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38)
임원영 2004-07-03 00:38:14, 조회 : 441, 추천 : 10
높이 올라 사방을 굽어보니 검후의 빙검 여래혼에서 뿜어지는 검광을 쉽게 찾을수가 있었다.
삼십여명도 채 안되는 보타문의 문도들이 검후를 보위하며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중 흑백이노(黑白二老)라 불리는 두 장로의 무공이 발군이었는데 백검을 사용하는 백의천녀(白衣天女)와 검은 괴장을 사용하는 흑의나찰(黑衣羅刹) 이었다.
유하고 변화무쌍한 신법에 강하고 패도적인 무공이 조합되어 상승작용을 하여서인지 무위가 매우 돋보였다.
보타문 주변에는 현세화단의 고수들과 호교무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보타문의 무위가 돋보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검후의 빙검에서 얼음의 정화를 담은 차디찬 한광(寒光)이 바람으로 뿜어져 나가면 적도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가끔씩 무공이 고강한 적포인이 달려나와 검후를 견제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검하고혼(劍下孤魂)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천부경을 수련하여 전대 검후의 경지조차 넘어선 검후는 상징적인 명호에서 진정한 검후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두명의 적포인이 협공하였지만 빙검 여래혼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화영(花影)속에 수십여 발자국을 밀려나더니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화려한 옥녀산화의 초식은 예술이자 환상이었다.
팔방으로 폭출되던 화영이 검후가 원하는 방향으로 완벽하게 조절되어 퍼져나가는 것이 초식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검후의 안위는 문제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자 이번에는 사부님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무당 무인들의 주변에는 사파(邪派)의 무공을 사용하는 적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청해성내 수십여 사파에서 자진하여 지원한 무리들인지라 독특한 무공도 많았는데 태반이 잡스럽고 악랄한 수법들이었다.
무공이 약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사파의 거두들 또한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무공이 약하다고 결코 얕잡아 볼수는 없었다.
하루하루를 살인과 음모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생존을 위한 비장의 수법 한두가지는 반드시 보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하나같이 고수인 보무당원들이었지만 몇 명은 적도들과 함께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드넓은 전장(戰場)중 가장 처참하고 치열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사부인 자운검은 은성이 건네준 조사지공에 큰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중검(重劍)의 묘리가 담긴 무진중(無盡重)의 검식을 펼치면 검막을 두른 듯 주위에 진공이 걸리고 적도들의 공세가 느려졌다.
'우우우웅'
육중하고 장엄한 검음(劍音)속에서 검 앞에 놓여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허무하니 스러져 갔다.
암기가 빨리우듯 당겨지며 속도를 잃어 땅에 떨구어지고 두툼하고 묵직한 환도(環刀)가 얇은 목판처럼 잘려져 나갔다.
빛살같은 암기와 현철이 섞여 들어갔다는 병장기 그리고 현란하고 날카로운 초식도 무진중의 검식 앞에서는 무용지물 이었다.
마치 불문의 사대천왕이 헌신한 듯 보였다.
만마를 제압하는 제석천의 신위처럼 사부의 검식 아래 사파의 거두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가고 있었다.
법왕은 보무당과 가까운 곳에서 괴인과 두명의 적포인을 맞아 경천동지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발밑에 적포인 시체가 한구 있었는데 법왕에게 당한 것 같았다.
단 혼자서 청령전을 초토화 시키고 삼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괴인이었지만 포달랍궁의 무신(武神)인 법왕에게는 역부족인가 보았다.
두명의 적포인이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무한 증식하듯 또다시 허공을 가득 메워져 오는 금빛 장영(掌影).....
포달랍궁의 최고 무공인 보리패엽장중 패엽만장의 초식이 펼쳐지자 적의 모습조차 금빛 장영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혈살기를 극한으로 내뿜어 금빛 장영과 마주쳐 가자 허공이 굉음으로 가득하였다.
그 굉음속에 희미하니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자신을 도와주던 수호단 고수의 비명소리 같았다.
혈룡처럼 붉은 강기로 몸을 감싼채 장영을 뚫고 혈광을 비산하였지만 금빛 장영이 걷힌 곳에 마땅히 있어야할 적이 보이지 않았다.
성급히 뒤돌아봄은 하수들이나 범하는 실수일터.....
속도를 배가하여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 후에 몸을 틀었다.
그러나.....
'꽈과꽝!'
