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40)
곤륜구봉을 넘어 청령전 상부에 이른 은성은 검후와 사부가 무사함을 확인한 후 그곳을 지나쳐 앞쪽으로 쏘듯 이 날아가고 있었다. 왠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저 멀리에서 영안을 자극해 왔기 때문이었다. 곤륜지로(崑崙之 路)의 한적한 장소, 전에 자신이 결계를 파괴한 근처 숲속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펴보니 구룡중 칠룡이 현천교의 현세화단 고수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소림사에서 달마삼검을 얻어 폐관 수련중인 정천 스님과 존재는 하되 신분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신비인 단 둘을 제외하고 구룡이 모 두 모인 셈이었다.
현천교는 도에 대한 깨달음이 높은 도인들이 현세에 극락을 만들어 보자는 고고한 취지로 모여들어 만든 집단 이었다. 수뇌진이 천축의 고수에게 제압당해 이지를 상실하고 꼭두각시로 변하지만 않았다면 영원무궁 하였을 것이었다.
천축 고수의 꼭두각시가 교주로 내정된후 배교와 밀교의 무공을 받아들여 방문의 무공으로 변질되어졌지만 원 래는 순수한 도가계열의 모임인 것이다. 당연히 전수된 무공들도 도가 계열의 현천비기(玄天秘技) 들이었으며 위력 또한 무림 구대문파의 진산 절기들에 비교될만한 수준이었다.
그 현천비기를 수준급 이상으로 연무한 절정 고수들만 모아 조직한 집단이 바로 현세화단 이었다.
그래서인지 구룡중 칠룡이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칠십여명의 현세화단 고수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 다. 다행히 전세는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도 하나같이 현천교의 현세화단 고수들이고 말이다.
칠룡 모두가 대단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발군은 역시 모용세가의 장문인이자 구룡중 첫째인 모용천과 삼 성검문의 옥룡 반수석 이었다.
하지만 이에 비견되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무당파의 진허 도인이었다. 은성에게서 치료를 받은후 무공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높아진 때문이었다.
구룡과 싸우는 현세화단 고수들은 무엇인가를 보위하는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일까?
교의 사활(死活)을 걸고 청령전에 대규모 공세를 집중하는 이 시점에 현천교의 최정예 무사들인 현세화단 고 수들이 일백여명이나 뒤쪽으로 빠져 있다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일진데...
바로 술법을 부리는 극락조단의 고수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은성의 영안에 현세화단의 뒤쪽에 몰려있는 일백 오십여명이나 되는 극락조단 고수들이 포착되어졌다.
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사기(死氣)가 물씬물씬 풍겨져 나왔다.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이들이 뭉쳐진 힘의 가공함을 뼈저리게 실감한 은성이 불안한 심정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러면 그렇지...
저 멀리에서 엄청난 덩치의 괴물이 발광하듯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무당파의 삼천진 인이 불러들여 죽음의 묵운(墨雲)을 삼키도록 시킨 신수(神獸)가 분명하였다. 삼천진인의 명으로 멀리 피신하 였는데 삼천진인의 법력보다도 이들 극락조단 술사들의 뭉쳐진 법력이 더 높았는지 어느새 가까이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신수의 배를 보니 금새라도 터져 버릴 듯 보였다.
그런데 은성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천계의 요물인 신수이지라 심안을 익혔다 하여도 그 형상이 선연히 보여 질 리가 없는데 머리에서 꼬리까지 확연히 보여지고 있는 점이었다. 영안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귀신이나 영계 의 존재들을 볼수 없는 법인데 말이다.
어쨌든 사태가 매우 위급지경에 처해 있음을 발견한 은성은 허공에서 내려와 땅에 닿기가 무섭게 화룡검을 땅 에 꽂았다. 그리고는 조사지공인 지일이(地一二)의 수법을 발휘하였다. 순간 화룡검에 주입된 심기가 땅속으 로 미친듯한 기세로 흘러나갔다.
토맥을 따라 흐르던 심기가 혈관에서 핏줄이 나뉘듯이 수백 수천 가닥으로 분화 되어졌다. 그리고는 화산이 분출되듯 갑자기 상승하였다.
형체가 없는 심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은성이 심기에 음유한 성질을 띠운채 방출했기 때문일까?
해일처럼 거대한 기세로 몰려나갔던 심기이었건만 밖으로 표출되는 기세는 부드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미세한 먼지 한알 흩날리지 않는 가운데 극락조단 일백오십여 술사들이 모여있던 장소에는 지옥의 마겁이 고 요히 내려앉았다. 죽음보다 더한 침묵을 동반한채로.....
술사들에게서 흘러나오던 사기가 멈추어지자 다 죽어가던 모습으로 발광하던 신수(神獸)가 돌연 조용해졌다.
