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35)
임원영 2004-06-23 00:13:46, 조회 : 714, 추천 : 5
대지의 숨결 바람.
형체를 붙잡을 수는 없지만 자유와 조화의 절대존재로 불리우는 대기의 흐름.....
그 흐름과 역류하여 물결치듯 나아가는 작은 기류가 있었다.
바람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지만 소리는커녕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조차 없는, 완벽한 동화를 이룬채 말이다.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절대살수들이 꿈에 바라는 경지이리라.
희미하니 남겨진 혈향(血香)을 따라 물 흐르듯이 영활하게 신형을 날리던 존재가 멈춰선 곳은 청령전과 반리나 떨어진 장소였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은폐와 엄폐로 몸을 숨긴채 경계를 서는 최 외곽 부근에 당도한 것이다.
어떻게 침투할까?
숨죽여 은신해 있는 고수들이 많이 있겠지만 잠입할수 있는 방법은 열 가지도 넘었다.
미세하니 흔적이 이어진 혈향을 추적하며 잠입하자면 몇가지는 제외되지만 그래도 선택의 폭은 넓었다.
은신한 고수들중에 절대 고수가 끼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걸 고려하면 세가지 방법으로 압축되어졌다.
혹시나 재수없게 술사까지 동원되어 졌다면...
가능성은 적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신중함이 없었다면 살문 최고의 전설이라는 무혼화(無魂花)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스르릇'
꺼지듯이 사라진 무혼화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적의 시선에서 차단된 은밀한 장소였다.
달빛과 어우러져 대지의 음기(陰氣)가 고요히 피어오르고 있는, 술법을 펼치기에 최상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샤락!'
무혼화가 꺼내든 부적은 매우 특이한 모양이었다.
사람... 그것도 젊은 여인의 나신 모양이었다.
붉은 주사로 얼굴을 그려놓고 배꼽과 치부조차도 세세히 묘사된 다소 망측한 부적인 것이다.
단순한 부적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이 한 장의 부적을 만들기 위해 들인 공덕이 결코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유령변신술(幽靈變身術)을 펼치는데 필요한 부적으로 길일을 정해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며 매일 새벽에 삼기주(三氣呪)를 외우고, 이어서 추혼현형주(追魂現形呪)를 49번 외워 낮과 밤으로 영력을 불어넣으며 얻은 부적이었다.
21일이 지나야만 지기(紙旗)가 교가(交加)되어 영(靈)이 나타나는데 지극정성으로 35일이 지나야 비로소 완성되어질 수가 있었다.
무림맹의 절세고수들이 즐비한 형국이 아니었다면 절대 사용할리 없는 법보이기도 한 것이다.
부적을 손에 든 채로 삼기주(三氣呪)를 외우자 부적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손아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남쪽을 향한채 왼편으로 머리를 돌려 좌현왕(左賢王)과 북해흑살지기(北海黑殺之氣)를 마셨다가 부적에 불어내자 부적에 사기가 움씰거리는가 싶더니 눈에서 살광을 줄줄이 뿌려대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추혼현형주가 흘러나왔다.
"혼령유령(魂靈幽靈) 구규개명(九竅皆明) 외기사상(外其四象) 내전오행(內全五行)....급급속다이(急急速多耳)."
주문이 진행되자 부적이 투명한 색으로 변해가는가 싶더니 마지막 구절이 끝나갈 무렵에는 무혼화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중에 둥실 떴다.
무혼화와 키가 비슷한 투명한 나체 여인이었다.
주문의 마지막인 '급급속다이(急急速多耳)'라는 구절이 끝나자 허공중에 떠 있던 나신이 무혼화의 몸과 합치되어졌다.
그러자 무혼화의 몸이 어둠과 동화된 듯 사라져 버렸다.
모습만 감추고자 하였다면 은신술이나 둔신법을 펼쳤을 터이지만 굳이 유령변신술을 펼친 것은 술사들의 이목조차 피하기 위해서였다.
높은 무공으로 경비를 서는 자들을 피해 기척 없이 스며들수는 있지만 귀신들을 부리는 술사들에게서는 벗어날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귀신의 이목조차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술법도 작은 재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무혼화이었다.