가슴을 내려치는 거대한 불장에 연타를 당하자 정신이 순간적으로 몽롱해져 왔다.
포달랍궁의 절세신법인 무량신보(無量神步)로 괴인의 이목을 속이고 패엽건곤(貝葉乾坤)의 초식을 성공시킨 법왕이 호기를 맞아 전력으로 몰아쳐 갔다.
적의 호신강기가 흐트러지고 막대한 타격을 입혔음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릴수 있었던 것이다.
'퍼벅, 퍼버벅.꽝!'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연이은 공격을 하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호신강기를 펼쳐내던 괴인에게서 파탄이 드러나 보였다.
'콰광....퍼석'
제정신이 아닌 듯 본능에만 의존하는 적의 심장 어림에 패엽건곤이 또다시 작렬하고 움츠려든 적의 두부(頭部)를 공격하여 호박처럼 터트려버린 이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대단한 적수였던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무량신보의 신법으로 괴인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반 호흡도 되지 않는 짧은 동안이었다.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괴인이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감이 믿기지 않는 듯 마지막 남은 적포인이 허공중에서 머뭇거리다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헉!"
"이런....."
'쉬이이이익'
다섯명의 괴인들중 은성과 법왕에게 죽은 두명을 제외한 남은 세명의 괴인들은 아직도 팽팽한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삼매진인과 모용천을 상대하는 괴인은 우세한 형세였으며 범각대사와 결전을 벌이는 괴인은 막상막하의 치열한 형국이었다.
무상은 무형검을 사용하여 괴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무상과 대결하는 괴인은 특히나 신법이 뛰어났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용천의 유심초(有心草)와 삼매진인의 자하선기(紫霞仙氣)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주변의 무림맹 군웅들을 살상하는 괴인을 처치하려던 은성은 돌연한 변고에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검은 묵운을 상대하여 옥령신수로 가까스로 방어하던 백록곡의 두 기인중 과묵했던 흑수선이 짧은 비명과 함께 꼬꾸라진 것이다.
흑수선이 쓰러지자 옥령신수의 방어막이 삽시간에 뚫려져 버렸다.
물을 만난 물고기인양 묵운이 크게 일렁이며 사납게 쏘아져 가는 곳은 무림맹의 군웅들이 유독 많이 몰려있는 장소였다.
흑수선을 죽인 은밀한 그림자도 묵운 못지않게 위험스런 존재였다.
[선사님! 현천교주의 호위대가 잠입해온 것 같으니 그들을 먼저 상대해 주시지요!]
급하게 전음을 날린 은성이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묵운 앞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현천교 호위대의 무위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총인원 55명으로 곤륜지로(崑崙之路)에서 은성에게 죽은 십절기가 가장 약하다는 평이었다.
십절기 다음으로는 구절기, 팔절기, 칠절기 순이었는데 사절기 이후로는 신비로 점철되어 있었다.
강할것이라는 추측뿐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현천교의 호위대가 출현한 직후부터 팽팽하던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묵운조차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로 돌변해 버렸다.
달뢰대라마가 현천교의 호위대를 찾아 허공중에서 신형을 돌릴때 은성은 화룡검으로 천일일(天一一)의 수법을 펼치며 묵운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사지공의 이절인 천일일은 은성이 가진 최강의 방어수법 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수직으로 치켜든 화룡검에서 검기가 솟구쳐 나와 거대한 검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형검을 익힌후 천일일의 수법은 조사께서 창안한 검막 그 이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원하는 부위로 진기를 집중하는, 가진 내공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검막을 펼칠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화룡검 속에는 화룡의 내단마져 봉인되어 있었다.
태극진기를 진화기로 변화시켜 화룡의 내단과 기성(氣性)을 일치시키자 화룡검에서 거대한 화기가 흘러나와 진화기에 담겨져 검막으로 흘러들었다.
은성으로서는 가진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묵운을 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묵운에서 뻗어 나오는 역량은 은성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막강하였다.
은성의 몸이 검막과 함께 주르륵 밀려났다.
은성을 상대하면서도 여유가 있는지 묵운이 불꽃처럼 넘실대며 주변으로 뻗쳐 나갔다.
묵운에 스치기만 했는데도 무림맹 무인 한명이 처참한 비명으로 녹아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묵운은 더욱더 강성해지고 있었다.
기세를 타고 검막을 기어올라 하늘을 덮자 은성은 시야조차 가려져 버렸다.
