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34)
임원영 2004-06-14 23:42:57, 조회 : 744, 추천 : 15
높다란 산정(山頂).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한명의 장년인이 망부석인양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혈홍으로 불타는 석양.....
피보다 더 붉은 구름은 쥐어짜면 비명과 함께 선혈을 흩뿌릴 듯 하다.
혈운이 검붉은 피를 토하다 어스름에 밀려 그을려 가자 장년인의 눈살이 가만히 찌푸려져 갔다.
뒷짐을 진채 오연히 고개를 쳐든 장년인의 인상은 중후하고 인자스러 웠건만 왠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담고 있었다.
황혼이 스러지고 어둠이 짙어져 가자 눈가에 싸늘한 한기조차 스쳐 지나갔다.
"아쉽구만! 혈천의 진경(眞景)이 이리도 빨리 끝나다니..."
무심한 듯 하면서도 조금은 날이 선 목소리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산정의 깊은 고요를 떨쳐 울리자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어졌다.
장년인의 등 뒤로 오장여 뒤쪽에 꿇어 엎드려 있던 인영이 상체를 일으킨 것이다.
옷은 물론 머리카락과 피부조차도 흰색 일색인데 특이하게 눈동자에 흰자위가 하나도 없는 기이한 인물이었다.
흑암인양 검은 눈동자에서 사이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가 싶더니 오른손이 번개처럼 어둠을 갈랐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혹한 일수.....
어둠이 일렁인 직후 그의 오른손에는 뭉텅이로 잘라진 좌수(左手)가 들려져 있었다.
피가 튀고 뼈가 절단되어졌건만 비명은커녕 일만의 표정조차 변함이 없는 인영.....
오히려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베어문 자는 놀랍게도 현천교의 총관인 귀명자(鬼鳴子)였다.
잘라진 좌수를 거꾸로 들고 서쪽 하늘로 향한 채 내공을 주입하자 혈무(血霧)가 서서히 피어올라 서녘 하늘로 흘러갔다.
붉은 은하수인양 서쪽 하늘이 또다시 혈홍으로 일렁이자 만족한 듯 장년인의 미간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하였다.
"허허! 쓸데없는 짓을 했구만. 그만하게!"
현천교주의 인자하고 다정스런 목소리였다.
창백한 눈빛으로 시선을 오른손으로 옮겨가던 귀명자가 사면이라도 받은 듯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남은 죄과는 혼세지계가 완성되는날 치루겠습니다."
"....."
산정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귀명자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침묵의 길이는 그 죄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리라.
산정이라 조금은 차가운 기온인데도 귀명자가 오싹하니 몸을 움츠렸다.
"저런, 피가 많이 흐르네 그려!"
한참의 침묵속에 들려온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깨 밑으로 너덜하게 잘려진 팔을 응시하니 어느새 지혈이 되어 있었다.
공기의 미동조차 느낄수가 없었건만.....
이정도 처벌로는 오히려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깊이 수그리는 귀명자의 무릎아래쪽에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로 흥건히 적셔져 있었다.
"노룡파천술(怒龍破天術)이 깨어진 이상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가야 할 것 같네."
"죄..죄송합니다. 설마하니 노룡파천술이 깨어질 줄은....."
귀명자의 고개가 더욱 깊숙이 수그러졌다.
"천하무적이라며 그토록 자신하던 결계가 아니던가? 전말을 말해보게!"
현천교주의 시선은 어느새 산 아래쪽의 한 지점을 쏘아보고 있었다.
청령전이 세워져 있던 장소였다.
곤륜을 돕기 위해 나선 무림맹의 군웅들이 모여 있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생존한 교도들의 말로는 천신(天神)의 능력을 지닌 자가 혼자서 결계를 깨 부수었다 하는데 믿을수는 없지만 한결같은 대답으로 미루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결계가 파괴되자 또 한명의 적이 난입했는데 지옥의 악신처럼 잔인무도하고 흉악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죽여도 죽여도 계속 소생하는 불사지체를 지닌 자였답니다. 노룡파천술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간신히 불사지체를 지닌 자를 녹여 없애 버렸는데 남은 한명은 불사지체를 지닌 괴물보다 더한 능력을 가졌다 하였습니다. 술법을 익혔는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그를 공격하다 갑자기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굉음속에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자는 사라졌고 말인가?"