결계를 부순후 중상을 입고 도망친 자가 하늘 끝 지옥불꽃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능히 찾아낼수 있는 추적술 또한 큰 자랑은 아니었다.
그를 찾아낸후 펼쳐 보일 살인 예술이 진정한 자랑이 될 것이다.
아무리 천신의 능력을 지닌 자라지만 허점은 존재할 터이었다.
더군다나 중상까지 입었다면.....
허점이 없는 절대적 능력을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자신에게는 최후에 사용할수 있는 비장이 수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혼화라는 별호는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휘리리리릿.
비릿한 조소를 남겨놓은채 무혼화의 흔적이 돌연 사라져 버렸다.
유령이 되어 귀신처럼 떠나간 것이다.
'똑! 똑!'
검후가 거처하는 방의 목문이 두들겨지는 소리였다.
은성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후 달콤한 입맞춤을 하던 검후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무런 기척조차 없었는데 누군가 다가와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성에게서 천부경을 가르침 받은 이후로 무공이 일취월장한 검후였다.
무공과 함께 이목조차 영민하여져서 이밤에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고수라 하여도 오장 밖에서부터 기척이 감지되었을 터이었다.
아무리 사랑에 도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몸을 일으켜 방문쪽으로 다가서는 검후의 한손은 빙검 여래혼의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누구세요?"
다소 긴장된 듯한 목소리였다.
문 앞까지 나아갔는데도 상대방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 중의 하나였다.
귀신이거나 아니면 엄청난 고수가 방문했을 것이었다.
"아미타불....!"
다행히 귀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익히 아는 목소리의, 매우 반가운 불호였다.
은성의 하나뿐인 제자이며 포달랍궁의 궁주인 달뢰대라마가 찾아온 것이다.
안색을 활짝 펴고 미소띤 얼굴로 은성을 돌아본 검후가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온 달뢰대라마가 검후에게 반례를 한후 곧바로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달뢰대라마의 뒤에는 왠 노승도 한명 뒤따르고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승이었다.
승복을 보니 소림사의 스님으로 판단되었는데 소림 삼신승인 공지대사보다도 법력이 깊어 보이는 신비한 노승이었다.
"스승님! 도착하여 안부를 듣고는 한달음에 달려 왔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봅니다. 몸은 건강하신지요?"
달뢰대라마가 깊은 합장으로 예를 표한후 안부를 살피자 은성이 미소로써 답한 후 침상에서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사께서 보시기에는 어떠신지요?"
"스승님의 경지를 제가 어찌 가늠할 수가 있겠습니까?"
은성의 능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깊이 담겨진 말이었다.
이때 뒤쪽에 있던 노승이 조용히 앞쪽으로 다가섰다.
"범각 대사님 께서도 오셨군요."
[아미타불...]
은성의 포권지례에 혜광심어로 불호를 터트린 노승은 다름아닌 소림의 최고수인 범각대사였다.
걱정스런 기색으로 다가선 범각대사가 은성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었다.
그리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은성이 중상을 입어 거동조차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컸었는데 중상은커녕 내상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한올의 기파조차 흐트러짐이 없이 완벽히 갈무리된 내기로 판단컨대 중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현기어린 눈빛에 광채서린 얼굴은 소림사의 천문금쇄진(天門金鎖陣) 안에서 희대의 살인 마인을 상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의(禮義) 바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은성이 자신을 보고도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대협!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것인지요?]
범각대사의 혜광심어가 나직이 울려퍼졌다.
나이나 배분으로 보면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은성이 낮았지만 달뢰대라마의 스승임을 고려하여 존칭을 붙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생각보다는 회복도 빠르고 말입니다."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깨어나면서 몸상태가 매우 호전되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은성이었다.
직접 운기하여 보지는 않았지만 태극진기도 삼사할은 회복되어졌을 터이었다.
"천의무봉의 경지에 오르신 스승님께서 내상이라니..... 현천교의 괴인이 그 정도로 강한 존재인지요?"
달뢰대라마의 표정에는 의아심과 분기가 어우러져 있었다.