그리고 칠장이나 되는 몸체에 흉물스럽게 튀어나온 배가 급격히 가라앉더니 잠시지간 이장 정도의 크기로 줄 어들어 버렸다.
영안에 보여지는 신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경이 그 자체였다
전설의 동물인 용의 머리에 늘씬한 호랑이의 몸체를 지녔는데 타오르는 듯한 붉은 갈기 속에는 용린(龍鱗)처 럼 비닐이 돋아 있고 등 뒤쪽에 솟아 있는 검은 첨각(尖角)은 용맹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도가의 전설적인 신선인 화령요선(火靈妖仙)의 수호지수인 신수는 은성이 그를 구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에서 은성을 바라보며 앞발을 모으더니 넙죽 절하듯 상체를 숙였다.
그런 연후 하계에서의 임무가 끝난 듯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갑자기 허공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렸다. 삼천 진인의 부탁을 들어주라고 명령을 내린 화령요선(火靈妖仙)이 사는 선계로 뒤돌아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구룡은 여전히 선전(善戰)을 하고 있었다.
현천교의 현세화단 고수들을 그사이 이십여명이나 더 줄여 놓았던 것이다.
이제는 오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안에 전투가 마무리될 것 같았다.
'스르르릇'
한시름이 놓인 은성의 신형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 올랐다.
그런데 몸을 틀어 청령전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던 은성의 눈에 이채가 스치더니 허공중에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구석진 곳 매우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긴 채로 구룡과 현세화단 고수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인영이 있었던 것이다.
세불리(勢不利)를 느꼈는지 살금살금 몸을 빼는 외팔이는 은성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흰자위가 없는 칠흑같이 검은 동공을 지닌 음악한 인상도 신경에 거슬렸지만 멀리에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음침한 죽음의 사기(死氣)가 짙게 풍겨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진 마음으로 심기를 쏘아내자 자욱한 피보라가 터져 나왔다.
'이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무모한 살생을 펼쳤는지 자학이 되어졌지만 어짜피 오늘은 크게 살계를 범하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현천교의 지상목표인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저런 자들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우연히 은성의 눈에 띈 귀명자의 어이없는 죽음이기도 하였다.
청령전에 도착하여 전세를 살펴보니 무림맹의 일방적 공격이 자행되어지고 있었다.
괴인도 두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현천교 수호단의 적포인들은 전멸되었는지 모습을 찾을수가 없었다.
현천교의 호위대들도 법왕에게 대다수가 당한 듯 보였다.
금색 장인이 번쩍이는 곳에 호위대 몇 명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법왕의 놀랄만한 신위를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언쩍, 꽝, 콰드드드드!"
괴인의 무위는 여전히 가공스러웠다.
소림사 범각대사의 쌍장을 혈살기로 맞받은 괴인이 팽이처럼 수십바퀴 몸을 뒤집더니 좌측에 검을 든 노인에게로 혈광에 휩싸인채 덮쳐갔다.
은성이 처음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허공중에 고요히 떠 있을수 있는 놀라운 내공과 번개처럼 번뜩이는 검식을 보니 누군지 유추해 낼수가 있었다.
검에서 백룡인 듯 두개의 광휘가 튀어나와 혈광을 꿰뚫어가는 초식이 삼성검법의 제이초인 쌍성쟁천(雙星爭天)이었던 것이다.
"꽈과과과광..쾅"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으로 혈광이 급격이 위축되고 희미해지자 현맹주의 부친이자 전대 무림맹주이기도 한 삼극(三極) 반전자의 모습이 백광에 휩싸였다.
그리고 백광속에서 거대한 세줄기 광휘가 피어 올랐다.
쌍성쟁천을 펼칠때 내보였던 광휘보다 몇배나 크고 밝은 광휘였다.
허공으로 일순간에 피어올라 혈살기에 싸인 괴인을 덮어가던 거대한 광원이 괴인이 위치한 곳에서 절묘하게 겹쳐졌다.
적청녹으로 색상조차 선명한 세줄기 광휘가 겹쳐지자 겹쳐진 그곳은 백색으로 빛을 발했다.
그런데 백색의 광휘는 매우 신비한 힘을 지닌것 같았다.
그토록 신출귀몰하던 괴인이 재대로 신형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착각인듯.....
삼색이 뭉쳐져 백색으로 변화된 곳으로 일점의 광채가 번쩍인 것은 찰나의 시간이었다.
'버언쩍'
일점(一點)의 광채는 괴인의 이마 부위로 정확히 파고 들어갔다.
연후.., 막강한 신위를 자랑하던 괴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두개골이 꿰뚫리고 뇌가 새카맣게 타버리면 생을 지탱할수 없는 것이 천지간의 법칙인 것이다.
