고 있을 뿐 허리위로는 미동조차 없었다.
품속에 안은 '금아'라는 새 때문인 것 같았지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아하니 내공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힘 한 푼 들이지 않고 잘도 달려가고 있었다.
경신법을 익히기 위해 사형인 백광필살(白光必殺)을 졸라 그동안 등한시 했던 사문의 수법을 다시 배웠으며 그도 부족하여 창피를 무릅쓰고 대리국의 단섬에게 지도조차 받은 해동역사였다.
무공 교환이 보편화된 보무당인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재확인한 내용이었지만 경신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내공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허리였다.
몸의 균형 유지는 물론 힘의 집중과 가속력을 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체 부위인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수련하여 전보다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은성의 경공자세를 훔쳐 배우는 것이었다.
드디어 훔쳐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하여 무리하여 따르고 있었는데 그 완벽한 자세는 어디가고 은성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자세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보고 배울 것이 전무한 형편없는 자세였다.
그런데도 해동역사는 은성의 뒤를 열심히 따르고 있었다.
저런 불량한 자세로 어떻게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롭게 나아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허리는커녕 두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대지에 힘을 쏟고 그 반동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경신술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의문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골절 부위를 접지하고 심기로 내상을 다스렸기 때문인지 금아의 회복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아패를 떠나 첫 번째 야영지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후 은성은 금아의 혼혈을 풀어주었다.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혼혈을 짚었지만 배가 고플 것 같아 깨운 것이다.
그런데 금아가 깨어나자마자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어이, 빡빡이 오래간만이네. 어! 아니 이게 뭔 지랄들이야. 나만 빼고 식사를 하다니!"
맞은편의 달뢰대라마를 보고 아는 체를 하다가 식사시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푸드닥, 퍼득'
날개짓을 해보니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날수는 있을 것 같았다.
쪼르르 날아 일행들이 먹는 음식을 살펴보고는 볼멘소리를 하였다.
"무슨 식사가 이 모양이야?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정말 불쌍하다. 이것도 음식이라고 꾸역꾸역.. 나 같으면 안 먹는다. 안 먹어!"
은성의 어깨로 돌아와 양 날개를 접어 팔짱을 끼듯 앞으로 모으고 새침때기 같은 표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배고플 테니 이거라도 먹어!"
은성이 건포(乾脯)를 집어 금아에게 내밀었다.
찐 밥도 있었지만 육식을 하는 금아에게는 건포밖에 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싫다. 이딴 건 안 먹는다. 내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왕년에....."
"이거라도 먹어야 힘을 내서 혈붕(血鵬)에게 복수하지."
금아가 장광설을 펼치려고 하자 은성이 얼른 말허리를 잘랐다.
그냥 떠들게 내버려두면 일행들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것 같았다.
사부님과 사숙님은 물론이고 달뢰대라마와 검후까지 있는데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금아를 선동시켜 건포나마 먹게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뭐..! 야! 내가 운이 없어서 당했던 거지 그깟 빨간 닭한테 실력이 딸려서 졌을 것 같으냐? 까불기에 한쪽 눈깔도 터트려 버렸는데....."
하지만 어쨌든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변명을 하려고 해도 그 부분에서는 말이 콱 막히는 금아였다.
"아미타불! 그래도 금형이 구름 속에 숨어있는 만수괴왕을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일 날뻔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달뢰대라마가 금아의 꺼져가는 기를 살려 주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불씨가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불꽃에 기름을 부은 듯 활활 타올랐으니 말이다.
"키륵 키륵, 그래도 빡빡이가 제일 똑똑하구나. 맞다. 내 공적(功績)이 제일이지. 그리고 그놈의 빨간 닭..다음에 만나면 국물도 없다. 털 뽑힌 소경 닭을 만들어 주마!"
달뢰대라마의 칭찬에 기고만장하여 괴상한 웃음소리를 질러대더니 푸드득 날아 달뢰대라마의 어깨에 앉아 귀에 대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빡빡아! 앞으로 그런 얘기는 더 크게 해라. 알았지! 그리고 너도 쬐끔 수고했어."
"금아야! 법왕에게 말 함부로 하면 못써!"
작은 소리로 속삭였지만 은성의 청각은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다는 말인가?