세속을 잊고 소림사의 깊은 금지(禁地)에 은거하던 범각대사를 간곡히 불러들인 이유가 현천교의 괴인을 상대키 위함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달뢰대라마였다.
소림사의 불수복마진(佛手伏魔陣)에 머물며 커다란 깨우침을 얻은후 깨우침을 무공으로 승화시키느라 시간이 지체되어졌지만 무공은 또 다른 경지에 도달되어 있었다.
범각대사에게서 괴인의 존재를 듣고 동행을 혼쾌히 허락한 것도 무공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기어검도 간단히 파해할수 있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물리친후 포달랍궁의 무공이 중원을 떨쳐 울릴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맹과 현천교가 결전을 벌이고 있다니 무림맹으로 사부를 찾아 떠난 은성을 만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공이 자신보다도 몇배나 뛰어난 스승조차 부상을 입을 정도로 괴인이 강하다니 믿을수가 없었다.
"괴인에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괴인들의 무위도 대단하지만 현천교에는 또 다른 절대적 힘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드러난 힘의 주체가 상당량 파괴되어졌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힘 또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절대로 믿지 못할 정도였다.
괴인들이라고 하시니 괴인이 한명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괴인들에 버금갈만한 무력이 존재하고 또 다른 힘이 있을 수도 있다니.....
"그토록 대단한 무력을 가졌다면 범각대사와 제가 오는 것을 왜 막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기척을 감추고 은밀한 신법으로 통과하였지만 막아서는 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
달뢰대라마의 의문에 은성도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풍령자와 삼천진인이 올 때에는 그토록 악착같이 저지하던 현천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가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현천교도들이 이곳을 침입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임무가 확연히 구분되어져 있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할수도 있는....'폭풍전야의 고요' 같은 것 말입니다."
[일리있는 말입니다. 현천교의 무리들이 장악한 곳을 지나쳐 올때 숨막힐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범각대사가 은성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긴박함을 감지한듯 실내에 긴장감이 가득해졌다.
그런데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깨치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와 이어지는 기척이었다.
"검후님! 들어가도 되는지요?"
목소리로 보아 무림맹 대공자인 삼일검 이종주였다.
이밤에 찾아온 것으로 보아 중요한 용모가 있는 것 같았다.
검후가 문을 열어주자 들어와 모두에게 예를 표하더니 정기가 서린 목소리로 공손하니 입을 열었다.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회의장으로 속히 모셔오라고 사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척이나 정세가 심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선뜻 방을 나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
"문상께서도 재삼 부탁하셨습니다. 법왕도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급한 상황이라 하는데도 나가려는 기척이 없자 대공자가 또다시 입을 연 것이다.
"아미타불! 노납은 여기에 남아 있겠네. 대사님과 검후는 바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달뢰대라마로서는 회의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은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중원 무림과는 적이나 마찬가지의 사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뿐인 스승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이다.
"저도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검후 또한 가기를 거부하였다.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은성의 몸이 편치 않은데 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법왕과 검후의 주장에 난처한 것은 무램맹의 대공자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달뢰대라마와 검후가 긴급 회의에 참석치 않는다 하니 은성 또한 미안하고 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선사님! 포달랍궁과 소림이 화해하고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이상 무림맹도 포달랍궁과 친구가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선사께서 회의에 참석하시면 포달랍궁의 위상을 드높일수 있을뿐더러 무림맹 군웅들의 사기도 몇 배로 진작될수 있을 것입니다. 문상께서도 그 때문에 특별히 선사께 참석해 주십사고 부탁을 드린 것 같은데....회의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간곡한 어조였다.
말을 하는 은성은 부탁을 하고 있었지만 듣는 달뢰대라마에게는 명령이나 다를바가 없는 부탁이었다.
달뢰대라마에게 부탁을 한 은성의 시선이 이번에는 검후를 향했다.
"하매!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내상도 거의 나았고.. 잠시 혼자서 생각할 것도 있거든....."
내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반쯤 뽑아든 화룡검에서 붉은 검강이 석자나 뿜어져 나왔다.
