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37화 (137/152)
  • [연재]황정허무검(137)

    임원영   2004-06-29 22:19:24, 조회 : 742, 추천 : 8

    수뇌부들중 제일 앞서서 달려오는 사람은 검후와 법왕이었다.

    하지만 꿋꿋한 자세로 의연히 서 있는 은성을 바라본 법왕이 속도를 조금 늦춰서인지 검후가 먼저 당도하였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은성의 안부를 묻은 검후의 안색은 핏기조차 가셔져 있었다.

    "괜찮아. 살수가 침입했었는데 다행히 물리쳤어."

    "예!"

    경악에 찬 비명이었다.

    오늘은 평소에 비해 몇 배나 중하게 경비를 세웠는데 살수가 침입했다니.....

    그리고 중상을 입은 몸으로 살수를 물리쳤다니.....

    놀람의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검후 뿐만이 아니었다.

    은성이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무림맹 수뇌들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첩첩이 둘러싼 고수들의 이목을 속이고 침입한 살수를 중상을 입은 상태로 물리쳤다니 경외심이 서린 눈으로 은성을 쳐다볼 뿐이었다.

    "스승님! 보통 살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달뢰대라마가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진득하니 혈향(血香)은 남아 있건만 시체는 찾을 수가 없을뿐더러 부서지고 흩뿌려진 건물 잔해를 보니 격전 당시의 치열함을 충분히 예상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달뢰대라마가 은성에게 말하는 소리를 듣던 군웅들의 눈이 소리없이 커져가기 시작하였다.

    귀조차 쫑긋하며 혹시 잘못 듣지는 않았는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스..스승이라니!'

    중원의 세력조차 넘볼 정도인 천축 포달랍궁의 신격화된 존재인 법왕께서 일개 소년에게 스승이라는 호칭을 붙이다니.....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런데.....

    "천지도태(天地道胎)의 경지에 이른 살수였습니다."

    "아미타불! 대단한 경지로군요. 하지만 스승님을 목표로 했다니 천운이 다한 살수인가 봅니다."

    대화를 들어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분명해 보였다.

    군웅들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준 것은 또 다른 인물이 도착해서였다.

    '휘이익..'

    다급하니 신법을 발휘하여 장내에 도착한 탐스러운 백염을 기른 보무당의 고수였다.

    그가 도착하자 은성과 검후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은성아!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걱정스런 안색으로 은성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인 이는 다름 아닌 은성의 사부 자운검(紫雲劍) 이었다.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사부님!"

    은성이 갑작스레 나타난 사부를 보고 달뢰대라마를 소개해 주려고 눈을 돌리는데 눈치 빠른 법왕은 벌써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태사부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눈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국의 노스님이 더할수 없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합장지례를 하니 자운검이 곤혹스런 눈빛으로 얼떨결에 마주 예의를 표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랴부랴 첫인사를 마친 자운검의 눈은 어느새 은성의 두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진즉에 말씀 들일 것을.....

    은성이 조금은 무안한 듯한 목소리로 사부에게 즉시 해명을 하였다.

    "사부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자가 중원에 와서 제자로 삼은 천축 포달랍궁의 법왕인 패륵선사 입니다."

    "....."

    자운검의 놀람은 보통이 아니었다.

    천축의 법왕이라니.....

    눈앞에 선 인물이 천축의 전설적인 고수인 법왕이라니 믿기지가 않았지만.. 제자의 표정을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 내가 법왕의 태사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법왕을 바라보니 법왕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태사부님! 앞으로 많은 가르침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태사부라 호칭하는 것을 보니 꿈은 아닌 것이다.

    "허허! 아닙니다. 어쨌든 법왕께서 은성을 사부로 모시기로 하셨다니 은성에게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제자는 도행이 부족하고 수행이 얕아 스승님께 깊은 가르침을 수차례 받은바 있습니다. 앞으로도 스승님께 많이 의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예....."

    당대의 기인이자 전설인 법왕을 제자로 삼았다니 동방파의 위상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는 순간이었다.

    법왕이 자신을 태사부라 칭하였다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사부님, 사숙님은 어디 계신지요?"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군웅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은성은 너무나 태연하였다.

    마치 법왕을 제자로 삼은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곽 경비에 나가셨다."