"빡빡이를 빡빡이라고 하지 뭐라고 부르냐?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데 그럼 새끼중이라고..... 알았다. 알았어. 야! 내가 장난 좀 쳤다고 그렇게 호통을 치고 그러냐! 앞으로는 빡빡이님 이라고 부르면 될 것 아니냐?"
은성이 금아를 전음으로 나무란 것 같았다.
나무라다 보니 금아가 달뢰대라마를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자 넌지시 일러주었다.
[법왕이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패륵 선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법왕? 법왕! 법왕..! 이상한데. 은성아! 그러지 말고 그냥 빡빡이로 하자. 얼마나 정감이 가는 이름이냐?"
"안돼."
은성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스승님! 괜찮습니다. 빡빡이를 빡빡이라고 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저는 게의치 않습니다."
"그렇지! 너도 빡빡이가 훨씬 듣기 좋지?"
"금아야!"
은성의 나직한 호통소리.
"알았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법왕이라고 할께. 힝..!"
은성의 목소리에 화난 듯한 기색이 엿보이자 금아가 흘끔흘끔 은성의 눈치를 보며 음성을 낮추었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지만 은성에게만은 막 나갈 수 없는 금아였다.
은성은 생명의 은인 이상 가는 존재였다.
영물이다 보니 은성이 자신의 숙명적인 주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아야! 화내서 미안해. 그리고 배고플 테니 좀 먹어!"
은성이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육포를 다시 내밀었다.
그런데 죽어라 사양하던 금아가 왠일인지 육포를 받아먹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고는 더 없냐는 듯 쩝쩝 입맛까지 다셨다.
은성이 손에든 육포를 진화기로 알맞게 익히자 노릿 노릿하게 적당히 익은 육포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허기진 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은성아! 수뇌부들이 무림맹을 탈환하기로 결정했다는데 사실이냐?"
사숙인 구천진인 이었다.
은성에 의해 심장질환이 치료된 후 지옥화조(地獄火鳥)를 다스리는 것뿐만 아니라 내공에도 큰 진전이 있었는지 얼굴에 화색이 넘쳐흘렀다.
"무림맹에서 빠져나온 맹도들과 세(勢)를 합치기로 연락이 되었답니다. 문상의 말씀으로는 마교와의 전면전이 이미 시작이 되었으며 최단 시일내에 거점을 확보해야 하는데 무림맹 만한 곳이 없답니다. 마교측에서 선선히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다시 탈환해야 한답니다."
"희생을 각오하고서라....."
구천진인의 낮은 중얼거림에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뭔 걱정이야! 오면 깨부수고 까불면 쳐들어가서 두목 죽이고 항복 받으면 되잖아. 안 그래?"
분위기가 가라앉자 금아가 쪼르르 날아다니며 기세를 북돋워 주었다.
"아미타불! 금형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나면 가는 것이 천지간의 순리인데 내일 걱정으로 오늘을 근심 속에 지새울 필요는 없는 법이지요."
"역시 빡빡... 아니, 법왕이 민대머리라 그런지 성격이 시원스럽단 말이야."
마음에 들었는지 법왕의 어깨에 내려앉은 금아가 날개짓으로 법왕의 머리에 연신 바람을 불어 주었다.
흔들리는 것은 없었지만 시원한지 법왕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은성의 헌신적인 치료로 날아다닐 수 있었지만 금아는 아직 내상이 낫지 않은 상태였다.
부러진 날개도 완전히 아물지 않아 장거리를 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은성이 심기로써 계속 치료해주자 아패(阿?)를 떠난지 이틀 만에 무리 없이 날아다닐 수 있었다.
날개도 거의 완치 된 것 같았다.
상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음이 확인되자 금아는 은성에게 몇 마디 말을 전하고는 잿빛 구름 저 너머로 사라져 갔다.
잿빛 구름은 곤륜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날 밤.
일행은 음시곡(陰尸谷)이라 이름 붙은 계곡에서 야영을 하였다.
으스스한 이름과는 달리 평야처럼 널따란 산골짝에 개울이 흘러 야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술시말(戌時末:아홉시)쯤 된 것 같았다.