지금이라도 검막을 축소하여 묵운을 탈출할수 있었지만 모처럼의 방어막이 무너지면 홍수에 제방이 무너지는 기세로 일시에 쏠려나가 사방을 휩쓸 수도 있었다.
화룡의 내단에서 뻗혀져 나오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화기에 주변이 화탕지옥처럼 끓어올랐지만 묵운은 전혀 피해가 없는 듯 오히려 처음보다도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검막이 흔들리고 은성도 한계점에 이르러 갔다.
일방적으로 밀리는데도 불구하고 은성이 최대한으로 시간을 벌어 묵운을 막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달뢰대라마가 현천교의 호위대만 상대해준다면 전세가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괴인이 두명이나 죽고 수호단인 적포인들도 절반가량 줄어 있었으니 해볼만한 결전인 것이다.
운이 좋아 구룡이 적의 술사들의 은신처를 찾고 술법을 방해한다면 일시에 유리함을 되찾을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희망사항일 것이었다.
적의 술사들이 쉽사리 은신처를 드러내 보일리도 없지만 그들 주위에는 당연히 술사들을 보호할만한 조치가 취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왕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 현천교주의 호위대를 다 맡아 처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호위대의 무공이 쉽게 상대할수 없을 정도로 고강할뿐더러 아홉 무리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중단전의 내단에서 흘러나오는 태극진기마저 극한으로 끌어내 묵운을 상대하던 은성은 문득 신체중의 한 지점에서 남다른 감각을 느낄수가 있었다.
폐쇄된 상단전 부근이었다.
미간의 상단전 부근이 공명이 일 듯 떨려왔다.
'그그그그그긍'
떨림은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혹시, 상단전이 뚫리려는 징조일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인상은 구겨지고 있었지만 눈빛은 실날같은 한줄기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그런데.....
'우우우웅우우으...'
상단전의 공명이 잦아들고 완전히 멈추어졌지만 여전히 심기는 발휘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신비한 작용이 상단전에서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심기가 발휘되지 못하니 허탈한 순간이었다.
"윽!"
이어지던 진기가 잠시 흔들리자 입가에 가는 핏줄기까지 흘러 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막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순간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감당키 힘든 엄청난 기세로 검막을 압박해오던 묵운의 기세가 갑자기 한풀 꺾여져 버린 것이다.
구룡이 해냈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하늘까지 완전히 덮었던 묵운이 서서히 걷혀지자 은성의 눈앞에 드러난 이는 뜻밖에도 곤륜파의 반선(半仙)인 적하진인(積霞眞人)이었다.
적하진인의 몸에서는 아무런 진기가 흘러나가지 않았으나 은성은 적하진인이 심기를 발하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적하진인의 심기와 은성의 거대무비한 진기가 합해져서야 묵운을 꼼짝달짝 못하도록 묶어 둘 수가 있었다.
적하진인의 심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시험 삼아 은성이 화룡검의 화기를 감소시키자 묵운이 꿈틀대며 넘실거리기 시작하였다.
어쩔수 없이 진화기를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몸을 빼낼수는 없었지만 여유를 찾게 된 은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 삼십여장이 초토화로 변해져 있었다.
나무와 풀은 물론이고 바위조차 녹아 내리는 생지옥이 펼쳐졌었던 것 같았다.
적하진인이 때 맞춰 도착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은성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은성과 적하진인에게 제압된 묵운은 자꾸만 움츠려 들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위력을 가진 묵운을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무림맹으로서는 엄청난 전력손실이었다.
은성과 적하진인만 전장에 투입되어도 사태는 쉽사리 해결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인들과 호위대만 없애 준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묵운을 막아주어야만 하였다.
'스스스스슷'
은성과 적하진인의 사이로 바람처럼 나타난 이는 선풍도골의 도인이었다.
무당파의 기인으로 무공은 물론 술법으로 하늘의 천신조차 청해 부릴수 있다는 삼천진인(三天眞人)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뒤쪽으로 혈수선이 따르고 있었으며 옆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섬찟한 기운 하나가 위치하고 있었다.
사악하지는 않지만 요사스러운 요기가 물씬 물씬 풍겨져 나와 모골이 송연(悚然)할 지경이었다.
주문인 듯 무어라 중얼거린 삼천진인이 뒤쪽의 혈수선에게 눈짓을 하자 혈수선의 표주박에서 옥령신수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와 요사스러운 기운을 덮어갔다.