    "예... 선사님! 사숙님은 다음에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도록 하십시오."

    은성에게 공손히 답하던 법왕이 무너진 잔해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에 이채를 발했다.

    잔해속에서 도광(刀光)이 흘러 나왔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푸스스..피릿.'

    허공섭물 신공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날카로운 도광이 섬광인양 빛을 발하더니 어느새 법왕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대단한 수법이었다.

    수뇌부들이 모두 몰려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서너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미타불! 보도가 분명한데 아쉽게도 사기(死氣)가 너무 짙습니다. 인세(人世)에 필요없는 마물인 것 같습니다."

    안타깝다는 듯이 백련곡 제일 살수인 무혼화가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던 혈루도(血淚刀)를 바라보던 법왕이 다른 손을 들어 혈루도의 도첨(刀尖)을 손가락 끝에 잡고 살짝 비벼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흘러나오는 도기로 보아 보도가 분명한데 법왕의 손끝이 스치는 순간 가루로 화해 짧아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숨을 몇 차례 몰아쉬었을 뿐인데 살수계의 보물인 혈루도는 자루만이 남아 있었다.

    '떵그렁.'

    손잡이만 남은 혈루도가 바닥에 떨어지면 나는 소리였다.

    실로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은성이 법왕의 사부라는 말로 넋을 빼 놓더니 이제는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고절한 무위로서 혼조차 빼 놓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 몰려든 군웅들의 대다수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경각심을 준 사람은 문상이었다.

    수뇌부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해산시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수뇌부 모임에 참석했던 몇 명의 수무당 노고수들에게는 특별한 지시를 하였는지 일제히 청령전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곤륜 본전인 자소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문상은 은성에게도 할말이 있는 것 같았다.

    고요한 신색으로 다가와 차분히 말을 하였는데 은성이 법왕의 스승이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이대협! 천인길상(天人吉祥)이라고 흉겁을 잘 넘기셨다 하니 다행스런 일입니다. 법왕께서 중원 무림과 친분을 맺고자 하신 이면에 이대협께서 계신줄은 몰랐습니다. 여러모로 중원무림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겸손하면서도 의연한 목소리는 역시나 문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선사께서는 도량이 넓으신 분입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 중원과 천축의 중생들을 위한 거국적인 견지에서 화친을 도모하셨을 것입니다. 전쟁이 나고 싸움이 길어지면 가장 피해가 심한 것은 불쌍한 중생들임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아미타불!"

    은성의 설명에 달뢰대라마가 불호를 터트렸다.

    은성의 의견이 모두 맞는지, 아니면 일부만 맞는지 추측기 힘든 뜻 모를 불호였다.

    "이대협, 실은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중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괴인들에게 당하신 것인지요? 그리고....결계는? "

    현재 현천교에서 꾀하고 있는 음모중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최대 문제는 당연 결계였다.

    은성의 말대로 현천교의 술사들이 법술로 곤륜산의 화맥을 터트린다면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볼수는 없었지만 은성이 중상을 입은 이유를 대충은 짐작할수 있는 문상이었다.

    다만 그 결과가 알수 없었을 뿐이었다.

    "안심하십시오. 괴인들에게 협공당해 내상은 입었지만 다행히 결계를 부수고 술법을 와해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은성의 대답을 듣던 문상의 안색이 눈에 띠게 환해졌다.

    결계를 감안한 최후의 작전도 수립해 놓았지만 최악의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승산은 커녕 몇사람을 생존시킬수 있는지가 최대 관건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결계가 붕괴되어졌다면 얘기가 다른 것이다.

    이길수도 있음은 물론이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수비에 치중할수 있다는 장점만 잘 활용하면 무림맹의 피해도 최소화 시킬수가 있기 때문이다.

    적의 전력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아서 완벽한 작전수립 및 상황 파악은 시기 상조였지만 말이다.

    "괴인들은 몇 명이나 있었는지요?"

    은성이 괴인들에게서 협공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결계를 제한다면

    현천교의 드러난 존재중에 가장 강한 자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청령전에 쳐들어 왔던 괴인들이었다.

    현천교에 괴인보다 더한 존재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현천교에는 최소한 다섯명의 괴인이 있습니다. 일곱명에서 두명이 죽었는데 남은 다섯명이 전부인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수치였다.