오래 만에 달뢰대라마와 법어(法語)를 주고받으며 사제간의 연을 돈독히 하던 은성이 흠찟하며 갑자기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은성의 돌연한 행동에 의아심이 든 법왕도 뒤따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큰일이라도 발생한줄 알고 긴장한 채 허공으로 올라선 법왕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오십여명의 무리들이 쳐들어와 격렬히 싸우다가 기세에 밀려 뿔뿔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무림맹의 고수들에 의해 참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교도일 것이 분명한데 하나같이 검과 도를 들고 있었다.
'캉 캉 챙강'
무기 부딪히는 소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닌바 무위로 보면 쳐들어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싸움이 싱겁게 끝이 나자 허공으로 뛰어오른 초극고수들도 서서히 내려 앉았다.
그런데 은성과 법왕만은 여전히 허공에 떠있었다.
은성이 심각한 안색으로 사방을 훑어보자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한 법왕도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휘르르릇'
바람처럼 흩어져 격전지를 한바퀴 돌고 온 은성이 내려오자 그때서야 법왕도 내려왔다.
은성의 품안에는 숨진 마교도들이 버린 검과 도가 가득이 들려 있었다.
쌍검이나 쌍도를 든 마교도들이 유독 많아서인지 팔십여개나 되었다.
커다란 바위 앞에 내려선 후 병기들을 풀어놓고 심기를 발하자 팔십여개의 병기들이 일제히 날아가 바위에 꽂혀 들어갔다.
병기들을 수거하면서 전음을 날렸는지 모산파의 주진인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은성이 왜 불렀는지는 주진인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검과 도가 박혀든 바위에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안면 근육이 굳어져 갔다.
검과 도속에 숨 막힐 듯한 요기(妖氣)가 숨겨져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침입한 마교인 중 한명을 직접 죽이기까지 한 주진인이었다.
그때는 마교의 무사가 든 병기에서 아무런 요기도 흘러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오? 저것들은 도대체....."
주진인이 품속에 손을 넣어 부적을 한 웅큼 꺼내들며 은성에게 물었다.
부적 뭉치 중 검은색 묵지에 주사로 기기묘묘한 동물의 그림이 그려진 부적을 골라 재빨리 간추렸다.
"병기 안에 요물(妖物)들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지만 적의 술사가 명령을 내리면 저 병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흉기가 되어 날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효능이 있는 부적인지요?"
말을 하면서도 은성은 심기로써 바위에 꽂힌 병기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병기 속에 봉인된 요물들이 미쳐 날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바위 속에 병기들을 꽂아 두었기 때문에 바위에 심기를 보내 팔십여자루의 병기를 한꺼번에 옭아맬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멸살요부(滅殺妖符)라고 능히 요물들을 퇴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모산파에서만 비전되어 전해지는 역천의 위력이 담긴 부적입니다."
"주진인님! 혹시 병기 안에 든 요물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어만 할 수 있는 술법은 없는지요?"
"있긴 있습니다만..."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주진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병기 속에 요물을 봉인하여 조종할 수 있는 술법가라면 보통의 술사가 아니었다.
자기도 나름대로 술법에 자신이 있었지만 아직은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술법중의 하나인 것이다.
다행히 모산파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장의 부적으로 술법을 파괴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저처럼 고정되어 있을 때뿐이다.
봉인이 풀려 이기어검처럼 허공을 휘젓고 다니면 선배고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멸살지부로도 대처할 수 없었다.
그처럼 위험한 술법인데 파괴시키지 말고 제어만 하라니 은성의 의중을 짐작키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은성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주진인 이었다.
미로환상진(迷路幻想陣)에서 은성의 위세를 직접 본 이후로 인간이 아닌 천신(天神)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런 은성의 부탁이니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주진인이 멸살요부를 품에 넣고 꺼내든 부적도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요마봉인부(妖魔封印符).
모산파에 세장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부적이었다.
희귀한 만치 사용방법 또한 괴이하였다.
붉은 부적을 똘똘 뭉쳐 덥썩 입안에 넣은 주진인이 맛있는 음식을 먹듯 부적을 씹어 삼킨 후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짝거렸다.
그러자 주진인의 형상이 괴이하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퍼렇게 빛나는가 싶더니 힘줄이 툭툭 튀어 나왔다.