옥령신수가 내려 앉는 것을 보니 거대한 짐승 모양의 신수(神獸)임을 알수 있었지만 정체는 알수가 없었다.
옥령신수를 덮어 씌운후 술법으로 목구멍 안쪽으로도 쏟아 부은 삼천진인이 눈앞의 묵운을 보고 발광하듯 미쳐 날뛰는 신수를 묶어둔 신마삭(神魔索)을 풀어 주었다.
"크아아아앙."
직후 귀청을 찢는 듯한 괴악한 소리와 함께 신수가 묵운을 향해 섬광처럼 달려들었다.
해동신룡이라 불리는 소년이 눈치 빠르게 신수가 부딪혀간 곳의 검막을 열어 제친 것 같았다.
"우르르릉, 콰광, 쩌르릉."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검막이 사납게 흔들렸다.
묵운은 신수의 몸뚱아리를 조이고 패대기치며 격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기껏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묵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신수의 몸통이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휩쓸리고 늘어나며 압박되어지면서도 끊임없이 묵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묵운을 흡수하자 신수의 형체가 대충은 드러나 보였다.
투명한 몸체라 전부다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묵운이 흡수되어지는 목구멍과 엄청나게 불어난 몸통은 안쪽에 쌓여지는 묵운이 많아질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신수의 머리 형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평범하게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용의 비닐같이 단단한 각질로 감싸진 배와 등 뒤쪽으로 보이는 첨각(尖角)만으로도 충분히 상상할수 있을 것 같았다.
묵운을 흡수하자 동작이 둔해졌지만 흡입력은 오히려 강해지는 모양이었다.
검막속의 묵운들을 사냥하듯 쫒아 일점 남김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만족한 듯 입을 벌려 '꺼윽' 트림을 내뱉더니 엎드려 포만감을 만끽하였다.
이장여 크기가 어느새 칠장여 크기로 불어난 신수(神獸)를 삼천진인이 불안한 듯 지켜보았다.
배속으로 들어가서 응축되듯 줄어든 묵운들이 신수의 배가죽을 울록불룩 들썩이며 요악스럽게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가의 전설적인 신선인 화령요선(火靈妖仙)의 수호지수인 신수였지만 워낙에 극악한 묵운인지라 안심할수만은 없었다.
엎드려 있던 신수가 몸을 움찔움찔 떠는 것이 감당하기에 벅찬듯해 보였다.
잘못하여 토해내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근 반시진을 소요하여 간신히 불러들였는데.....
삼천진인이 신수를 향해 무엇이라 중얼거리자 신수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신수 주변에 두터이 펼쳐져 있던 검막은 어느새 걷혀져 있었다.
'스스스르릇'
산천진인의 명에 따라 신수가 사라져 가는 소리였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사라져 가는 속도 또한 명불허전이었다.
요사스러운 바람조차 뒤를 쫒을수 없었던지 뒤쳐져 회오리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대협, 나를 따르게!"
곤륜파 적하진인의 목소리였다.
굳이 몰려다니며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의아해 하였지만 일단 적하진인을 따라 몸을 날리었다.
그런데 허공중으로 몸을 날린 적하진인이 청령전을 벗어나 날아가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의문은 금새 풀려졌다.
적하진인이 향하는 자소전 방향으로 저멀리 날아가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곱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놀랄만한 신법이었다.
괴인 못지 않은....아니, 괴인보다도 더한 존재들인 것 같았다.
어쩐지 현천교주가 보이지 않더라니.....
곤륜파에 고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의 무위를 가진 고수라면 서너명으로도 곤륜파를 초토화 시킬수 있을 것 같았다.
적하진인을 뒤따르던 은성이 태극진기를 배가하자 간신히 적하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검선처럼 하늘을 날던 은성은 또다시 상단전에 청정한 기운이 움직여지는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즉시 심기를 운용해보니 미세한 기운이지만 심기가 발휘되어졌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 정도의 심기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을 날아서인지 곤륜구봉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눈앞의 현천교주 일당과 심기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지만 자소전이 있다는 곤륜산 아홉 번째 봉우리는 한눈에 보아도 영험스러운 선기(仙氣)가 깊이 베어져 풍겨 나오고 있었다.