    괴인들의 숫자에 따라서 전략과 전술이 바뀔수도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음..... 이대협의 은혜가 막중할 뿐입니다."

    또다시 은성의 공을 치하하는 문상이었다.

    결계를 부수고 괴인들의 숫자를 파악하고 더군다나 괴인들을 두명이나 죽였다니 그 누구도 할수 없을 공적인 것이다.

    그 누구도 말이다.

    "헤헤헤, 문상 우리 이대협의 무위가 이처럼 신묘하고 포달랍궁의 법왕과 소림의 범각대사마저 가세하였으니 이제는 우리측 전력이 우세한 것  아니오? 게다가 곤륜산에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신 분이 세분이나 있고 말이오."

    개방 방주 만취개가 탐스러운 머릿결 몇 가닥으로 코를 문대며 하는 말이었다.

    주독을 치료하고 빠진 머리가 다시 난 이래로 새로운 버릇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방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측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지만 아직은 장담하기 힘든 국면입니다. 아직까지 전면에 한번도 나서지 않았던 현천교주가 이번에는 분명코 모습을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천교주가 온다면 현천교의 숨겨진 전력까지 모두 동원하여 데려올 것인데 그 전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내용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잠시 한 호흡을 쉬어 주변에 긴장감을 고조시킨후 문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장담할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쉬울 결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무림맹과 대적하여 승산이 없었다면 곤륜을 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 법이지요."

    한시도 긴장을 늦출수 없다는 말이었다.

    은성도 현천교의 전력이 결코 무시할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때 맞춰 결계를 파괴하지 않았더라면 결계속 술사들의 능력만으로도 곤륜산을 화탕지옥으로 만들뻔 하였기 때문이다.

    유령왕의 희생으로 운좋게 결계를 파괴하였지만 그들의 숨은 저력이 그것 뿐만은 아닐 것 같았다.

    "이대협! 청령전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이라는 판단이 들면 자소전으로 후퇴하게 될 것입니다. 중간에 전략적 요충지가 몇 군데 있어 제이 제삼의 방어막이 형성되어져 있으나 최후의 결전은 자소전 입니다. 자소전은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치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한 듯 문상의 말에는 신뢰성이 깊이 담겨져 있었다.

    은성이 긴급모임에 참석치 않았음을 상기하여 간단히 작전계획을 설명한 문상이 이번에는 주변의 수뇌부들에게 각기 지시를 내렸다.

    문상의 목소리는 차분하였지만 장내의 분위기로 보아 결전의 순간이 눈앞에 닥쳐든 것 같았다.

    수뇌부들 모두가 단단히 각오를 다진듯한 표정으로 문상의 지시를 따라 각개의 장소로 이동하였다.

    검후조차도 문상의 의견에 따라 보타문의 문도들에게로 달려갔다.

    은성과 법왕은 보무당을 도와 좌측 최전방을 방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은성은 촌각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무공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선사님! 실은 긴요한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선사님께서 사부님을 보좌해 주실수 있는지요. 결전이 벌어지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살아온 연륜으로 은성의 본의를 짐작 못할 달뢰대라마도 아니었다.

    "걱정말고 다녀오십시오! 태사부님 같이 가시지요!"

    사부인 자운검과 달뢰대라마는 물론이고 주변의 초극 고수들에게 예를 갖춘 은성이 꺼지듯 스러지며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일순간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무상과 풍령자는 물론이고 문상까지도 깜짝 놀랄만한 신법이었다.

    은성의 내공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 달뢰대라마가 자신의 짐작이 잘못 되었나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샤르르르릇'

    허공을 날며 청령전 상부 숲속을 샅샅이 살피던  은성이 소리없이 내려서고 있었다.

    청령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적과의 격전이 벌어지면 바로 알아 차릴수 있으며 조용하고 지기(地氣)조차 안정된 장소였다.

    이곳에서 현천교가 쳐들어오기 전까지 태극진기를 십성 회복하고 잃었던 심기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팔성수준의 태극진기로도 무형검을 펼치는데 문제는 없지만 형체가 눈에 보이니 효과가 감소되어 질것이다.

    그리고 태극진기와 심기의 위력은 몇배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같은 무형검이라도 천양지차일 것이었다.