삼성검법의 제사초인 사성무극(四星無極)의 놀랄만한 절초였다.
삼초인 삼성개신천(三星開新天)으로는 제압할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자 근래에 가까스로 터득한 삼성검법 최후의 초식으로 승부를 결해버린 것이다.
내력 소모가 심했던지 전대 무림맹주도 무거운 몸짓으로 떨어져 내리는 괴인과 같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무상과 대결을 벌이고 있던 마지막 괴인도 동료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한 것 같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무상의 무형검에 옆구리를 깊이 허용하면서 무리하게 도주를 시도하였다.
죽음을 도외시한채 덤벼들던 괴인이 설마하니 도주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무상이었다.
괴인이 도주함을 알아차린 직후 무상 역시 신법을 배가시켰지만 이미 쫒기에는 늦어 있었다.
무형검을 나누어 무형시(無形矢) 한줄기를 날렸지만 헛되이 괴인의 허벅지를 관통시켰을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수도 없었다.
그런데 괴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은성의 시선이 괴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괴인이 도주로로 삼은 방향이 은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휘스스스'
연기처럼 사라진 은성의 신형은 괴인의 앞쪽 허공에서 거짓말 같이 솟아 나왔다.
그리고 번뜩이며 휘둘러지는 칠장 길이의 붉은 검강.....
붉다는 느낌은 검이 휘둘러지고 허공에 남겨진 잔상 때문에 알수 있었다.
아니 착각일수도 있었다.
자욱이 퍼져가는 피분수에 눈이 착시를 일으킨 것일지도 몰랐다.
괴인이 도주함을 아쉬워하며 시선을 돌리던 초극고수들 모두가 경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을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은성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범각대사마저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들의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은성은 지상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상황이 우세해지자 작전 지시를 위해 무림맹주와 문상이 함께 위치한 곳이었다.
손에든 인두(人頭)를 공손히 무림맹주에게 건네주자 옆에 있던 문상이 먼저 은성의 뜻을 이해하였다.
"이대협! 혹시 현천교주의 목인지요?"
"그렇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피해야 될 듯 싶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적의 수뇌부들이 전멸하다시피 한 지금 남아있는 현천교도들을 도륙하는 것은 잔악한 학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이다.
이들이 살아 돌아간다고 하여도 더 이상 현천교는 예전의 성화를 누릴수 없을 것이었다.
무림의 생리상 교의 지배권 확보를 위한 내부 권력 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힘이 약화되어질 것이 뻔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억압받았던 주변 세력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도 너무나 당연하였다.
명맥만 유지하다가 자연도태 되어질 것이고 운 좋게 옛 영화를 되찾는다 하여도 수백년 후일 것이다.
문상이 염화시중의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현천교주의 목을 받아든 무림맹주가 허공답보의 초식을 발해 허공으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음성에 내기를 가득 담아 사자후를 발했다.
" 멈추시오! 현천교의 교주와 수뇌들은 모두 참살되었소. 현천교도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시오! 항복하는 사람은 살려줄 것이오!"
사자후 소리가 청령전 전역을 휘어감았지만 현천교도들중 무기를 버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싸움에만 집중하는 교도들이 대다수였다.
무림맹주의 말을 온전히 믿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이어 울려퍼진 무림맹주의 외침을 듣자 모두의 시선이 허공중에 떠있는 맹주에게 집중되어졌다.
"이것이 바로 현천교주의 목이오. 눈이 있으면 확인하시오. 현천교주는 물론이고 수호단과 호위대 모두 참살되었소.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시오!"
무림맹주의 치켜든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교주의 인두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현천교 호교무인 장오(張五)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번 작전은 실패할 확률이 전무하다고 알려졌던 작전이 아니었던가...
믿기지 않았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주변을 휘둘러 보니 교(敎)내 고수들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었다.
어쩐지 형편없이 계속 밀리더라니.....
갑자기 온 몸의 맥이 탁 풀렸지만 이대로 무릎을 꿇기에는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어 차피 교를 위해 내놓은 목숨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병기를 떨어트리는 교도들을 보자 손아귀에 든 삼척 장검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져 왔다. 주변의 동지들이 무릎을 꿇자 가슴속 깊이 형용할수 없는 자괴감이 느껴져 왔으나 패배는 돌이 킬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크윽!"
무기를 떨구고 두 무릎을 땅에 대자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가담했던 현천교가 아니었는데....지상천국을 이루어 불쌍한 부모형제는 물론 주 변 이웃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면 이 한 몸 죽어도 상관 없는데.....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참고자 해도 폭포수 같이 자꾸만 흘러나와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