검강을 검끝이 아닌 검 측면의 원하는 부위로 뿜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익히 아는 검후와 달뢰대라마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검강으로 펼쳐진 내공이 순수한 태극진기가 아니라 화룡검속에 내재된 열양지기 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밝아질수가 없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궁주님, 오라버니가 잠시 혼자서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하니 같이 회의에 참석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은성의 무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검후였다.
검후는 청령전 주변으로 물샐틈 없는 경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적이 쳐들어오면 그때 은성에게 달려와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괴인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라면 수백명이 달려들어도 상관 없을 터이고 말이다.
"아미타불!"
나직이 울려 퍼지는 불호.....
거절치 않음은 승낙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편히 쉬십시오."
예를 갖춘후 발걸음을 옮기는 범각대사와 달뢰대라마의 뒤를 따르며 검후가 은성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았다.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애절한 눈빛으로 말이다.
방문이 닫혀지자 은성은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현천교와의 대격돌이 임박해진 것 같은데 중상으로 재 능력을 발휘할수 없음에 기인하는 답답함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내쉬어졌다.
이때였다.
닫혔던 방문이 덜컥하니 열려졌다.
그리고 뛰어들어오는 작은 인영.....
검후였다.
뛰어들자 마자 은성을 끌어 안았다.
"가다가 오라버니가 또 보고 싶어서 달려온 거예요. 잊고서 놓고 온 것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기 때문에 바로 가야 하지만.....갑자기 오라버니가 마구 마구 보고 싶어졌어요.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저 바보 같죠?"
"아니.....선녀 같아!"
답답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비록 태극진기가 삼사할 밖에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편이었다.
게다가 천군만마와 같은 화룡검이 있으며 내상이 회복되어지는 속도도 빨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검후가 있고 달뢰대라마까지 도착하였으니 한번 해볼만한 결전인 것이다.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는 소림사의 불수복마진 안에서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것 같았다.
눈빛을 보면 알수 있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암울하였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갑자기 희망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 모두가 검후 때문이었다.
바보처럼 자신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선녀같은 검후 말이다.
"정말이야. 천상의 선녀도 하매보다는 못할거야."
은성이 마주잡은 검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수많은 언어가 오고 갔지만 영원히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목에서 손으로 그리고 손끝으로 이어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뒷걸음으로 움직이는 둘 사이를 눈빛이 계속 이어주고 있었다.
검후가 나가고 방문이 닫혀졌지만 은성의 가슴은 또다시 답답증에 빠져들지 않았다.
기분 좋은 미소로 긴 호홉을 두어번 한후 침상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상을 살피고 현재까지 회복된 태극진기의 량을 다시 한번 점검한후 폐쇄된 상단전의 상태 및 복원 가능성을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안위부터 돌봐야 했다.
심안을 발휘할수 없는 지금 깊은 통찰에 잠겨 들기 위해서는 무언가 안전 조치를 취해 놓아야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육합천서(六合天書)의 통천여의대법(通天如意大法)에는 육정육갑신을 부리는 법술과 함께 오귀를 부리는 법술도 적혀 있었다.
동방파에 있으면서 심심파적으로 익혀 두었지만 아직 한번도 사용해본적이 없는 법술이었다.
밤에만 현신하는 단점이 있지만 부르면 교자(轎子)를 메고 나타나 그 위에 앉으면 순식간에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산중이나 외딴집에 유숙하게 될 경우 경비하도록 명령하면 위험을 알려 안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해동 동방파에서 오귀를 불러 각인(角印)으로 허인(虛印)을 찍은 뒤 각각 맹세를 시켰기 때문에 부적없이 언제라도 불러서 이용할수 있는 상태였다.
앉은 채로 멤돌며 오방(五方)의 기를 다섯 번 들이마신 은성이 오귀를 부를수 있는 혼천주를 읊조렸다.
"정령정령(精靈精靈) 부지성명(不知姓名) 수양오귀(授兩五鬼) 도오단정(到吾壇庭)....태상노군(太上老君)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진언을 마치자 침상 옆에 다섯명의 괴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귀신이지만 형상이 뚜렷한 것을 보면 역량이 대단한 귀신들임이 분명하였다.