    심기를 되찾아 눈에 보이지 않는 최강의 무형검을 펼치고 심안이 회복되어 야만 적의 수괴들과 대적할수 있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정좌하여 눈을 감은 은성은 잠시지간에 적멸지경에 들수가 있었다.

    무상의 경지에 들어선후 의식을 안으로 거둬 상단전 부근을 존념하였다.

    밝고 영묘로운 기운이 가득하여 한 없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던 상단전 부근에 무거운 돌이라도 들었는지 둔중하고 답답함만이 느껴져 왔다.

    폐쇄된 상단전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부터 알아내야만 하였다.

    심안이 운용되면 간단하겠지만 상단전이 막히자 심안을 운용할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편으로 다가왔다.

    짐작일 뿐이지만 상단전과 뇌를 연결해주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상단전의 심기와 심안은 뇌에서 지시하는 직접적인 명령으로 발동되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뇌와 상단전을 연결해주는 부위를 찾을수가 없었다.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상단전과 뇌의 연결 부위를 면밀히 찾아 보았지만 의심가는 곳은 없었다.

    혈관이나 경맥처럼 어떠한 경로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인 뇌파로 심기가 작동하였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심기를 발휘할 때처럼 뇌파를 발해 보았지만 둔탁한 느낌뿐이고 말이다.

    태극진기로는 희망이 없었다.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심기가 축적되어 상단전이 개발된 근본적 원인부터 고찰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천부경 때문이었다.

    심기는 운기조식 방법이 아닌 정신수양과 깨달음에 의해서만 축적시킬수가 있는 천지자연의 순수한 정화로 이루어진 정신 무공이었다.

    어느 정도 축적되면 심기가 머물수 있는 상단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지고 말이다.

    은성의 심기가 급속도로 강해진 것은 천부경에 대한 명상속에서 깨달음의 깊이가 계속해서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깊이가 심오해지고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강해져 가는 심기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기존보다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구해야만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깨달음은 생각처럼 쉽게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각성의 도가 상승에 이른 상태인지라 다음 단계의 깨달음은 더욱더 지고 무상한 경지여야 하고 말이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천부경을 조용히 되뇌어 본후 처음부터 한자 한자 떠올려 보았다.

    "....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  대삼합(大三合) 육생칠팔구(六生七八九)."

    아! 역시나 그 부분이었다.

    '대삼합 육생칠팔구'라는 구절에서 콱하니 막히어져 버렸다.

    대삼합(大三合) 이라니?

    무언가 심오한 그 무엇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잡힐 듯 잡힐 듯 신묘한 영감이 계속해서 뇌리속에 멤돌았지만 허상처럼 잡을만하면 스러져 갔다.

    '.....'

    안타까이 시간만 흘러갔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현천교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으니 별무소용 이었다.

    폐쇄된 상단전의 심기를 일깨워볼 욕심에 이리저리 끼어 맞춰 보았지만 조급해서인지 머리만 뒤죽박죽으로 얽혀들 뿐이었다.

    하긴,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숱한 세월동안 선정에 잠겨 연구해 보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 쉽사리 풀려질리는 없을 터이었다.

    "휴우!"

    길고 긴 숨을 시원스럽게 내쉬었다.

    그런데 진기를 살펴본 은성이 놀랍다는 표정을 보였다.

    천부경을 참오하는 동안 어느새 태극진기가 십성으로 회복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단전도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둔중하고 답답한 느낌은 사라지고 조금이나마 청량한 느낌조차 들어왔다.

    효과가 있었다는 말인가?

    내심 기쁨에 잠겨 또다시 명상에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아쉽게도 운명은 또 다른 바퀴를 굴리도록 재촉하여 왔다.

    멀리서 격렬히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드디어 현천교가 쳐들어 온 것 같았다.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심기를 회복시킬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은성의 몸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시도 머무를수 없는 대 결전의 서막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허공중에 잠시 몸을 고정시켜 형세 판단을 하던 은성은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수 있었다.

    현천교의 네 괴인은 각자가 상대를 정해 싸우고 있었다.

    달뢰대라마와 무상 그리고 범각대사가 한명씩 맡았으며 화산파의 삼매진인과 모용가주가 힘을 합쳐 한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은 한명의 괴인이 문제였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무자비한 살수를 퍼붓고 있었지만 마땅히 상대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괴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적포를 걸친 일백여 적포인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중 몇 명은 괴인들의 무공에 버금갈 정도였다.