대강은 알고 있는 듯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천신의 능력을 가졌어도 결계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계를 부수고 안으로 진입하다 혼극인(魂極人)들의 공격에 몇 번이나 당했다 들었습니다. 불사지체가 사라진후 노룡파천술의 파천지력에 또다시 수차례 가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가공할 신위를 발휘하고 사라져 갔습니다."
"피해는?"
담담히 물어왔지만 귀명자는 쉽사리 입을 열수가 없었다.
단 두명의 적수에 의해서 입은 피해치고는 너무나 막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적중 한명은 도망까지 치지 않았는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존자는 일..일백 오십명 입니다. 게..게다가..."
목소리는 죽어갔으며 말끝은 더듬거려 졌다.
답답했던지 산 아래쪽을 주시하던 현천교주가 고개를 돌려 귀명자를 직시하였다.
그러자 귀명자가 급히 말을 이었다.
"생존한 고수들의 청각 기능이 손실되고 반수는 아직도 혼수상태 입니다. 그리고 결계안에 머물던 혼극인 일곱중 두명도 불사지체의 괴물에게 당했습니다."
"....."
너무나 황당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피해가 이토록 크다니.....
"천신의 능력을 지닌자라..! 짐작 가는 사람은 없는가?"
격분되어지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함인지 교주가 시선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계의 참상(慘狀)에도 불구하고 별빛은 오늘도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정?사?마를 통털어 살펴 보았지만 찾을수 없었습니다. 오십년전 돌연 사라졌던 정마이선(正魔二仙)이 살아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습니다."
정마이선(正魔二仙).
정파의 무공을 집대성 했다는 정무선(正武仙)과 마교와 사파의 무공을 집대성 했다는 마무선(魔武仙)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십여 나이에 무공을 완성하고 풍운의 꿈을 안고 각자 출도했건만.....
불행히도 출도 한달만에 우연히 마주치면서 둘의 불행은 시작되어졌다.
스치며 운명적으로 마주친 시선속에서 숙적임을 본능적으로 알아 차린후 벌어진 공전절후의 대결이 무승부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끝간데 없는 자긍심은 일년후 같은 자리에서 또다시 만날 것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만났으나 내년을 다시금 기약하는 두사람.
일년마다 이어지는 이들의 대결은 무림의 가장 큰 언제(言題)가 되어졌다.
그런데 절세무공을 견식할 기회로 여겨 악착같이 대결장을 찾아다니던 뭍 고수들을 경악케 만든 것은 이들의 놀랄만한 무공 향상 속도였다.
일년마다 새로운 무공이 선보이고 검강, 검환조차도 자유롭게 펼치는가 싶더니 십년 정도가 지나자 발끝을 땅에 대는 일조차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 이십장 밖에서 관람했지만 십년이 지난후에는 일백장 밖에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던 이 둘이 사라진 것은 또다시 오년이 흘러서였다.
은거했다느니 양패구사(兩敗俱死)를 하였다느니 한동안 무림이 떠들썩해졌다.
하다 못해 신선이 되어 구름속에서 둘만의 대결을 계속하고 있을 거라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십년..이십년이 지나가자 무공의 신지평을 보여 주었다는 이들도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갔다.
오십년이 흐른 지금 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정마이선은 아니네."
확언하듯 대답하는 교주의 목소리였다.
무림 최고의 비사라 할수 있는데 이토록 단언하여 대답하다니.....
잊혀진 비사에 대한 비밀을 상세히 알고 있는 듯해 보였지만 직접 물을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림을 재패하기 위해서는 무림을 알아야 할 것이고 제일 역점을 두고 파악해야 할 것이 무림 재패에 걸림돌이 될 세력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교내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관의 신분이지만 현천교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떠나 오직 교주의 명만을 수행하는 비밀세력 또한 많이 있었다.