오귀 각자가 생김새도 특이하였으며 성명(姓名) 또한 달랐다.
"두인(竇仁)과 이개(李凱) 그리고 장오(張五)는 건물 밖 삼십장을 철저히 경계하여 이상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오귀를 부릴시에는 단호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명령하여야 한다.
은성의 명령이 끝나자 오귀중 삼귀가 허공중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형상이 분명한데도 벽이나 지붕을 허깨비처럼 통과하여 드나들 수 있는 것이 귀신은 귀신이었다.
"십태(十泰)는 하늘을 살피고 저만(?晩)은 땅속을 살펴 보아라!"
'스르륵'
오귀를 불러 육방의 경비를 지시한 은성이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하였다.
본격적으로 몸 상태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존념하여 몸 내부를 관조하던 은성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중단전의 내단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진기가 유독 십이정경(十二正經)중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과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에서 흐트러져 원활히 흘러나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은성의 태극진기는 일반진기처럼 경락에만 의존하여 운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락에 무관한 운기 방법은 아니었다.
광휘처럼 퍼져나가 몸 전체에 진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큰 특징만이 다를뿐 여전히 경락속으로는 도도하니 진기가 흘러 다니고 있었다.
그중 양쪽 발을 사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두 정경(正經)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범각대사와 달뢰대라마가 찾아 왔을때 굳이 일어서서 예를 갖추지 않을 것은 어렴풋이 불편하다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런일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검각산의 혈투나 유령왕과 싸우다가 내상을 입었을 때에도 금새 회복되어졌던 신체였다.
이번에도 빠른 자체 회복력을 믿었지만 조금은 더디게 회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타격이 컸다고 볼수도 있었다.
족태양 방광경은 오행(五行)상으로 수(水)에 속하며 기맥이 신장에 연결되고 뇌와 상연되어지고 있었다.
백회혈에 교회하기 때문에 예민하고도 중요하기 이를데 없는 경맥이었다.
그리고 족태음 비경은 오행상으로 토(土)에 속하고 기맥이 비에 속하며 위에 연결되고 심과 설근에 상연되어졌다.
내상을 치유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자각한 은성은 운기를 중단하고 기치료에 치중하기로 하였다.
태극진기를 변화시켜 오행으로 분리시킨후 오행진기가 각자의 장부로 흘러나가도록 유도하였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태극진기를 원하는 형태의 진기로 변화시키는데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몸안에서 운용 가능한 태극진기의 오할을 진토기(眞土氣)로 변화시킨후 비장으로 유입시켰다.
비장속으로 들어온 진토기들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뛰어놀더니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존념하여 진토기를 조금씩 족태음 비경의 경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일심동의(一心同意)로 진토기에만 의념을 두어 운기에 몰두한 때문인지 일각도 안되어 일주천을 마칠수가 있었다.
족태음 비경만을 따라 운회한 때문인지 짧게 끝났으나 실상 정상일때에 비해서는 몇 배나 느린 속도였다.
두 번째 일주천은 반각도 소요되지 않았다.
세 번째를 끝마친 은성은 족태음 비경에 속한 경락이 대부분 치유되어 졌음을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족태양 방광경에 있었다.
은성이 족태양 방광경 치료를 뒤쪽으로 미룬 것은 족태양 방광경의 치료가 힘들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경맥중에 백회혈이 속해 있는 만큼 조그마한 부주의로도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수도 있는 것이다.
양다리가 불편한 영향도 족태음 비경보다는 족태양 방광경에 의한 요인이 짙었다.
천기(天氣)를 받아들이고 뇌에 연결되어져 있으며 심령의 통로로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혈도인 백회혈.....
결코 쉽지만은 않은 치유이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진토기는 물론이고 오행진기를 모두 불러들여 태극진기로 복원시킨 은성은 또다시 진수기(眞水氣)로 변화시켜 신장으로 유입시켰다.
그리고 신중을 기해 조심스럽게 족태양 방광경에 속한 경락으로 진수기를 이동시켰다.
족태양 방광경은 67개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한개혈 만이라도 막혀 있다면 두 다리의 불편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은 몇 개혈이 막혀 있는지조차 모르는 은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