    무상과 법왕에게는 괴인들 말고도 이들 적포인들이 한두명씩 붙어 협공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이 긴박함을 느낀 은성이 화룡검을 앞세우고 묵귀영의 신법을 발휘하였다.

    무림맹측의 총인원은 곤륜파 200여 제자를 포함하여 이천여명 이었다.

    하지만 현천교의 무리들은 칠천여명이나 되었다.

    물론 이들중 호교무인 4000여명과 사파에서 참가한 1500여명은 무공이 다소 떨어졌지만 현세화단의 고수 850여명은 무림맹 고수들과 수준이 비슷한 정도였다.

    무공이 현세화단의 고수들에 비해 몇배나 강한 적포인들만 없다면 해볼만 하겠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절세고수들의 숫자에서도 무림맹측이 밀리고 있는 것이다.

    종횡무진으로 설쳐대는 괴인에게 다가서던 은성은 눈앞으로 한명의 적포인이 다가서자 허공중에서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전환하였다.

    순식간에 은성의 종적을 놓쳐버린 적포인이 은성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은성은 어느새 그를 지나쳐 괴인의 뒤를 쫒고 있었다.

    '푸하학..'

    은성이 지나간 뒤쪽으로 갑자기 핏방울이 솟구쳐 나오더니 시체 한구가  떨어져 내려갔다.

    재수는 없었지만 부질없는 죽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은성이 뒤 쫒던 괴인이 은성의 존재를 눈치챌수 있었으니 말이다.

    몸을 날려 적포인들 사이로 뛰어들더니 어느새 적포인들을 이끌고 허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괴인과 같이 날아오른 적포인들은 다섯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대단한 무위를 가진 자들이었다.

    괴인처럼 자유자재롭지는 않았지만 허공중에서 몸을 날리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적포인들중에서도 특출난 자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은성의 묵귀영 신법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괴인을 포함하여 여섯명이나 협공하였지만 일각도 안되어 세명의 적포인이 명을 달리한채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또다른 적포인 다섯명이 연이어 올라오지 않았다면 세명으로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태극진기를 익힌 은성조차도 섬찟해할 정도의 무위를 가진 괴인만 없었다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고 말이다.

    적포인들이 허공을 천라지망으로 장악하며 은성을 압박하고 있었지만 은성의 놀랄만한 무공은 천라지망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앞을 파고드는 장환 십여개가 매미의 날개인양 바르르 떠는 화룡검에 튕겨져 사방으로 비산되어 날아갔다.

    그속에는 화룡검속에서 뿜어져 나온 검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직후 장환과 검환 사이로 그림자처럼 몸을 숨겨 자리를 이동하는 은성의 귀로 한줄기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이형환위를 펼친 은성이 더 높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은성이 머물던 자리는 괴인과 여섯명 적포인들의 공세가 몰려 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허공중에서 방향을 틀 어 머리를 땅쪽으로 향한채 보리패엽장중 패엽만장의 초식을 발휘하자 또 한명의 적포인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은성은 기쁜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눈빛에 초조감이 더해져 있었다. 허공에서 아래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심상치 않은 광경을 본 것이다.

    현천교 방향에서 뭉게 뭉게 피어올라 쏜살같이 접근해오는 검은 묵운.....

    대지에 바짝 붙어 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검은 묵운이 지나온 자리는 지독한 폐허로 향해 있었다. 나무도 녹 고 돌도 녹고 심지어는 바위조차도 녹아들고 있었다. 현천교 쪽에서 또다시 술사들을 동원하여 악랄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급한 마음이 들자 은성의 공격은 한층 더 치열하여졌다. 이기어검의 술법으로 날아간 화룡검에서 오장이 넘 은 붉은 검강이 치솟아 올라 적포인들 사이를 유린하고 화급히 피하는 괴인에게 공간을 단축하듯 파고들어 포 달랍궁 최고 비전인 패엽건곤의 초식을 퍼부었다.

    간신히 몸을 피한 괴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은성의 손에는 백광이 일렁이는 광채가 어려 있었다.

    빛조차 가를 정도로 빠르게 다가간 광채는 어느새 괴인의 목을 가르고 있었다.