"생존한 극락조단의 고수들 말로는 천신의 능력을 지닌 자는 비록 도망은 쳤지만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하 였습니다. 그 보다도 그를 죽이기 일보 직전에 결계 안으로 파고든 괴이한 진기로 인해 위태롭던 결계가 깨어 지고 피해도 몇배로 증폭되어 졌다고 합니다."
"괴이한 진기?"
"곤륜산 최말봉의 자소전쪽에서부터 흘러나와 노룡파천술을 저지하던 진기였다고 합니다. 결계 안쪽에서 지옥 의 악신같은 자가 날뛰자 할 수 없이 파천지력을 결계 안쪽으로 거둬들였는데 파천지력을 추적해 와서 역공을 퍼 부은 듯 하답니다."
"자소전에서 말인가?"
산정에는 긴장이 감돌고 또다시 침묵이 멤돌았다. 술법이 아닌 진기로서 노룡파천술에 대항할 정도라면 이미 인간의 경지는 넘어선 존재일터...
"어쩔수 없이 '그분'께서 오시는 내일 저녁때에나 총공세를 펼쳐야겠군."
희미한 독백이었다.
"총관! 노룡파천술이 깨어진 것은 아쉽지만 대세에는 문제가 없어야 하네. 자소전의 무리들은 대책이 있으니 걱정 말고 청령전에 운집한 놈들을 몰살시키는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그리고 아무래도 그 천신의 능력을 지녔다는 자가 마음에 걸리는데 생사를 확인하고 살아있다면 확실히 처리하도록! 오늘 밤 안으로 말이네."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그자를 상대하려면 무공만으로는 부족하고.. 아! 무공과 술법에 능한 무혼화(無魂花)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혼화? 백련곡 제일의 살수라는 '죽음의 눈' 말인가... 그래, 그녀라면 안심하고 맡길수가 있을 것 같군."
현천교주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여지는 것은 그 믿음이 크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혼화(無魂花)'
그 어떤 존재이기에 정파의 기인이사들이 우글거리는 청령전에 잠입한다는데 안심을 할수 있다는 말인지?
피비린내 풍기는 산 정상에는 어둠보다 더 짙은 음모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잠에서 깨어난 은성은 아직도 검후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 다. 상단전이 폐쇄된 충격이 완전히 가셔진 것은 아니지만 사랑스런 검후가 옆에 있으니 슬픔이 희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계 안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마지막 소원이 검후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 순 간에 비하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인지..... 은성이 마주잡은 검후의 손에 슬며시 힘을 보태었다.
눈을 뜨자 검후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침상 옆에 앉아 고개를 숙여 은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 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찡긋'
은성이 장난스럽게 한쪽 눈만을 깜박거렸다. 검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오라버니!"
은근하며 진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응"
"저.....오라버니가 누워 있을때 옆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
"만약.....오라버니가 잘못 된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따라갈 거예요."
"뭐..뭐라고!"
"....."
실내에 침묵이 감돌았지만 대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감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끝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후의 다정다감한 눈망울을 올려다보던 은성이 다른 손을 뻗어 검후의 두손을 살포시 감아 쥐었다.
"걱정하지마! 나.. 안죽을꺼야."
부드럽게 속삭인후 한손을 가만히 뻗어 검후의 볼을 쓰다듬으며 은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언제나 하매의 곁에 있을 거야. 믿을수 있지? 하매를 두고 절대 죽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매를 사랑하는 내마음 변치 않을거야. 전생은 모르지만 앞으로 내 사랑은 영원히 하매 단 한명 뿐이야..... 하매의 영혼조차 내 사랑이야. "
"훗..."
검후가 고개를 숙여 은성의 빰에 고운 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가만히 부비었다. 은성의 뺨위로 사르르 눈물 이 흘렀다. 검후의 볼위에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두손을 뻗어 가만히 검후의 등을 감싸 안은 은성이 조용히 두눈을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