튀어나올 듯 확대된 눈동자에도 붉은 힘줄이 불거져 나오고 눈빛이 괴악스럽게 빛나더니 단정히 빗어 뒤쪽에 묶어 씌워놓은 옥관(玉冠)이 퍽하니 터져 나갔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머리카락이 하늘로 뻗쳐오르고 얼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푸확!"
입에서 뿜어져 나가는 선홍색 핏물.....
안개처럼 뿜어진 검붉은 핏방울이 바위로 내려앉더니 병기에 끈적하니 달라붙었다.
일순 병기들이 부르르 떨었다.
발악하듯 요동치는 병기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심기를 가중한 은성은 잠시 후 부적의 효과가 발휘된 듯 잠잠해진 병기들을 향해 또 다른 의미의 심기를 보냈다.
유령왕을 만들때 사용했던 방법대로 심기를 유형화하여 날카로운 병기들의 끝부분을 옭아매도록 한 것이다.
"대분분의 요물들은 낮에 일광(日光)을 받으면 스러질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요물들도 있으니 이곳에 계속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어느새 제 형상을 찾은 주진인이 피곤한 듯한 안색으로 사이한 빛을 뿜어내는 병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에게 달리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주진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포권의 예를 하고 돌아서는 은성은 심사가 복잡한지 고뇌에 담긴 눈빛이었다.
서서히 걸음을 옮겨 보무당의 거처에 돌아와서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채 무언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마음의 결단을 내린 듯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하매! 어디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오늘밤 안으로 돌아올거야.]
검후에게 전음을 날린 후 달뢰대라마에게 검후와 사부님의 안부를 재차 당부한 은성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적의 술사가 출현하는 등 위급지경이었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장내에서 꺼지듯 사라진 후 허공중에 높이 떠오른 은성이 최고속도를 내며 날아가고 있는 곳은 유령왕의 동부가 있는 무산(巫山)이었다.
무산의 석부에 있을 유령왕을 소생시켜 마교에 대항하고 병기에 봉인된 유령들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곤륜산의 깨달음으로 허무경 팔단계의 경지에 이른 은성의 비행속도는 예전에 무림맹에서 무산으로 날아가던 때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출발한지 두시진 만에 태양신 염제(炎帝)의 딸인 요희(瑤姬)가 산다는 무산에 도착하였다.
'휘스스스스..'
공간이 휘어들어 은성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암벽 틈새로 빗물이 스며들 듯 소리 없이 석부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은성의 영안이 빛을 발했다.
[크카카카! 드디어 찾아 왔구나.]
금령석(金靈石) 사이로 치솟는 영기(靈氣)가 희미하게 뭉쳐지며 유령왕이 나타났다.
흐릿한 영상으로 현천교의 극락조단 고수들에 의해서 결계 안에서 사라질때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늦게 와서 미안하오. 시간이 부족하니 형상부터 찾아야겠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은성의 상단전 부근에서 희미한 투광(透光)이 뿜어져 나왔다.
심기를 태극진기처럼 유형화해 유령왕의 형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바쁘냐? 야차귀노라도 나타났느냐! 우와!]
다급한 은성의 심사와는 달리 느긋한 표정의 유령왕이 환희에 찬 기음을 발하더니 후다닥 은성이 만든 진체(眞體)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이미 은성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다른 절차 없이 간단하게 합일된 유령왕이 석동 안을 바람처럼 오가더니 은성에게 달려와 은성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쁨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굉..굉장하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심기를 유형화해 만든 형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심기로써 만들어진 형체이니 예전처럼 굳이 숨어들지 않아도 이제는 타인의 눈에 뜨일 염려가 사라져 버렸다.
거기다 태극진기에 비해 몇 배나 강력한 심기였다.
그리고 천지간의 순수한 정화로 이루어진 심기이다 보니 태극진기에 비해 부자연스러움이 덜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으니 다행이오! 급한 일이 있으니 일단 출발합시다. 자세한 것은 가면서 설명해 주겠소."
막대한 심기를 쏟아내 유령왕의 진체를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로한 기색이 아니었다.
석동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섬광처럼 날아올라 어느새 오백장 상공에 떠 있었다.
유령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을까봐 어느새 유령왕도 은성의 곁에 위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