    "크윽, 콰광. 음....."

    무형검을 운용하여 괴인의 목을 따느라 등뒤를 적포인의 장세에 허용한 은성이 이장여나 밀려나서 밑으로 쭉 꺼져 들어갔다. 은성의 뒤를 따르던 적포인이 당황하는 찰나 적포인의 가슴속을 파고 나오는 이물질이 있었다.

    두명의 적포인을 참살하고 회귀하던 화룡검이었다.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적포인을 뒤로 하고 화룡검을 받아든 은성이 쏜살같이 신 형을 날렸다. 검은 묵운을 향해서였다. 묵운은 어느새 청령전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번쩍..화르르르륵.'

    화룡검에 진화기를 가득 운용하여 묵운을 헤집어 놓던 은성이 갑자기 뒤쪽으로 몸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미간 을 찌푸렸다. 진화기에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던 묵운이 여전히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해를 받아서인지 화난 듯이 더욱 기세 사납게 달려 들었다.

    '화스스 -'

    모산파의 주진인이 주작봉에서 뿜어낸 법화(法火)도 힘없이 밀려났다. 하지만 묵운이 꺼리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묵운의 앞을 막아선 이들은 흰수염이 멋들어진 보무당 백록곡의 두 기인이었다.

    등뒤에 맨 커다란 표주박의 뚜껑을 열자 수증기가 삽시간에 피어올라 허공에 어리더니 어느새 거품방울처럼 투명한 막을 허공중에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토록 기세 사납게 달려들던 묵운이 얇디 얇은 물막을 뚫지 못 하고 있었다. 혈수선과 흑수선의 말로는 표주박속의 물이 옥령신수(玉靈神수)라고 하였는데 말마따나 기묘한 영능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묵운이 방향을 틀면 어느새 그 앞을 또 다른 물막이 막아서고 있었다. 방법을 바꾸었는가?

    물막을 피하기만 하던 묵운이 물막을 덮어 씌우더니 사납게 엉켜들며 뭉클거렸다. 물막을 뚫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 같았다.

    '흥!'

    어림없는 짓이라고 콧방귀를 끼며 만면에 미소를 띠던 혈수선의 안색이 점차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집중적 인 공세에 옥령신수로 이룬 물막조차 견디지 못하고 묵운이 안개처럼 조금씩 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막속에 또 다른 물막을 펼쳐 더 이상의 접근을 간신히 막아놓았을 때에는 겉쪽에 펼쳐졌던 물막은 거의 무 용지물이나 마찬가지로 변해 있었다. 흉흉하게 구멍이 뚫린 물막은 묵운에게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었기 때문 이다.

    흑수선과 혈수선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묵운이 물막을 뚫는 속도는 더욱 빨라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에 공포스런 묵운이 군웅들을 덮쳐갈 것 같았다. 다급한 은성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사방을 살펴 보았지 만 묵운을 조절하는 현천교의 술사들을 찾을 방도는 없었다.

    이곳과 멀찍이 떨어져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는데 그동안 겪어본 그들의 능력으로는 멀리 떨어져서도 손금 보듯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술법을 부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심안을 운용할수 없음이 통탄스러운 지경이었다. 심안만 정상이라면 짧은 시간 안에 적의 술사들이 음모를 꾸 미는 장소를 찾아내서 저지할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수만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문상이 전세를 지휘하면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곳을 연신 살펴보고 있었다. 문상 또한 묵운의 위험성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쉬리릿'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선 은성이 문상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묵운을 조절하는 현천교의 술사들을 찾아내서 처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현재 자신이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룡을 불렀습니다. 이대협이 도와주면 빠르겠지만 전세가 흉흉하여 이대협이 빠져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구룡에게 현천교의 술사들을 맡길 터이니 이대협께서는 현천교의 괴인들과 수호단을 상대해 주 시기 바랍니다."

    "수호단? 그럼 저 적포인들이 현천교의 수호단 입니까?"

    "그렇습니다. 현천교주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호위대와 함께 현천교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입니다. 수 호단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곧이어 현천교주와 호위대도 들이 닥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밀리고 있는데 현천교주와 호위대가 남아 있다니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런데도 문상의 표정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은성이 허공중으로 신형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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