천험의 절벽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가운데 천상의 옥로(玉路)인양 한줄기 목교가 아스라이 허공중에 걸려져 있었으며 곤륜파의 본전인 자소전(紫小殿)은 운무에 반쯤 잠겨 옥황상제가 거하는 천상의 자미궁(紫微宮)을 하계에 옮겨 놓은 듯 했다.
현천교주 일행이 내려선 곳은 자소전 앞쪽에 위치한 광장이었다.
솜털처럼 고요히 내려서는 그들의 정면으로 곤륜파의 장문인과 장로등 최고 무인들이 지기를 잔뜩 돋운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앞쪽에 위치한 사람은 차림새로 보아 적하진인과 동문의 반선인 것 같았다.
당연히 그곳에 내려서서 현천교주 일당을 상대할줄 알았는데 내려설 듯 고도를 낮추던 적하진인이 다시금 비상하며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방향조차 달랐다.
자소전이 있는 곤륜구봉을 벗어나 온통 안개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요?"
이해할수 없던 은성이 전음을 보냈다.
"방금 자소전에 계시던 사형과 얘기를 나눴는데 아무래도 대사형이 계신 천망애에 변고가 발생된 것 같다고 하셨네. 내려오실 때가 훨씬 지났는데..... 나 역시도 예감이 좋지 않다네."
말을 하면서도 내심 불안하였는지 적하진인은 계속해서 속도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은성이 태극진기를 최대한 동원하여 간신히 따라붙을 정도였다.
천망애는 사시사철 운무에 가려져 있으며 인간이 접근할수 없는 선부(仙府)였다.
운무를 지나 수직으로 오백여장이나 치솟아 오르자 운무속에 둘러싸인 선경이 두눈에 들어왔다.
해동 미륵산의 자운곡처럼 특이한 지형이었다.
기암괴석(奇巖怪石)에 이화신초(異花神草)가 널려 있었으며 푸른 소나무 사이로는 청학들이 어우러져 유유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현천교가 찾는 지상천국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천망애 아래쪽으로 펼쳐진 천장 낭떠러지에는 안개 구름이 넘실거리며 가끔씩 하늘위에서 쏟아지는 양광을 받아 오색(五色)으로 반짝거렸다.
천망애 위쪽으로 높이 솟아 올랐다가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서는 적하진인의 표정이 많이 환해져 있었다.
언제나 처럼 평화와 고요속에 잠긴 천망애를 보니 날아오면서 가졌던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착지한후 선도를 수련하던 천중동(天中洞) 방향으로 두어 걸음 옮겼을까 ....?
적하진인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져가기 시작하였다.
반갑다고 날개짓하며 우아한 자태로 재롱을 부리던 청학들이 조용히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사형은 존재 자체로 주위에 온화한 화기(和氣)를 풍겨주었는데 대사형이 머무르는 천중동에서 미세한 기운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망애 전체가 원인모를 긴장감에 잠겨져 있었다. 왠지 낮선 곳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은성과 함께 천중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적하진인은 몇 번이나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었다.
"허허! 무엇을 찾으시는 것이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적하진인의 발걸음이 멈칫거려졌다.
놀란 것은 적하진인 뿐만이 아니었다. 적하진인과 보조를 맞추어 걷던 은성도 크게 놀란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삼장여 앞쪽 유난히 흰 바위위에 걸터앉은 백의의 중년인 때문이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몸 전체 를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아무리 심안을 잃었다 해도 그렇지.....
중년인은 설백의 우의(羽衣)였지만 칠흑처럼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중년인을 주시하던 은성이 또다시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나타난 중년인의 존재에 육체적 감각으로 놀랐지만 이번에는 마음속 깊이 감탄하는 정신적인 놀라움 이었다.
중년인은 주변자연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그 존재 자체가 돋보이지 않는 완전 한 천지도태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자연과 동화됨을 넘어 자연속에 녹아든 것 같이 보였다.
"당신은 누구요?"
적하진인이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존재에 다그쳐 묻고 싶은 것이 수십여가지 는 될 터인데도 목소리로 보아 벌써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 같았다.
"경치가 매우 좋구려. 세외선경(世外仙境)이라더니 과연이오!"
중년인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위에서 내려오며 던진 말이었다. 뒷짐을 지는가 싶더니 은성과 적하진인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경신법을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기를 이용해 어풍비행으로 날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중년인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구름인양 그리고 바람인양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이 미 서로간의 거리는 큰 의미가 없는 선인지경에 가까운 존재들인지라 멀어졌다고 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